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욘킴 Oct 09. 2024

취향탐구: 산책

보잘것없지만 기분은 약간 좋은 순간들이 모여 궁극적으로는 삶을 지탱한다.

산책에 특별한 목적은 없다. 편한 옷을 입고 느릿한 걸음으로 집을 나서면, 오른쪽이나 왼쪽 중 마음에 드는 방향을 고른다. 오른쪽 길로 가면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조금 오를 수 있고, 보통은 숨이 약간 차는 지점에 놓인 작은 벤치까지 간다. 왼쪽으로 가면 고수부지로 연결되는 터널을 지나 강변의 나무 데크 길이 이어진다.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하염없이 걷기 때문에, 왼쪽 길을 고른 날에는 대충 돌아오는 시간을 염두에 두며 걷는다.


어릴 땐 산책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어른들의 '바람 쐬는' 여정을 따라나서는 것이 그랬다. 그래도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는 덜 심심했기에 종종 따라나서곤 했다. 정처 없이 느릿느릿 걷고, 별로 흥미롭지 않은 잡담을 듣는 동안 내 관심은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쏠렸다. 아이스크림은 먹을 수 있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는 '사주려나? 사주려나?' 하는 기대감이 가득 차서 어린 가슴이 콩닥거렸던 기억이 난다.


미국의 강아지들은 주인이 스타벅스를 들르는 산책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흙길이나 잔디밭보다 덜 재미있는 도심 속 포장도로를 얌전히 걸어야 하지만, 스타벅스에 도착하면 강아지 전용 비밀 메뉴인 퍼푸치노(Puppuccino)를 맛볼 수 있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사진 속 강아지들이 주둥이 주변에 흰 크림을 잔뜩 묻힌 채 활짝 웃고 있는 걸 보면, 휘핑크림을 조금 짜 주는 것 같다. 스타벅스를 목도에 둘 즈음 강아지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꼬리를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아지 주인이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아이스크림 안 돼', '노 퍼푸치노 투데이!'란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시시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산책이 된다. 고개를 떨군 어린 나와 강아지의 시무룩한 모습이 겹쳐진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산책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던 어린이는 골목 어귀를 돌아 사라졌고, 이제는 그냥 아이스크림 살 돈 안 가지고 나온 어른이 되어 그 길을 느릿느릿 걷는다. 몇 걸음 걷기도 아니고, 딱히 들를 곳도 없는 걷기. 같은 거리, 같은 벤치, 같은 나무들을 지나며 특별한 발견은 없다. 그저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익숙한 길을 걷는 동안 생각을 애써 정리하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고민들을 굳이 떨쳐내려 하지도 않는다. 얼마간 느릿하게 걷다 보면 손에 쥐고 있던 지지부진한 것들이 자연스레 느슨해진다. 흔히 기분이 상쾌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는 산책의 마법 같은 효과라기보다는, 약간 무심해지는 느낌이다.


매일 해야 할 일은 많고, 쉴 틈은 적어졌다. 어른이 되고 나니 일상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산책을 하며 약간 느슨해진 상태를 만드는 것은 나름의 활동성도 있고, 마냥 드러누워 쉬는 것보다는 덜 부담스럽다. 산책을 다녀온 뒤 차가운 보리차를 한 잔 마시면 기분도 약간 좋아진다. 걷고 나서 보리차가 더 맛있다고 좋아하는 스스로가 약간 가엾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렇게 보잘것없지만 기분은 약간 좋은 순간들이 모여 궁극적으로는 삶을 지탱하는 것이다.


내일도 퇴근 후 산책해야지.

작가의 이전글 기억의 온도: 별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