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새끼 고양이를 키우게 됐다. 아, 정확하게는 키우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가깝겠다. 이는 가족 모두의 합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이다.
현재 우리 집에는 강아지 한 마리(허니)와 고양이 한 마리(포니)가 살고 있다. 각각 이름은 허니와 포니. 이 둘의 합사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는 생김새만큼이나 달랐기에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충분한 시간과 주인의 인내, 그리고 운이 필요했다. 시간과 인내는 둘째치고 제일 중요한 건 운이었다. 다행히도 운이 좋은 편이라 그럭저럭 서로를 받아들이며 지낸 지 2년이 지났다. 그런데 다시 한번 운에 기대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삼촌이 키우는 러시안 블루 한 쌍의 여섯 마리 새끼 중 수컷 한 마리를 데려왔다. 초록색과 파란색이 오묘하게 감도는 두 눈, 짙은 회색빛의 털을 가진 수컷이었다. 우리는 이 고양이를 버찌라고 부르기로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지만 그 아이를 보자마자 떠올랐다. 그렇게 버찌는 허니와 포니의 관심을 받으며 우리와 마주했다. 다행스럽게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버찌는 어미 품을 일찍 떠난 터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기만 해도 애처롭게 울어댔다. 내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내 품으로 올라오고 싶다며 울어댔다. 버찌가 그렇게 울 때마다 나는 “알겠어. 알겠어. 이리 와.” 하며 대답했다. 버찌도 알아들었는지 울음을 그치곤 했다. “버찌야. 버찌야.” 하고 이름을 부를 때면 “야옹” 하며 대답하기도 했다. 버찌는 고양이의 언어로, 나는 사람의 언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서로 다른 언어였지만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분명 ‘말’이었고, 버찌에게 닿은 나의 언어도 ‘말’이었다.
고양이 언어는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언어라는데, 이는 어릴 적 어미에게 보내는 시그널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성묘가 되면 더 이상 울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건 둘째치고 지금 당장은 내가 버찌의 어미일지도, 의지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 침실이 아닌 다른 아이들과 격리해둔 방에서 버찌와 함께 잠을 잤다. 혼자는 싫다며 펜스 너머로 하염없이 날 불러댔기 때문이다.
우리 집 선배 고양이 포니는 어릴 적부터 울음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야옹’ 소리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흔한 말짓거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포니를 보고 이상적인 고양이라며 부럽다고 했다.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고양이라나.
그런데 나는 포니를 볼 때면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애처로웠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고양이가 어떻게 이상적일 수 있을까. 그래도 분명 그 아이는 내게 말을 하곤 했다. 그게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었을 뿐 나는 분명 포니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요구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눈으로 말이다. 포니는 눈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황금빛 큰 눈으로 하염없이 말을 건넸다. 같이 있어 달라며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말’이라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닌, 눈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버찌를 통해 말을 들었고, 포니를 통해 말을 보았다. 그게 같은 언어가 아닐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