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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훈 Apr 07. 2019

<로망>이라기보단 노망... 치매는 누가 책임지나

가부장제가 필요 없는 이유와 치매국가책임제가 필요한 이유

미국 유타주립대 노인의학연구팀에 따르면, 아내가 치매에 걸리면 남편이 치매에 걸릴 위험이 11.9배나 높아진다고 한다.(반대의 경우 아내의 치매 위험은 3.7배 커진다고 한다.) <로망>은 이런 동반 치매 부부를 소재로 다룬 영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편 영화나 공익광고로 나오는 게 나았을 영화다. 일단 대놓고 감동을 받으라고 만든 영화인데, 웬만한 눈물 코드에 너무나도 쉽게 반응하는 필자가 단 한 번의 찡함조차 못 느꼈다. 게다가 유머 코드도 상당히 유치하고 재미없었다. 이 정도로 유치하려면 반드시 재미있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가부장적 태도에 폭력적인 남편 조남봉(이순재 분)과 그런 남편에게 평생 위축되어 살아온 아내 이매자(정영숙 분)의 모습은 지나치게 전형적이다. 아들 조진수(조한철 분)는 세상 물정 모르고 침대에 누워서 폰 게임만 하는 백수다. 대학 교수의 자리가 나기를 바라고만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교수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그나마 멀쩡한 건 집안일뿐만 아니라 학원 강사로 바깥일까지 책임지는 그의 아내 김정희(배해선 분)인데, 그녀 덕분인지 어린 딸 조은지(이예원 분)는 똑똑한 데다 상당한 배려심까지 갖추었다. 치매 걸린 할머니가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라 우기며 끊임없이 괴롭히는데, 기꺼이 응하며 놀아주는 손녀가 몇이나 되겠는가.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조은지 기준)
내가 평생 누구한테 미안하다 말하는 거 봤어?

조남봉은 이름에도 드러나듯 친구들에게 천하의 '난봉꾼'이라 불린다. 오랜 친구들과 막걸리를 걸치는 과거 회상씬에도 나오듯, 말 그대로 '허랑방탕한 짓을 일삼는 사람'이다. '매자'는 우리말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나 사리에 어두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영화 속 이매자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노년 여성으로 나온다. 칠십 넘은 노인이 평생을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 없이 살아도 잘 살고, 그 옆에는 매번 미안해하며 밥을 차려주는 여성이 있다. 이쯤 되면 이들에게는 치매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겠다.

마냥 기다리고 마냥 미안해하는 이매자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주나.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낫지. 심심치도 않고.

치매 환자 한 명을 감당하기에도 보통 여럿의 힘이 필요한데, 하나보다 둘이 낫다며 오히려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노망'이 든 게 분명해 보였다. 동반 치매에 걸린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다른 가족의 입장은 어떻겠는가. 영화에서 심지어 동반 치매 부부 둘을 남겨두고 나머지 가족이 떠나는데, 이는 비현실적 묘사나 무책임한 현실의 말로라 하겠다. 뜨거운 우유를 쏟고, 차량을 파손하고, 끊임없이 집안을 어지르는 환자 둘이 새삼 '로망'을 이야기하며 여생을 살아낸다? 나는 정말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연기는 잘한다... 그래서 아깝다.

어쩌면 치매 환자로 살아가는 데에 조남봉의 모습에서 오답을, 이매자의 모습에서 정답을 엿보라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치매 환자를 두고 가족들이 저러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어느 쪽도 아니다. 제목부터 로망이지 않은가. 차라리 치매 환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곧 닥칠 치매 환자 100만 시대에 대해 경각심을 주거나, 치매 환자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범답안을 제시해서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영감을 줬어야 했다. 어설프게 노망과 한 끗 차이인 로망이라는 그럴듯한 단어를 내세워 배우들의 연기만 낭비했다.


영화의 무책임성 내지는 비현실성을 상징하는 장면은 말미에 병실에서 나타난다. '절대 안정', '낙상 주의'와 같은 경고문구가 뻔히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매자의 침상의 난간은 양쪽 모두가 내려가 있다. 조남봉과 한 병상에 나란히 누운 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난간이 올라간 상태에서 조남봉이 한쪽 난간만 '내리며' 찍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장면이다. 대체 어느 병원에서 침상의 난간을 양쪽 모두 내린 채로 늙은 환자와 늙은 보호자를 방치한단 말인가. 동반 치매를 다루는 영화라면 훨씬 더 세심했어야만 했다.


결국 영화에서도 알 수 있는 건 치매는 남편이 감당하기에도 아내가 감당하기에도 혹은 자식들이 감당하기에도 보통은 버겁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치매 파트너로 활동 중인 관객들과 김정숙 여사 등이 함께 자리하는 시사회가 열렸다고 한다. 김정숙 여사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노령화 사회에서 모든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치매국가책임제'로 명명된 정책이 시행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너무 늦기 전에 가족에게 미안해할 줄 알고, 너무 늦기 전에 공동체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로망>에선 그것이라도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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