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년 차에 임신을 했다. ‘언젠가 2세를 갖고 싶긴 하다’ 정도의 아주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언제 임신해서,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이었다. 주변에서 임신이 안돼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기에 늦기 전에 천천히 계획해보자, 하던 시점이었는데 아기 천사가 꽤나 빨리 찾아온 것이다.
임신했을 때 난 MBC 모 프로그램에 햇수로 4년째 일하던 12년 차 예능작가였다.
엄마가 된 선배 예능 작가들 사이에선 “출산 전날까지 대본을 썼다”, “녹화 하다가 애 낳으러 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것도 상황이 다 받쳐줘야 가능한 일. 만약 야외 버라이어티에서 일하던 작가라면 만삭은커녕 임신 초기부터 프로그램을 옮기든 관두든 양자 간 선택이 필요하다. 야외 촬영은 보통 더울 땐 더 덥고, 추울 땐 더 춥게 촬영하며, 방송 작가들은 타이틀만 ‘작가’일 뿐 촬영장에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바삐 움직이는 게 국룰. 심지어 밤샘 촬영 혹은 밤샘 시사(촬영본을 확인하는 작업)도 잦다.
다행히 내가 있던 프로그램은 스튜디오 장르에 밤샘 작업이 없는 시스템이었고, 나는 임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출산 한 달 전까지 무려 9개월을 더 일했다.
물론 스튜디오물이라고 임산부가 일하기 녹록한 것은 아니다. 매주 세트를 새로 지었다 부셨다 하는 예능 특성상 녹화 현장은 언제나 먼지로 가득하고, 바닥엔 카메라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위험천만하며, 대본 쓰는 날은 부른 배를 붙잡고 온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만삭 때까지 일을 놓지 못한 이유는 예능 작가에겐 퇴직금, 출산 휴가, 출산급여가 없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예술인을 상대로한 출산급여라는 시스템이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알지 못했다.) 예능 작가는 방송국에 소속된 직원이 아니라 프리랜서이기에 계약이 종료되어 일을 관두면 그것으로 끝 - 퇴직금은 없다. 프로그램이 폐지된 상황이 아니라면 실업급여 또한 없으며 출산 휴가 같은 건 더더욱 없다. 임신 여부를 떠나, 일을 하지 않으면 웬만해선(?!) 돈을 받을 수 없는 복지 사각지대의 프리랜서인 것이다. 나 포함 전설 속 작가 선배들이 출산 직전까지 지독하게 일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박봉을 받던 막내 작가 시절을 버텨 이제야 겨우 남들 버는 만큼은 버나 싶었는데, 출산하며 프로그램에서 나오자 곧장 수입은 사라졌다. 덕분에 아기를 볼 때마다 머릿속으론 돈 걱정이 따라붙었다. 그간의 씀씀이를 따져보면 남편 수입만으로 우리 세 식구의 생활을 커버하긴 빠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