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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 맥리호스트레일 (5)

타이모샨에서 다시 도시로

by nelly park


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이제 고생 끝이다. 어제 8시반쯤 기절해서 아주 푹 잤다. 백패킹을 하면서 술에 취해서 곯아 떨어지는 것 말고는 예민해서 잘 못 자는데 그저께와 어제는 푹 잤다. 아마도 그동안은 체력이 남아 있었나 보다. 체력이 0퍼센트까지 떨어지는 것을 처음 경험해보는 것 같다. 오늘도 똑같이 5시반쯤 일어나 정리하고 6시반쯤 길을 나섰다. 아침 일찍은 날씨가 선선했는데 기온이 금방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오늘은 산 넘는 것 없이 평평한 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물 보충도 많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1.5리터만 챙겨서 가볍다.


초반에 그래프상 오르막길이 좀 있었지만 이제 체력이 많이 좋아진 걸 느낀다. 안 쉬고 쭉쭉 올라가진다. 9일동안 눈뜨면 자동적으로 걸은 결과인가보다. 6키로쯤 걸으니 어제 만난 중국 커플이 보인다.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중국어로 최대한 말해보지만 몇 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오르막길 구간이라 혼자 먼저 치고 나갔고 그 후로는 보지 못했다.


블로그에는 분명 길이 편해서 물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하더니 중간중간에 나오는 엄청난 오르막길이 힘들게 한다. 이제 물도 조금씩 떨어져 가서 아껴 마시는데 날씨는 너무 더워지기 시작한다. 양팔은 며칠전부터 벌겋게 익어 한쪽은 껍질이 벗겨지고 한쪽은 수포가 올라와서 난리다. 살면서 햇볕에 이렇게 심하게 화상입은 적은 처음이다. 이것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 아침에 어제 사 놨던 과자 하나와 초콜릿 두개 중 초콜릿 하나만 남기고 다 먹었다. 슬슬 허기가 진다. 진짜 22키로가 말만 22키로지. 평지만 걷다가 끝날 줄 알았다. 남은 초콜릿 반만 아껴서 먹고 열심히 걸었다. 10키로 이하로 남으니 점점 시간이 안간다. 5키로쯤 남으니 저 옆으로 높은 빌딩들이 아주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말 다 와 간다는 증거다. 마치 비행기에서 착륙한다고 방송하고 얼른 내리고 싶은데 시간이 안가는 것 같다. 그렇게 4키로 3키로 2키로 1키로 마지막 계단을 열심히 오르니 이제 도시로 가는 내리막 계단이 나타난다. 이 계단의 끝이 맥리호스트레일의 끝이라고 생각하니 들뜬다. 마지막 계단이 끝나고 조금 걸어가니 갑자기 큰 도로와 차들이 있는 도시가 나타나며 이 여정의 끝이 났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200번째 마커가 보인다. 얼른 사진을 찍고 ATM 기계를 찾아서 1000달러를 더 인출하고 세븐일레븐으로 가서 옥토퍼스 카드를 충전하고 시원한 맥주를 사서 꿀꺽꿀꺽 마셨다. 끝났다. 12시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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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지만 더 맛있는 것을 먹자하고 버스를 타고 내려서 다시 MRT로 갈아타고 첫날 묵었던 Hi packers로 갔다. 이틀을 예약했다. 메니저 에이미가 웃으며 반겨준다. 양팔이 빨갛게 익어서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보고 괜찮냐고 걱정도 해준다. 방 안내 필요하냐는 말에 다 안다고 괜찮다고 하니 전에 묵었던 똑같던 침대로 해주겠다며 룸카드를 준다.


방이 있는 9층으로 가서 짐을 풀고 얼른 씻고 누웠다. 기분이 묘하다. 피곤하기도 하고 모든 게 귀찮다. 아침부터 과자만 먹었더니 배가 너무 고팠지만 나가기 귀찮아서 최대한 버티다 나가기로 했다. 모든 걸 끝냈으니 축하도 할 겸 거한 걸 먹고 싶었다. 걸을 때 계속 피맥이 생각나서 피자집을 검색했지만 먹고 싶은 곳이 딱히 없다. 한국이 피자를 잘하긴 하나보다. 일단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피자집으로 갔다. 입구까지 갔지만 썩 내키지 않아서 주변 가게도 둘러보다 여기다 하는 곳이 보였다. 들어가서 제일 맛있어 보이고 거해 보이는 것을 시켰다. 큰 닭다리가 통째로 올라가 있는 계란 덮밥과 치킨 커리 라이스와 맥주도 시켰다. 사장님이 이거 혼자 다 먹는 거 맞냐고 확인도 하고 가셨다.


그동안 삼각김밥으로 때우고 현금이 부족해서 조마조마하고 옥토퍼스 카드에 돈 없어서 자판기에서 음료수도 못 뽑아먹던 설움을 토해내며 미친듯이 먹었다. 역시 고기가 제일 맛있다. 시원한 설화 맥주도 기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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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누웠다. 아까 숙소에 막 도착했을 때 만난 이탈리아 친구 토마스가 9시반쯤에 한잔하러 가자고 인스타 교환을 하고 연락한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다. 그래서 그냥 숙소에서 쉬려다가 고생한 거 축하해야지 하고 밖에서 한잔하기로 했다. 혼자 펍으로 가서 맥주 한잔했다. 막상 나오니 또 좋다. 음악도 좋고 홍콩의 밤은 이렇구나 하는 것도 경험했다.


깔끔하게 딱 한잔만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홍콩의 밤거리를 지나 숙소로 와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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