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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lly park Aug 22. 2022

10년만의 재회

얼마 자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6시다. 대충 3시간 잔 것 같다. 어제 아니 오늘 아침에 침대로 곧장 가서 뻗느라 안대도 안하고 귀마개도 안하고 자서 그런 가보다. 쳐 놓은 커튼 사이로 뜨거운 방콕의 햇살이 들어오고 내 자리는 맨 구석자리 2층이라 천장에 설치해 놓은 대형 에어컨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다행히 숙취는 없다. 어제 춤추면서 땀으로 술이 다 빠져나갔나 보다. 침대에 멍하게 좀 누워있다 목이 말라 1층으로 내려갔다. 어젯밤 그렇게 시끄럽던 곳이 꿈만 같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숙소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걸었다. 어제 과일주스 마셨던 곳 옆에 커피를 팔았던 것 같다. 숙소 바로 맞은편에 세븐일레븐이 있지만 캔커피로는 안 될 것 같다. 머리가 깨질 듯이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하다. 역시나 과일주스 가게 옆에는 카페가 있다. 영어 메뉴는 없고 음료 그림 밑에 태국어로 뭔가 적혀 있다.



“아이스 커피. 블랙. 노 슈가 플리즈”


다행히 맛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신다. 가격도 싸다. 25바트다. 슬리브 대신 비닐봉지에 넣어서 손잡이를 잡고 빨대를 꽂고 홀짝홀짝 마시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 10시에 하나짱과 약속이 있다. 10년 전 호주에서 만난 동갑내기 일본 친구다. 호주에서 헤어지고 어느 순간 페이스북을 보니 태국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벌써 4년차다. 태국으로 오기 4개월 전 인스타그램에 태국 간다고 올렸더니 만나자고 디엠이 왔었다.


“넬리야 굿모닝. 일어났어? 오늘 10시에 시암역인거 알지?”


“그럼. 오늘을 위해서 어제 많이 안 마셨어”


“시암까지 어떻게 올 꺼야? 택시? 버스?”


“오랜만에 페리 타보고 싶어서 사판탁신역에서 BTS로 갈아타서 가려고”


“그럼 사판탁신역에서 보자. 거기가 나한테도 더 가까워”


샤워를 하고 리셉션에 들러 카메라를 찾아서 숙소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걸어갔다. 사거리에서 대각선으로 길을 건너 파수멘 요새 쪽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길이다. 조금 더 깨끗해진 느낌이다. 요새 바로 뒤에 있는 공원을 가로 질러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페리 터미널이 나온다.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나를 보고 직원이 나온다.



“어디가세요?”


“사판탁신 스테이션 가요”


“30바트예요. 페리 곧 도착해요”


5분쯤 기다리니 페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작은 배가 들어온다. 표를 보여주고 페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페리는 사람들이 올라타자마자 바로 출발한다. 탁한 흙탕물 색깔의 짜오프라야 강을 타고 천천히 나아간다. 2층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하다. 강 건너편에는 제법 분위기 좋아 보이는 식당과 바들이 줄지어 서 있고 왓아룬도 보인다. 밤에는 빛이 반짝거리며 더 예쁘겠지. 아침부터 하늘에 시꺼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더니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 맞는 걸 좋아하지만 카메라가 걱정되어 1층으로 내려갔다. 창가 쪽에 앉으니 강이 손에 잡힐 듯이 더 가깝다. 비가 내려 강에 수없이 많은 동그라미가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비가 조금씩 거세 지려고 할 때 페리는 종점인 사톤역에 도착한다. 사톤에서 사판탁신까지는 걸어서 2분정도 거리다. 



하나짱에게서 전화가 온다.


“도착 했어? 어디야?”


“도착 했어. 지금 사판탁신역안으로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고 있어”


“올라가지 말고 뒤돌아봐. 아니 아니. 오른쪽으로”


하나짱이 보인다. 한손으로는 전화를 들고 다른 한손은 머리위로 크게 저으며 인사하고 있다. 나도 온 힘을 다해서 인사했다. 그리고 10년만의 재회의 포옹을 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10년 전 이랑 똑같다. 하나도 안 늙은 것 같다. 말투도 똑같고 스타일도 그때와 똑같다. 각자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보고 있었지만 10년동안의 이야기를 하기엔 부족하다. 


“친구들은 차마 막혀서 1시간정도 늦을 꺼 같아”


하나짱의 태국 친구들도 같이 만나기로 했다. 다들 한국을 좋아해서 오고 싶다고 했단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친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 걸으면 좋겠지만 도저히 맞으며 돌아다닐 비가 아니다. 우산을 사기도 애매하다. 우산을 사서 한국에 가져가기도 애매하고 하나짱도 집에 우산이 많단다. 그래도 온세상을 적시는 방콕의 비는 좋다. 그리웠다. 비냄새가 진동한다. 비가 오는 동안만큼은 시원해서 땀도 흐르지 않는다. 


하나짱의 전화가 울리고 친구들이 도착했단다.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타고 올라갔다. 하나짱의 친구들이 손을 흔든다.


“싸와디캅”


두 손을 얼굴 앞에 모으고 인사했다. 그들도 손을 모아 응답한다. 메이, 피 그리고 폴이다. 메이와 피는 하나짱의 태국어 선생님이었단다. 폴은 피의 남자친구다. 일단은 씨암역으로 BTS를 타고 가기로 했다. BTS를 탈 때는 마스크를 써야한단다. 수완나품 공항에서 나오면서부터 심지어 택시안에서도 한번도 마스크를 쓴 적 없었는데 대중교통은 써야 하나보다. 정말 혹시나 몰라서 챙겨온 마스크를 썼다. 다행이다. 오랜만에 탄 BTS는 역시 쾌적하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시원하다. 아 BTS는 방탄소년단이 아니고 Bangkok Transit System이다. 그래서 처음에 방탄소년단이 BTS로 불렸을 때 많이 웃었었다. 



씨암역에 내려서 밥을 먹기로 했다. 한끼도 안 먹고 아메리카노만 마셨더니 허기진다. 원래는 친구들이 생각한 맛집이 있었는데 비가 너무 와서 쾌적하게 씨암센터 몰 안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꽤 고급 져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진짜 현지인들이 먹는 거 먹고 싶어. 카오산에서 먹는 거 말고”


친구들이 메뉴판을 보며 한참 고민한다. 나도 외국인 친구가 와서 아무거나 시켜 달라고 하면 고민하겠지. 그래서 메뉴판에 있는 사진을 보며 도와줬다.


“나 생선 좋아하고 풋파퐁 커리도 좋아해. 똠양꿍도 당연히 좋아하고”



그렇게 메뉴가 정해졌다. 음식도 맛있지만 배가 고파서 쉼없이 입으로 밀어 넣었다. 게껍질이 없는 풋파퐁 커리도 맛있고 처음 먹어보는 하얀색의 똠양꿍도 맛있다. 굽지 않고 튀긴 생선도 기가 막힌다. 정신없이 먹고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비가 그쳐서 햇빛이 쨍쨍하다. 방콕 날씨는 정말 모르겠다. 


하나짱과 메이와 나는 잠깐 기다리고 피와 폴이 차를 가지러 갔다. 피가 일하는 태국어 학원이 여기 몰 안에 있어서 차를 주차해 놨단다. 태국에서 여러가지 교통수단을 다 이용해 봤지만 현지인의 차는 처음이다. 30분 정도 이야기하며 기다리니 네이비색 SUV가 비상등을 깜박거리며 우리 앞에 멈춰 선다. 


“이제 어디 가고 싶어?”


“밥 먹었으니 커피 한잔하고 싶은데 괜찮은 카페 있어?”


친구들은 태국어로 잠깐 회의하더니 말한다.


“아리역에 요즘 핫 한 카페 있어. 거기로 가자”


생각보다 한류는 태국 곳곳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왠만한 한국 배우와 가수 이름들은 다 알고 나도 못 본 드라마와 영화 내용들을 꿰뚫고 있다. 나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메이가 입고 있는 검정색 바탕에 하얀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반팔 티는 한국에서 사 온 거란다. 30분동안 수다 떨며 가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높은 주차타워에 들어간다. 태국은 오늘부터 4일동안 연휴란다. 태국 국왕의 생일이란다. 5층까지 뱅글뱅글 돌며 올라갔지만 주차할 곳은 도저히 없다. 다시 빠져나왔다.


“오늘 국왕 생일이라서 검정색 티셔츠 입으면 안 되거든. 검정색은 국왕의 반대 정당을 나타내는 색깔이라서 재수없으면 잡혀갈지도 몰라”


메이는 해맑게 웃는다. 주차할 곳을 못 찾아 다른 카페로 가기로 했다. 거기도 인기 많은 곳이란다. 공용 주차장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 카페로 걸어갔다. 아리역은 한국의 성수동 같은 느낌이다. 아기자기한 샵들과 카페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입구에서 카페 건물까지 잘 정리된 잔디 위에 돌다리로 이어져 있다. 구멍이 뽕뽕 뚫린 갈색 건물도 예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여기를 배경으로 사진찍기 바쁘다. 여기가 태국의 인스타 감성 카페인가보다. 



내가 좋아하는 산미 있는 커피를 시켜서 다같이 밖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건물 안은 자리가 없다. 햇빛을 가려주는 파라솔 밑에 앉으니 많이 덥지는 않다. 하나짱과 10년간 밀린 얘기도 하고 태국 친구들에게 한국어도 알려주며 맛있는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하나짱과 나는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태국친구들과는 영어로 얘기하다가 한국어도 가끔씩 알려주니 신기해한다. 


다시 차를 타고 씨암역으로 갔다. 신나게 떠들며 가고 있는데 뒤에서 콩 하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조금 있다 피는 갓길에 차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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