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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흙흙 Jul 21. 2024

어떤 악마와의 계약

 간절히 휴식을 바라던 날이 있다. 회사에서 주관하는 요란한 행사의 담당이 필요했고, 당시 사원이었던 나는 딱히 거절할 명분이나 요령이 없었다. 행사는 쓸데없이 규모가 커서, 그에 대한 문의를 해결하느라 하루 온종일이 지나곤 했다.  종일 전국 지부의 사무실로부터 온갖 전화가 날아왔고, 왜인지 그들 대부분은 화가 나 있다. 정상적인 일과 시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행사와 관련된 페이퍼 작업, 그리고 본연의 업무인 교육 준비를 진행했다. 업무가 과중한 것은 별 수 없는 것이지만, 새벽까지 일하는 나를 두고, 같은 부서의 누군가들이 정시 퇴근을 하는 것을 보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감정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시의 나는 회사 인근의 요가센터에 몇 개월짜리 회원권을 등록해 두었다. 

"일 때문에 운동을 자주 오지 못해요." 라며 변명처럼 말을 하는 나를, 강사는 미덥지 않은 눈과 어색한 미소로 쳐다보곤 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속으로 바라길, 언젠가 회사에서 나가 성공적인 삶을 살며 아침 10시에는 요가, 저녁에는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실제로 그 소원은 일부 이뤄졌다. 대책 없이 회사를 뛰쳐나왔고, 아침에는 요가를 하고 저녁에는 게임을 했다. 한가로운 아침과 더 한가로운 저녁을 즐기며, 문득 이전의 소원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이뤄지긴 하는구나.


 지난주, 긴 일정의 출장 동안 쌓여있는 옷가지를 바라보며, 이번 주엔 코인 세탁소에 들러서 미리 옷을 빨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빠른 세탁도 장점이지만, 그저 세탁소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제법 괜찮은 시간이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멍하니 바라다보면, 옷뿐만 아닌 무언가가 함께 세탁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목요일 저녁에는 코인 세탁소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거리도 나쁘지 않다. 차를 타고 5분 거리.


 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다. 함께 왔던 협력업체의 직원들이 저녁을 권했고, 우리는 술을 마시게 되었다. 대리기사와 함께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린 코인 세탁소의 회전을 생각한다. 나는 쉽게 체념했다. 그래, 빨래는 집에 가서 하자. 출장지에서의 아주 작은 소원이었을 뿐이니까.


 돌아온 집에서, 나는 왜인지 전원이 나가버린 4년 차 세탁기의 모습을 보았다. 전원 버튼을 몇 차례나 눌러도, 배를 세게 걷어차도 작동하지 않는다. 풀어헤쳤던 빨래 무덤을 다시 출장가방에 담으며, 코인 세탁소로 향한다. 

 "짤그락, 위잉, 덜컹."

 코인 세탁소의 사운드를 들으며, 희미하게 풍겨 나오는 세제의 향을 맡는다. 무채색의 옷가지들이 하얀 세탁기 안에서 열심히 회전한다.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내 작은 소원이 또 이뤄졌음을 알아차린다.


 크고 작은 소원들은 어떻게든 이뤄지고 있다. 나는 내 소원을 이뤄주려 노력하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어쩌면 어떤 작은 악마가 내 주변을 돌며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조금은 서툴러,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현실을 구현해주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은 불행처럼 느껴지는 작은 일들이 발생한다. 월급이 한동안 없어지기도 하거나, 세탁기의 수리비용이 들기도 하거나 하는 등, 그런 작은 것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많은 불운들은, 모두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가엾고 작은 악마가 나의 어리숙하고 불친절하게 묘사된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악의는 없다. 조금 서툴 뿐. 소원은 어떻게든 이뤄진다. 더 이상은 누군가의 불행을 바라진 말아야지. 그가 다쳤으면 좋겠어, 그녀가 망했으면 좋겠어. 따위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기를. 그저 소소한 행복을 바랄 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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