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에서 2011년 느낀 것들
1. 최근 들어 같은 문장이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무게와 의미는 정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2. 예컨대, 흔히들 얘기하는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다’라는 문장.
3. 교과서에서, 혹은 책에서 읽고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다라고 말할 때의 그 문장. 당연히 주위 친구들과 내 목숨은 평등해 보였고, 조금 못 사는 사람들일 지라도 내 목숨이 그네들의 목숨보다 더 가치있다라는 생각은 별로 해 본적이 없다. 당연하다라고 생각했고, 누가 물어봐도 당연히 목숨은 평등한거 아냐? 라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4. 에티오피아에 왔다. 이 곳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곳이다. 한 쪽에서는 초고속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고 미국에서 수입된 아이폰 및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있으며 벤츠를 타고 거리를 활주한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아직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며, 교육이란건 받아 본 적도 없고, 태어나서 자동차라는 걸 한 번 본 적도 없다. 흙으로 집을 짓고 살며, 개중에는 옷을 안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5. 수도에서는 이러한 극적효과가 정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세계 어딜 가든 있는, 그래서 여행자들이 입국신고서에 민박집을 적을 수 없어서 항상 적는 곳인 힐튼호텔, 쉐라튼 호텔은 이 곳 에티오피아 수도에도 있다. 에티오피아의 자부심인 AU(Africa Union) 본부, UN아프리카 지역 본부도 힐튼 호텔, 쉐라튼 호텔의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호화롭다, 호텔과 AU,UN본부만 보면 이 곳이 미국이라고 해도 믿겠다.
6. 그리고 호텔에서 불과 100m쯤 떨어진 곳에는, 흙으로 혹은 판자로 된 집이 일렬로 쭈우욱 위치해 있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이 두 곳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정말 아이러니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20층 고층에 아주 깔끔한 현대적인 빌딩, 그 것도 앞에 커다란 풀장까지 있는 쉐라튼 호텔 뒤로 판자집들이 쭈루룩 세워져 있는 배경. 호문클루스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는가? 그 만화 배경이 으리으리한 호텔과 노숙자들이 사는 공원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그 만화책이 바로 머리에 떠올랐다.
7. 기본적인 인권이 모두 보장되는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랑 (많은 비난을 받을꺼 같은 무책임한 문장이지만, 적어도 에티오피아에서는 기본중의 기본이라 생각되는 인권이 하나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어서..) 에티오피아의 그 적나라한 빈부격차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8. 한국의 빈부격차에서 세상의 부조리, 질투심 같은 것을 느낀다면, 에티오피아의 빈부격차는 절망이다. 혼돈이다. 질투의 문제가 아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조금 사는 집이라면 으레 4~5명의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한달에 3만원 많게는 7만원 정도까지만 쥐어주면 24시간 집에서 상주하면서 집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차를 운전해주고, 청소를 해주고, 요리를 해준다.
9. UN에서 조사한 HDI(Human Development Index, 간단히 문맹률, 수명, 생존률등 기본적인 인권으로 점수를 매긴 표라고 보면 된다.)에서 182개국 중 171등을 한 나라가 에티오피아이다. 호텔 뒤 쪽에서는 진짜 길거리에 그냥 누워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TV나 사진으로 아마 봤을지 모르겠다, 어린아이 눈에 잔뜩 붙어있는 파리들. 뼈만 앙상한 사람들. 허연 눈동자,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생기 없는 사람들..
10. 자, 이제 누군가 나한테 ‘사람의 목숨이 평등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절대 쉽게 대답 못하겠다. 길거리 누워 굶어 죽고 있는 에티오피아 사람이랑 호텔 풀장에서 햇빛 쬐면서 독서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사람을 보면서 감히 목숨이 평등하다고 말 못하겠다. 한 달 3만원 벌면서 시중드는 사람이랑 한 달 몇 백씩 벌면서 하인 대 여섯 명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랑 목숨이 평등하다고 말 못하겠다. 평등하다고 말하면, 굶어죽고 있는 그네들이나 시중드는 그네들이 나한테 와서 웃기지 말라고 편하게만 인생 살아온 니딴놈이 뭘 알고 지껄이냐고 쌍욕을 해댈꺼 같은 기분이 든다.
11. 평등하지 않은거 뻔히 알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아마 사람의 목숨이 평등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때가 온다면,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거나 세상에 대변혁이 일어났을 때 정도겠지. 이 때 ’사람의 목숨이 평등하다‘는 문장은 엄청난 무게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일 것이다.
12. 교과서의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다와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는 곳에 가서 실제 굶주리고 탄압받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다라고 말할 때의 그 문장의 무게는 실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13. 많이 배울수록, 많이 경험할수록 말이 적어지는 대신 말의 무게가 무거워진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감한다.
14.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늘리자는 주장에는 아직 우리나라에도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네들이나 도울 것이지 왜 굳이 저 먼 외국 땅에 원조를 해야하느냐라는 반응이 많다. 이 문장에는 ‘사람의 목숨은 평등하지 않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기왕이면 자국 국민부터 살려야지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타국 국민 목숨은 그 후의 일 아니냐라는 생각은 ‘자국 국민의 목숨은 타국 국민의 목숨보다 우선시 된다 혹은 그 가치가 더 크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혹은 사람 목숨이 최우선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거겠다.
15. 개발도상국에 원조를 늘리자는 주장에 아직 우리나라에도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저 먼 외국 땅에 원조를 해야하느냐는건 우리나라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쉽게 답하기도 힘든 문제다. 근데, 우리나라에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시점이 대체 언제오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 위의 문장은 사실 원조를 하지 말자는 얘기이다, 전세계에 제일 잘 사는 나라 이를테면 룩셈부르크 이런 곳이라고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까?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우리나라 굶주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때는 오지 않을거다. 상대적으로 우리 상황이 나으니까 훨씬 극심한 상황에 있는 나라들도 돕자.
16. 중학교 때 도덕책에선가, 어떤 도표를 보여주면서 행복도와 부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배운 것이 생각난다. 그 때 행복 순위 1등을 했던 나라가 말레이시아였던거 같은데, 모르겠다. 일단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건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최소한의 경제적 풍요가 없다면 행복도 없다.
17. 그래, 그때 중학교 도덕 선생님이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이 웃고 산다고.. 더 순박하고 더 행복하게 산다고.. 그래, 여기 사람들도 잘 웃는다. 순박하고 어리숙하기도 하다. 근데 더 행복해보이냐고?
18. 경제적 풍요가 도덕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예술이나 철학 같은 학문이 발달하기 위해서도 경제적 풍요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말도 있다. 맞다. 여기 사람들은 예술 철학 도덕 이런거 없다.
19.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같은 철학적 고민할 여유같은거 없다. 그저 그날 밥 어떻게 해결하나 이런 생각 뿐이니까. 도덕도 공동체 질서 유지를 위한 현지인끼리의 최소한의 도덕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외국인 지갑 하나 잘만 털면 자기 몇 년치 연봉이 나온다. 무슨 도덕을 기대하는가 당장 눈 앞 끼니가 걱정인 사람한테. 얼마나 사치스러운 도덕인가.
20. 다른 나라 애들같으면 교육받을 시간에, 에티오피아는 애들끼리 모여서 노니깐 웃음이 많구나. 못 배웠으니 순박하네. 고민없네. 가진게 없으니 재산걱정 안해도 되네. 그냥 하루하루 끼니 걱정없이 살면 만족하네. 좋네, 많이 웃네, 에티오피아 얘들은 행복하네. 우리나라 애들은 바쁜 학교생활에 학원생활에 별로 웃지도 않는데.. 에티오피아 애들이 우리나라 애들보다 더 행복하구나.
21.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저게 더 행복한거라고? 저딴거 때문에 경제적 풍요랑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우리나라 애들은 교육 받는다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니까? 괜히 철학이란거 배워서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으니까? 취업 고민이 심해서?
22. 지독한 자기 합리화. 멀쩡한 사람 칼로 찔러 죽여도 바로 합리화 시킬 수 있을꺼 같은 지독한 사람들..
23. 중학교 때 도덕시간에 나왔던 그 도표의 정체가 무엇이었었는지 결국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
의욕 넘치는 학자들은 인간의 행복을 측정한답시고 이런저런 데이터와 이론을 들이민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74년 ‘이스털린 역설’(Easterlin Paradox)을 발표해 30년 넘도록 제법 재미를 봤다. 경제성장과 행복수준은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논지다. 이스털린은 그 근거로 바누아투, 방글라데시 같은 빈국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고, 미국 프랑스 영국처럼 선진국은 낮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그런데 최근 강력한 반론이 나왔다. 미국 와튼스쿨의 베시 스티븐슨 교수 연구팀은 “부유한 나라 국민이 가난한 나라 국민보다 더 행복하고,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국민의 행복수준도 높아진다.”고 했다. 세계 132개국을 대상으로 지난 50년간 자료를 분석했더니 복지인프라가 튼튼한 나라의 국민 행복수준이 더 높더란 것이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410031014
24. 말레이시아가 아니라 방글라데시였구나. 행복도에 관한 학문은 그 역사가 몹시 짧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강력히 지지하지만, 모르겠다. 둘 다 행복이란걸 정말 측정하고 있는 건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많이 든다.
25. 앞서 한 얘기들이랑은 반대 되는 얘기. 이것 또한 앞서 말한 자기 합리화중 하나가 아닐까 걱정되긴 하지만.
26. 봉사란 무엇일까. 내가 있는 도시로 글을 쓰러 여행을 온 수필 작가가 있었다. 여자 작가였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아프리카 종단 여행을 해낸. 그래서인지 자신감이 아주 넘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겪은 고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 작가와 단원들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27. 봉사단원이랑 수필 작가랑 얘기할만한 주제가 뭐가 있겠는가. 결국 봉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게 되었다. 각국으로부터 이 나라로 파견 온 봉사자들이 주로 어느 정도의 생활비로 어느 정도의 주거지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얘기했다.
28. 그 작가는 봉사자들이 본인의 생각보다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였었다. 아무래도 아프리카 종단 여행하면서 볼거 못 볼거 다 본 사람이니까 봉사자에 대한 기대도 몹시 컸었겠지. 아무튼 작가가 분개한 이유는 봉사자들이 봉사자세가 안되어 있다는 주장이었다. 자기 먹을꺼 자기 하고싶은거 다 하면서 어떻게 봉사를 하냐는 말이었다. 거기 굶는 애들 보면서 먹을게 넘어가냐는 얘기도 덧붙였다.
29. 오히려 그런 생각이 봉사활동을 저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뭔가 봉사는 생고생을 하면서 해야만 봉사로 생각한다던가, 그런 투철한 정신으로 봉사하는 사람들만 봉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던가하는 생각이 봉사는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려 사람들의 참여를 저해하는 것은 아닐런지.
30. 봉사라는걸 죽을 고생을 각오해야 시작하는걸로 인식하게 된다면 봉사자의 수는 아주 적어지지 않을런지.
31. 굳이 봉사자가 부리는 사치가 현지인들의 지갑에 들어간다는 유치한 경제논리를 펼치지 않더라도, 봉사자의 사치에 어떠한 도덕적 오류도 없지 않는가. 잘 먹고 잘 살면서 봉사하는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오히려 본인한테 편한 환경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본인의 일의 효율도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32. 본인이 굶는 아이들을 보고 죄책감을 느껴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분명 그 것은 좋은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자기 허영심으로 괜히 오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것은 분명히 그 이상이라고 하고 싶다. 봉사할 때의 태도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니깐. 현지인과의 눈높이를 맞추면 그들이 겪는 고충과 그들의 필요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을테니까.
33. 하지만 이것을 봉사자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 때부터는 잘못 된거다. 여러가지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일단 타의에 의해 생고생을 하기 시작하고, 봉사란 원래 이런건가 하고 생각하게 될꺼다. 이 상황에서 보람으로 자신의 고생을 다 행복으로 승화 시켜낼 수 있는 사람은 참 소수 일 것이다. 봉사활동은 불행한거라고 여기게 되면 그거만한 비극도 없지 않을까.
34. 그리고 호화라고 해봤자 본인이 원래 자국에서 생활하던거에 비하면 호화라고 말할 것도 아니다. 단지 워낙 못 사는 나라니깐 호화로워 보일 뿐.
35. 매스컴의 영향으로 나온 편견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보통 매스컴에 방송되는 봉사자들은 마더 테레사 같은 투철한 성품의 봉사자들이다.(혹은 그렇게 편집되었다) 현지인들은 흙집에서 살고 있고 참혹하게 살고 있는데, 봉사자 집이 2층 시멘트 집이면 시청자들한테 감동이 덜해지지 않겠는가.
36. 이러한 방송을 본 사람들이 봉사자들을 우상시하게 되고, 군자같은 인품과 인덕을 기대하게 되고, 이에 걸맞지 않는 봉사자들에게 실망하는 우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게 아닐까.
37. 그런 사람은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고 칭찬받아 마땅하다.(비록 그게 편집으로 인한 것일지라도) 하지만 쫌 더 크게, 길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러한 사회적분위기가 사람들의 봉사 참여를 꺼리게 만들지는 않을까
38. 아무래도 봉사라는게 뭔가 특별한 일로 인식되지 않고, 그냥 일상적인 행위,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