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날 좋아해야지.” 사랑의 탈을 쓴 파워게임
**스포일러 포함
수연(조여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남긴 건 결혼을 약속한 연인 성진(송승헌)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 하나뿐이다. 첼리스트인 수연이 2주째 돌아오지 않자 그의 어머니이자 오케스트라 단장인 혜연(박지영)은 대체자로 수연의 후배 미주(박지현)를 추천한다. 미주는 단원이 되고, 성진은 점차 그에게 이끌린다. 비 오는 어느 날, 두 사람은 성진과 수연의 보금자리였던 저택에서 함께 술잔을 부딪친 것을 계기로 내연관계로 발전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을 저택 안 밀실에서 바라보던 수연은 격분한다.
<히든페이스>는 행방이 묘연해진 수연을 둘러싼 비밀과 욕망, 복수와 분노를 그린 스릴러 영화다. 2014년 콜롬비아 감독 안드레스 바이즈가 제작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원작에서 밀실은 단순히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이지만, 김대우 감독이 연출한 이번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밀실은 숨겨진 정체성을 뜻하는 ‘벽장’(Closet)을 은유하는 공간이다. 영화는 밀실에서 자유롭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과거의 수연과 미주의 모습을 흑백 화면으로 비추며 이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수연과 미주의 관계성을 퀴어 서사로 비튼 것이 원작과 이 영화의 가장 큰 차별점이다. 3막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수연과 미주의 진짜 관계를 공개하며 2막을 연다. 이후 모든 비밀이 관객의 눈앞에 낱낱이 펼쳐진다. 수연과 미주에게 연인으로서의 관계성을 부여한 것은 감독의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러한 설정 덕에 갈등의 층위가 단순한 대립 그 이상으로 확장된다. 극 초반 공개된 반전으로 스릴러로서의 힘을 잃는가 싶다가도,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전개로 긴장감을 유지한다. 원작은 이성애적 갈등에만 초점을 둔 탓에 두 여성을 경쟁 구도로만 그렸으며, 3막에 다다르면서는 긴장감을 잃고 다소 허무한 결말을 그렸다.
사건의 도화선이 된 건 연인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다. 여기서 수연이 얻고 싶은 건 성진의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안 좋아해도 날 좋아해야 되는 거잖아. 당연해”, “화가 나서 그래. 내가 구원해 준 거거든. 돈도 없고 일도 안 풀려서 허덕이는 걸 내가 살려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어디서 밀당이야. 결혼 전에 완전히 잡고 가야지”라는 수연의 말처럼 성진에 대한 통제력을 재확인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수연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애정도 질투도 아닌 지배욕이다. 수연에게 이건 ‘애정 시험대’가 아닌, 우위에 올라 상대를 찍어 누르기 위한 ‘파워게임’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 간 권력 역학은 두드러지는 요소다. 수연과 성진의 관계는 물론 수연과 미주의 관계에서도 힘의 우위를 확인할 수 있다. 갇힌 수연과 그를 가둔 미주는 단순한 피해자-가해자로 정의될 수 없다. 이들은 관계의 주도권을 두고 갈등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열쇠의 행방이 바뀌면서 권력의 구조 또한 변화한다.
아쉬운 점은 관계 전복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미주는 성진의 성화에 함께 밀실로 들어갔다가 의식을 잃어 홀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러닝타임 대부분 수연이 갇힌 모습을 보여주며 만들어낸 긴장감에 비해, 미주가 주도권을 잃고 추락하는 과정은 시시하고 급작스럽다. 다소 우습기까지 하다. 미주의 상처나 배신감이 크게 묘사된 데 반해 복수의 정도는 미약하다. 미주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수연에게 굴복한다. 수연에게 쉽게 복종하는 미주의 모습은 설득력을 잃는다. 힘을 잃은 서사는 빠르게 마무리된다. 수연은 이전에도 그랬듯 자연스럽게 권력의 주체가 된다. 수연은 미주의 발에 족쇄를 채우며 자신이 지배자임을 거듭 확인한다.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성진은 수동적 인물로서 머무른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원작에선 미주의 캐릭터 파비아나를 완전히 수동적인 존재, 남자 주인공인 아드리안을 능동적인 존재로 그린다. 파비아나는 사건을 따라 움직이며 갈등의 매개체로서만 기능한다. 이는 창작물의 전통적인 서사에서 남‧여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역할을 성진이 수행한다. 그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반전시킨 캐릭터로 묘사되며, 주체가 아닌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1막에서는 성진이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로 보이며, 그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그의 존재감은 빠르게 약화한다.
성진은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 속 ‘신데렐라형 여주인공’의 성별을 반전시킨 듯한 인물로 보인다. 분식집 아들로 태어나 부잣집 딸인 수연의 눈에 들어 인생역전한 점, 외형적으로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점, 수연과 미주의 갈등에 휘둘리며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점 등이 그렇다. 영화는 그 외의 성진과 관련된 정보를 철저히 배제한다. 관객은 그가 어떻게 수연과 만나게 됐는지, 그 내면의 감정과 생각은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그는 수연과 미주가 만들어낸 사건 속에서 복수를 위해 이용당하는 도구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는 자신 앞에 떨어진 단서들을 따라가는 데 급급한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이 영화는 원작을 단순히 반복하는 리메이크에서 그치지 않고, 퀴어 서사와 관계 속 힘의 역학을 넣어 이야기를 확장했다. 이러한 변주는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도 다가온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들의 특성이 사라지고, 밀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심리전을 끝까지 균형 있게 유지하지 못하는 등 아쉬운 점은 남아있다. 특히 동성 연인을 밀실에 가둔 수연과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기쁜 듯 미소 짓는 미주의 모습은 허탈함까지 느껴지게 한다. 미주가 수연에게 완벽히 굴복하기 전까지 조금 더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더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을 터다. 그랬다면 긴장감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이러한 요소들을 더 촘촘히 쌓아 올렸다면, 영화가 택한 독창적인 요소들도 더욱 빛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관객들은 스릴러와 퀴어 서사, 젠더역할 전복 등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영화는 지난해 11월 개봉했으며, 입소문을 타 약 한 달 만인 12월 말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개봉한 청불 등급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Queer Films & Stories Beyond the Fr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