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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칠이 일상꽁트 Aug 11. 2016

아버지의 그림자_1.여름의 추억

문득문득 생각 한 자락

여름이었다. 매미는 시끄럽게 울어대고 햇살은 따갑도록 뜨거웠다.

난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해 첫 번째 여름방학을 보내는 중이었고, 동생은 유치원생 통제불능 말썽꾸러기였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이런저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우리 집. 뜨거운 여름은 죽도록 고생스럽지만 작물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고마운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도 아빠는 어김없이 들에 나가셨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어놓으면 반팔 속에 감춰졌던 하얀 살과 그 밑으로 검게 탄 살이 극명한 대비를 이뤄 꼭 반팔을 계속 입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루는 고추밭, 하루는 담배밭, 하루는 논에 나가야 하는 바쁜 일정이셨으니 그렇게 되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한낮 쥐어짜듯 태양은 내리쬐는데 아빠는 돌아올 기미가 없다. 걱정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부르신다.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 세 개를 꺼내 주시며 하나는 논에서 일하는 아빠께 가져다 드리고 두 개는 가면서 먹으라고 하신다. 말썽쟁이 동생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으신다.

"동생 손 꼭 잡고 가."

이 정도 심부름쯤은 거뜬하다. 요즘같이 무서운 시절과는 달라서 어린아이 둘이 돌아다녀도 세상없이 안전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소리 한 번만 치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온 동네 어른들이 한달음에 달려올 그런 동네였다.


동생  손을 꼭 잡고 길을 나선다. 우리 몫의 아이스크림도 먹지 않고 아빠와 같이 먹을 생각에 두근두근 심장을 울리며 종종걸음을 옮긴다.

 

집 마당을 가로질러 돼지 몇 마리를 키우던 작은 축사를 지나고, 바로 아랫집이었던 큰아버지댁을 지나 논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멀리 커다란 미루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논이 보인다. 집중해서 가만 보면 초록색 빼곡한 벼 사이로 하얀 구름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닌다. 그것을 확인하면 동생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있는 힘껏 목청을 높인다.

"아빠! 아빠! 아빠!"


동그란 구름이 몸을 일으킨다. 구름은 벼 사이사이에 난 피를 뽑으려 등을 굽혀 숙인 아빠의 고단한 등판이다. 지금이야 그것이 고단한 것을 알지만 당시엔 한없이 크고 넓고 멋진 등이었다. 경주를 하듯 한달음에 달려 아빠에게 간다.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예뻐 죽겠단 표정으로 논두렁 근처로 나오신다.

"목말랐는데 콩새랑 장군이가 딱 맞춰왔네."

예쁜 우리 이름이 있었지만 아빤 늘 우리를 별명으로 부르셨다. 툭하면 울음이 터져 맨날 눈물자국 달고 사는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운다는 콩새, 말썽꾸러기 동생은 언젠간 철들고 나면 크게 될 거라며 장군이라고 부르셨다. 나무 그늘에 우리를 앉혀 놓고 소중히 챙겨 온 아이스크림을 까서 건네주신다. 아빠 몫은 앉아서 드시지도 못하고 입에 물고 다시 고개를 숙여 구름 같은 등판만 보이며 일을 하신다.

그저 아빠 곁에 있기만 해도 좋았던 우리는 집에 가지 않고 논두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먹으며 흙장난 풀장난이다. 우리가 행여 지루해할까 휘파람을 불어주신다. 휙휙 바람소리 섞인 그 휘파람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여름의 낮은 길어서 놀아도 놀아도 계속 낮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일을 마친 아빠 손을 잡고 서로 등에 업히겠다고 동생과 투닥거린다. 결국 울음보가 터진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며 등에 엎고 어린 동생을 앞세워 집으로 돌아온다.  


내게 여름의 소리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와 그 속에 울리던 아빠의 휘파람 소리로 기억된다. 어딘가 쓸쓸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소리. 여름의 냄새는 아빠 등에 업혀 맡던 땀냄새다. 고단하지만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고 책임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던 믿음직한 냄새. 소리와 향기가 섞인 우리의 여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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