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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진 Jun 01. 2020

징그러운 이야기

〈친절한 마음 #1〉


내가 징그러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진은 그거 알지. 컴퓨터로 공포 영화 볼 때 화면 조그맣게 해 놓고 옆에 같이 띄워놓는 정화짤. 그거야. 왜냐하면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거의 그 수준이거든.


3세대, 2세대 항암제가 모두 실패해서 얼마 전에 1세대 항암제인 전신 화학 항암제를 쓰기로 했어. 전신 화학 항암제는 미디어에서 많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암환자의 징후를 나타나게 하는 그런 약이야. 암이 계속 번지고 세포 증식도 빠르니까 몸에서 새로 생기는 세포는 모두 죽이는 그런 방법. 머리 빠지고, 건어물처럼 살 쪽 빠지고. 뭐 어쩌겠어. 쓸 수 있는 게 이것뿐인데. 모근이 센 건지 머리숱이 원래 많은 건지 머리카락은 봐줄 만하게 남아있네.


1차 항암을 하는데, 아니 무슨 주사를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맞는 거야. 그렇게 나흘 동안 맞아야 한대. 뭐 링거 밀리고 해서 한 50시간 맞은 거 같애. 허벅지는 가늘어지고 허리는 아작났는데, 그나마 창경궁 버드나무 가지가 연둣빛이길래 그거 보고 참았네. 항암제가 진짜 짜증 나는 게 뭐냐면 미뢰 세포를 바꾼다는 거야. 예를 들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 무슨 미원 한 바가지 탄 물을 마시는 것 같달까. 병원밥이 대체로 맛이 없긴 한데 혀까지 고장 나니까 참 그래.


암튼 서론이 길었어. 괴로운 1차 항암 중에 집 보일러가 터져가지고 퇴원하자마자 본가로 피신했잖아. 아, 내 인생 진짜 버라이어티. 간만에 집 내려가니까 친척들이 다들 날 보러 오겠다고 그러는 거야. 그 맘이야 감사하지. 근데 나는 면역력이 최저인 데다가 그놈의 코로나가 쫌 무서운 거야. 며칠 전에 부모님이랑 다녀온 식당에 확진자가 다녀갔다고 뉴스에 나와 가지고 더 무섭.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친척들이 집에 온 거지.


〈친절한 마음 #2〉


그냥저냥 시간 보내고 다들 돌아가려는데, 목사인 친척 한 명이 내 방에 들어오더니 문을 닫는 거야. 뭐여, 용돈 타임인가 싶어 가지고 가만히 있는데 대뜸 나보고 “차별 금지법 어떻게 생각해?” 이러는 거야. 벙쪄가지고 있다가 “차별금지법은 성별, 인종, 정체성, 병력 같은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어쩌구…” 거의 위키트리 로봇마냥 대답하는데 말을 끊고는 그러는 거야. “차별금지법 통과되면 성경 무너진다.”


아… 이 사람이 내가 게인 거 알았구나 싶어서 입을 닫았어. 뭐 차별금지법 반대하라지. 종교는 항상 이성을 뛰어넘으니까. 이제 할 말 다 했으니 가려나 싶어서 대충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말을 계속하더라? “간이랑 폐가 안 좋은 이유는 성경에 다 나와 있어.” 응?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도 성경 통독 쫌 해본 사람인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의학적 소견을 본 적이 없거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성경이 종양학에 포함되기라도 했나? 이 X 같은 이야기에 약간 호기심도 생겨가지고 가만히 있었어. “간이랑 폐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음란함 때문이야.” 내 반응: ?????????????????? 음란… 음란…? 음란…! 음란마귀 좀 불러다가 앉혀놓고 내 음란지수가 얼만지 묻고 싶은 기분.


몇 마디 더 하시고 그분은 퇴장. 얼떨떨한 기분에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내가 겪은 게 뭔가 싶어서 철희랑 친구들한테 영상통화를 걸었어. 논두렁에 주저앉아가지고 잡초를 뜯으면서 지금 내가 겪은 게 “말도 안 되는 거지?” 계속 되물었잖아. 통화를 끊고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니까. 철희도 곁에 없고, 부모님한테는 이야기도 못 하겠고. 한 이틀 속 끓이며 울다가 그 친척이 엄마한테 돈을 줬다길래 깽값이라 생각해야겠다 하고 말았지 뭐. 음란한 암환자가 우울하기까지 해야 하나 싶어 가지고.


〈친절한 마음 #3〉


내가 왜 이런 징그러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냐면, 사람들은 자기의 혐오감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야. 사람은 잘못이란 걸 해. 사람들은 자유의지가 있고 욕망 덩어리지. 그 자유의 무게는 책임과 동일한 무게를 가져. 나도 기저질환이 있음에도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하지 않았고, 수면과 휴식 그리고 식단관리는 내팽개치고 일만 했으며, 스트레스 관리도 하지 않았거든. 그 친척이 나에게 평소에 왜 건강관리를 하지 않았느냐고, 너의 몸은 주님의 것이니 아끼고 사랑하라고 말했다면 수긍하며 나의 행동을 다시 돌아봤을 거야. 어쩌면 그분을 안아 드렸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혐오는 늘 존재를 부정해.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 알아? 이건 어때? 독일 지하철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코로나바이러스로 불리며 성희롱당한 부부 뉴스 봤지? 나는 엄청 빡치더라고. 외국에 있는 내 친구들은 요즘에 자꾸 동양인이라고 혐오 범죄를 당해. 해외여행을 다녀봤다면 그 기분 뭔지 조금은 알 거야. 부부의 존재가 바이러스로 치환되는 그 기분. 내 암이 음란으로 치환되는 그 기분. 동성애자가 HIV/AIDS와 코로나바이러스로 치환되는 그 기분 말이야.


용인 66번 환자. 참 잘못했어. 코로나바이러스로 병원은 보호자 1인 외에는 면회가 안 돼. 요양병원은 아예 보호자 면회도 안 되고. 나같이 자주 입원하는 환자는 보험도 안 되는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8만 원이나 주고 매번 받아야 한다니까? 이런 불편함을 모두가 짊어진 상황에서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젊은 무증상 환자야. 용인 66번 환자의 놀고 싶은 그 마음, 이해해.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앞으로 어떻게든 만회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암환자로서 그 사람 무척이나 짜증 나. 그런데 나는 그가 동성애자라고 욕먹는 현실에 화가 나. 요즘의 상황이 자꾸만 그 친척을 생각나게 하거든. 내가 아픈 이유를 내 정체성의 일부에서 찾는 그 몹쓸 짓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리플레이가 된다니까. 아마도 나는 죽기 전까지는 그 일을 잊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용인 66번 환자가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 어쩌면 실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가 이번 사건과 정체성을 엮어 평생 괴로워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 그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힘들어한다면 나는 그를 위해 뭐든지 할 거야.


타인은 지옥이래. 그럼 우리는 지옥에서 사는 거야? 역설적이게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타인이기에 친절할 수 있어. 비판과 친절은 공존이 가능해. 하지만 혐오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이 공간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해. 바이러스라는 풍랑은 거세지만 돌들은 서로가 서로를 맞대며 살기에 둥글게 다듬어질 거야. 돌들이 파도에 휩쓸려 깎여나가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세상 귀여워.


그러니 우리, 흔들려도 꺾이지는 말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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