어쩌면 나, 여행 좋아하는지도.
어떤 여행에는 목적이 없다. 어딘가로 이끌리듯 헤매다 어떤 열린 결말에 이르며 나름의 해석을 붙여 완성되는 장르처럼. 나의 지난 여행도 그랬다.
온종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낯선 침대에서 잠이 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먹고 마시며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게 온전히 보존되었거나 담벼락만 간신히 남은 유적지를 들락거리고, 알파벳, 한자와 아랍어가 혼재된 수많은 표지판을 지나치다 시골과 도시의 경계에서 머물기도 했다.
스타벅스와 중국 식당, 최첨단 IT 회사가 한데 모여 있는 빌딩에서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도 보고, 길바닥에 담요 한 장 달랑 깔고 누워 잠을 자는 사람도 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의 참상을 견딘 중세 시대 건물과 케첩을 잔뜩 뿌린 핫도그 트럭이 길 위에 함께 공존하기도 했다. 1.5유로짜리 편의점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0.5유로어치 화장실을 들리거나, 2유로짜리 트램 티켓을 끊고 4유로어치 거리를 슬쩍 점프하기도 했다.
온갖 장르가 혼재된 두서없는 이야기 같은 여행. 모든 순간이 흥미롭지만 도무지 맥락을 모르겠던 시간을 보낸 뒤 정신을 차려보니 인천공항에 돌아와 있었다. 익숙한 현관에 이르러 여행 짐을 풀고, 사진을 정리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해 사람들을 만나고, 잘 아는 음식을 먹으며 미뤄두었던 일상을 따라잡는 동안 한 달이 금세 지나갔다. 그렇게 신속하게 일상을 되찾았고, 16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멀리 바다 건너 여행을 다녀왔단 사실은 마치 없었던 일이 된 것 같았다. 단지 불쑥불쑥 예고 없이 느껴지는 정체 모를 뭉클함이 있었기에 간신히 실감할 수 있는 정도였다.
누군가는 그게 여행의 여운이라 말했다. 즐거움과 아쉬움이 뒤섞여 부유하는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 여운. 그러나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정체 모를 감정은 여행으로부터 남아 있는 여운 같진 않았다. 그보다는 살면서 만나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 나를 찾아와 조그맣게 문을 두들기고 있는 느낌에 가까웠다. 연이은 장마에 비 구경을 한다던지, 커피를 마실 때, 아무 생각 없이 흐린 눈으로 있을 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다만 되찾은 내 일상은 산만하게 어질러진 집 같아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감정을 맞이하기 약간 망설여졌다. 비 구경을 하다가도 김치전을 부쳐먹어야 한다는 둥, 커피를 마시다가도 세탁기 소리가 나면 빨래를 널어야 한다는 둥 산만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내어줄 공간이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몇 개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여행 앨범에서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사진에 눈길이 갔다. 화려하고 유서 깊은 곳들의 풍경이라던지 그 앞에 서 있는 나도 아닌 그냥 어느 도심 속 녹지를 지나다 무심코 찍은 숲 사진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눈길이 가는 건 낯선 여행지에서 잠시 멈춰 선 나의 시선이 담겨 있기 때문인 듯했다.
시간의 목을 조르며 여행 같은 건 사치다 날 선 말을 쏟아내던 날들이 많았다. 떠밀리듯 떠나고, 돌아올 날에 시달리던 나, 약간의 불안함에도 검색 엔진을 붙들고 있던 나, 나는 왜 그리도 나를 '여행' 보내주지 못했을까. 사진 속의 나는 먼 나라의 나무들 사이에 멈춰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평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그맣던 노크소리도 멎고, 어느덧 마음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동안 쭉 받아들이지 못했던 낯선 감정은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느꼈던 모든 순간이 여행이었다는 잔잔한 감동이었다.
나는 여전히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떠나야 하는 타입도 아니고, 살면서 유럽 한 번 가봐야지 스타일도 아니다. 삶이 나를 미치게 할 때 여행으로 치유되지도 않으며, 친구, 가족, 연인과의 특별한 유대감을 다지는 유일한 수단도 아니다. 나란 사람은 이쯤 되면 여행사도 한번쯤 챌린지 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은, 여행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에 짓눌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큰맘 먹을 필요도 없고 요즘 세상 사람들은 어디를 얼마에 많이 가는지 몰라도 그만이다. 여행이란 그냥 잠시 다른 곳에 가는 것이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되므로 떠나지 않을 이유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언제든 여행을 떠올릴 때, 한결 마음이 가볍다. 어쩌면 나, 여행 좋아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