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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훈 Apr 11. 2019

크게 용기 내어 한 걸음 다가가도 <파이브 피트>

그 흔한 스킨십 없이도 아름답게 그려낸 병원 로맨스

꽤나 중한 병을 앓고 있는 남녀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라는 점에서 <파이브 피트>는 <안녕, 헤이즐>을 떠오르게 한다. <안녕, 헤이즐>과 이 영화가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전자는 남녀가 다른 병을 앓아 서로 보완해주는 느낌이 있었다면, <파이브 피트>는 같은 병을 앓는 탓에 전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전자와 달리 <파이브 피트>는 대부분의 러닝타임이 오직 병원 안에서만 진행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때문에 자칫 답답하고 지루하기 쉬운 설정인데, 배우들의 매력 덕인지 반짝이기만 한다.


친구들과 옷을 고르며 수다를 떠는 스텔라(헤일리 루 리차드슨 분)가 나오는 도입부는 스텔라의 친구들이 모두 방을 나가고 나서야 그곳이 병실이며, 스텔라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텔라는 본인이 앓는 병을 소재로 병원에서 유튜브 방송을 하는데, 유튜브는 스텔라는 치료에 적극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병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스텔라 나름의 소통 수단이다.

카메라를 들고 유튜브 방송을 하거나 휴대폰으로 하는 영상 통화는 스텔라에게 소중한 소통 수단이다. 

한편, 윌(콜 스프로즈 분)이 등장하는 도입부에서는 윌이 친구 커플을 위해 병실을 비워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윌이 얼마나 치료에 무관심한지를 보여주면서도 의도치 않게 윌이 스텔라에게 준 첫인상으로 작용한다. 직후 이어진 신생아실 앞에서의 스텔라와 윌의 첫 대화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만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데, 다름 아닌 '안전거리 6피트'다. 2.39:1의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사용한 <파이브 피트>는 낭포성 섬유증 환자 사이에 유지해야 하는 안전거리를 가로로 긴 화면비 안에 보기 좋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스텔라와 윌 사이에 헬스 기구, 커다란 어항, 낮은 탁자, 유리벽 등을 배치하며 안전거리를 지키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스텔라와 윌이 단독으로 찍히는 장면에서도 각각 한쪽으로 쏠리게 배치되는데, 필자가 2회 차 관람에서야 눈치를 챘는데, 영화는 함께 나오든 따로 나오든 고집스럽게 스텔라는 화면의 오른쪽, 윌은 왼쪽에 위치시킨다. 이는 관객들에게 심미적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위기적 사건을 암시하는 데에 사용된다. 스텔라와 윌의 위치가 좌우 반전되는 유이한 장면이 어떤 때에 사용되는지 알아채는 것도 재밌는 감상 포인트다. 어쩌면 윌이 왼쪽(Left)에 위치한 것은 결말에 대한 암시는 아니었을까.

호면의 왼쪽에 선 윌과 오른쪽에 선 스텔라의 배치 고집스럽게 반복된다.
만화 봤고, 용서했으니까, 물러서 줄래?

스텔라의 유튜브 방송도 극을 전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편으로 윌의 의사소통수단인 그림, 즉 손으로 그려낸 만화도 관계의 시작부터 발전, 화해 그리고 극의 전개가 일단락되기까지 빠지지 않는다.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여느 로맨스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대화가 나오는데 미소가 절로 따른다. 보통의 로맨스라면 '이제 용서했으니까 와서 안아달라'는 뉘앙스의 말이 자연스럽지만 낭포성 섬유증을 앓는 이들에게는 물러서라는 말이 내가 다가가겠다는 말과 동의어다.

잘 생기고 만화도 잘 그리는 윌
병이 내게서 모든 걸 빼았았으니, 나도 하나쯤은 되찾아 올래.
한 걸음. 그저 한 걸음 더 가까이.

간호사 바브 선생님(킴벌리 허버트 그레고리 분)이 당부한 그들의 안전거리는 분명 6피트였다. 이 영화의 제목이 <파이브 피트>인 이유는 영화의 중반이 지나고 스텔라가 각성하는데, 윌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윌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치료를 받는 게 아닌, 치료를 위해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던지는 커다란 용기다. 낭포성 섬유증은 더 이상 스텔라 삶에 도둑이 될 수 없음을, 한 걸음을 뺏어 오는 것을 시작으로 스텔라 자신이 인생의 도둑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다. 한 발짝이 줄 수 있는 최고의 해방감을 선사하다.


한 걸음을 빼앗아 온 스텔라는 대략 5피트의 길이에 해당한다는 당구 큐대를 들고 윌에게 사랑의 화살을 쏘고, 큐대의 끝을 맞잡고 병원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병원 내 수영장에서도 큐대를 사이에 둔 채 나란히 앉는데, 스텔라와 윌이 처음으로 서로의 상처를 나누고 마주 선다. 만질 수 없으니 큐대로라도 에로틱한 감각을 느끼고픈 스텔라의 모습은 절절하다. 꾸밈없이 상처를 드러내고 마주설 때에 카메라가 수영장 물에 비친 빛처럼 흔들리는데, 스텔라와 윌이 공간적으로 한 걸음 가까워진 데 이어 심리적으로도 가까워지는 과정을 일렁이듯 묘사한다.

물은 스텔라와 윌의 상처를 잠시나마 씻어주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파이브 피트>에서 굳이 흠을 찾자면, 스텔라와 윌이 만나는 장면과 영화가 엔딩으로 가는 후반부가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매력으로 용서되는 수준이다. 러블리한 스텔라와 시크한 윌의 컨셉도 전형적일지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바브 선생님과 스텔라의 절친 포(모이세스 아리아스 분)의 연기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남녀 로맨스물에 쿨한 게이 캐릭터는 이제 흔해졌다지만, 포라는 인물이 비치는 메시지는 무게감 있다.


결국 영화는 사랑스러운 스텔라가 윌로 인해 의지(will)를 갖게 되고, 반짝이는 별(stella)과 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로맨스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필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이 영화는 그 흔한 스킨십 없이도 괜찮은 로맨스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필자가 '러브 액츄얼리 이후 최고의 스케치북 고백'이라 말한 평이 상징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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