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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Hailey Oct 13. 2021

보통의 특별한 만남.

2021.08.02 우리의 첫 만남.

약속 장소로 가던 길.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약속 장소 건너편 AXIL 커피에서.


어쩌다 인스타로 연락을 주고받게 된 우리가 드디어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할 기회를 만들었다. 나는 전날 과제를 마치느라 겨우 2-3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해 머리도 아프고 귀도 먹먹해 솔직한 마음으로는 약속을 취소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보며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인스타로 연락을 하던 남자와 실제로 만나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익숙하지도 않았고 조금 불안하기도 했고.


그러나 어쩌다 보니 나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고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근처 카페로 향했다.


진한 롱 블랙을 두 잔이나 입으로 쏟아 넣으며 어서 이 멍한 정신을 깨야할 텐데 라는 생각으로 습관처럼 그동안 나눈 대화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아주 편안한 사이가 아닌 이상 나는 늘 상대방과 만나기 전 카톡이나 이전에 나눈 대화를 한 번씩 빠르게 리뷰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야 그 사람에 대해 파악을 하고 대화를 스무스하게 이어나가기 때문에.


대화의 내용을 다시금 살펴보니 이 사람은 연애에 목에 말라 있었고 꽤 높은 여자 기준을 가진 듯했다. 그래서 난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며 누구를 소개해주어야 비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한창 고민을 한 것 같다.


함께한 첫끼, 타이누들.


먼저 도착해 밀려오는 피로를 간신히 쫓아내며 십분 남짓 앉아 있었을까. 훤칠한 한 남자가 웃으며 들어온다. 나는 아직도 첫마디를 기억하지. “아니, 줄 서있는 맛집이라며 왜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먹으려고 했던 본래의 인기 메뉴들은 아니지만 런치 스페셜로 판매하는 타이 누들을  그릇시켰고 솔직히 너무 졸려서 입맛이 없었던 나는 어떤 맛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때 내가 절반 이상 남긴 것이 오빠에게는 약간의 충격이었던  같다.


아무튼 정신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재밌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허기를 채우고 난 후 약속했던 대로 근처 유명 베이커리로 가서 아몬드 크루아상을 먹었다.


LUNE


밥값을 오빠가 냈길래 룬 크루아상과 커피를 내가 샀고 앉아서 먹을 데가 없어 근처 ACMI 미술관 홀에 앉아 몇 시간 수다를 떨었다.


ACMI 입구 홀


통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내 민낯 피부가 다 드러나는 것 같아 신경 쓰였지만 그것 보다도 너무 재밌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순간. 나중에 집에 와보니 내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었고 예의상 그린 아이라이너는 눈 아래로 다 번져 어쩜 세상 부끄러운 몰골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 원래 내 계획은 이게 아닌데, 만나보고 괜찮은 사람이다 싶음 오빠의 직업군과 같은 공부를 하는 중인 동생을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살짝 사그라든다. 이렇게 재밌게 오랜 시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 더 만나 시간을 보내볼까 싶었던 게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헤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연락이 오는 것도 괜히 좋았고. 그런데 보통 이렇게 만나면 전화번호는 예의상 물어보지 않나? 이 남자는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않고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도 잡지 않는다. 참 신기한 사람일세. 어쨌든 특별한 듯 보통의 첫 만남은 웃다 지쳐버린 나의 광대와 집으로 돌아와 세 시간 꿀잠을 남기며 지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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