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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Jul 15. 2021

14 나의 사명찾기

나의 짧은 자서전

나의 사명 찾기


“나의 사명은 강연으로 사람들을 도전하여 인류 경제분야에 공헌하는 것이다.”

가.   강연가의 역량을 함양하기 위해 경력(회사원, 회계사, 경영컨설턴트 등)을 쌓는다.

나.   또한 끊임없이 (어학, 독서, 전공(MBA)) 학습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유하지 못했던 가정 형편 때문인지 경제적인 부분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함이 있었다. TV에서 나온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보며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고 나는 저들보다 사지 멀쩡한 몸을 가졌으니 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심지어 내가 사고라도 당하여 그 불편한 몸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삶을 보임으로써 본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난 그런 깜냥은 안되는 사람이었고 다만 더 많은 혜택과 복을 누린만큼 더 많이 베풀고 나눠주면 된다는 마음에 지금은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자 노력 중이다.

나는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강연을 수단으로 삼고 싶은 것이고 강연을 통해뛰어난 사업가들의 가치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 내가 목표로 삼은 방향대로 간접적으로 경제분야에 대해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내 스스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다면 경제분야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수 있겠지만 뛰어난 사업가의 자질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공헌보다 간접적인 공헌이 더 전략적으로 맞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성장기

 

나는 대전에서 태어났고 대학교 과정까지 대전에서 생활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에 우리 집 형편이 중산층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냥 살만 했으니까. 하지만 커서 중산층의 의미를 알고 보니 우리 집은 서민층이었다. 어릴 적 돈 문제로 다투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다 보니 고등학교 때 꿈은 회계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내가 숫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하고 싶은 전공이 무엇인지 적는 시간에 “물리학과”를 적은 적이 있었다. 단순히 내가 수학과 과학에 흥미가 있었고 왠지 물리학이 제일 과학자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2가 되어 문과와 이과를 나누게 되었을 때 회계사가 되려면 회계학과를 가야 된다고 생각했고 회계학과는 문과였기 때문에 문과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영어보다는 수학을 좋아하고 잘했던 나는 주위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과를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단순하게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학을 못하고 영어를 잘하면 문과, 반대면 이과를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내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그래서인지 영어 때문에 내 진로가 다소 꼬이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럴 줄 몰랐다. 대학입시에 내가 공부하던 시기는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뀐지 얼마 안되는 시기였는데 수능을 보고 그 점수만으로 특차(특별전형)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각 대학들이 우수 인재를 모집하기 위해서 좋은 조건들을 걸어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학비 때문에 사립대는 꿈도 못 꾸고 국립 혹은 시립대학들을 알아보았고 그 중 서울시립대를 지원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 때 기억이 생생하다. 마감 전까지 소위 눈치작전을 보니 정원이 채워지지 않는 과들이 있었다. 나는 회계학과에 지원하고 싶었기 때문에 경영학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 지원한 학교에서는 회계학과 경영학이 경영학부로 되어 있었다. 당시 경제학과가 미달이었고 같이 지원하려던 동창은 불안하니 경제학과에 지원하자고 했으나 내가 강경하게 경영학부를 지원하자고 해서 지원했다. 결국 그 친구는 합격하고 나는 떨어졌다. 그 친구가 나보다 총점이 1점 정도 밖에 높지 않았지만 내 점수에 비해 영어점수가 높았고 영어에 가중치가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격차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안타깝다. 대학생활을 해보니 상경계열 학과들은 서로 전공선택으로 수강을 쉽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성향상 경제학과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아무도 내게 그런 조언을 해 줄 사람도 없었고 무지함으로 인한 순간의 선택이 진로를 좌우하게 되었다. 당시에 너무 화가나서 정규시험에 재도전을 하려 했으나 부모님의 반대와 재수는 할 수 없다는 불안에 - 당시 복수지원이 가능했지만 내가 졸업한 충남대와 서울시립대가 같은 그룹군에 있어 복수지원이 불가했다. – 충남대만 지원했고 복수지원은 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다른 사립대도 검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난 내가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닌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고 부모님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충남대는 당시 성적으로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고 그나마 담임 선생님이 회계학과보단 경영학과가 내 경우에 더 나을 것이라 하여 회계학이 아닌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은사발견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상경하고픈 꿈은 좌절되었지만 그래도 대전에 남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공동체를 생각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런 공동체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대학에 와서 기웃거리던 동아리들 중 “네비게이토”와의 만남은 내게 중요한 만남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교회 청년부 공동체인 “예수가족”을 위해 네비게이토 생활은 겨우 한달 남짓 밖에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만남을 통해서 그동안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편협하게 알고 있었던 내가 성경의 중요성과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분별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망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성경을 꾸준히 읽기 시작했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성경과 신앙서적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각종 수련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이야기하고픈 비전과 사명에 대해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그 수련회에서 은사발견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사실 특별하게 드러난 나의 은사는 없었다. 당시엔 계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은사발견 질문지를 다시 보았을 때 몇몇 은사들이 내게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은사는 “예언의 은사”이다. 성경에서 쓰인 예언의 은사는 물론 미래의 일어날 일을 말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겠지만 대체로 성경에 대해 깊이 있게 깨달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할 수 있는 은사로 본다. 그래서 한 때 신학교를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청년회 회장, 대표리더 등을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은사가 있음이 검증되고 내 안에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되어 더욱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내 안에 믿음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신학교를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고 신학교에 대한 강한 부르심을 느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이후 대학졸업과 함께 해병대 장교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2년간의 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대대 참모직 중 인사장교를 맡게 되었다. 대대급에서는 인사장교가 정훈(정신훈련) 교육을 겸하는데 정훈교육을 여단 방송을 시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직접 교육하는 기회도 있었다. 해병대 대원들을 교육하는데 성경이 아닌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기쁨이 있음을 발견했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은 꼭 성경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내용에 상관없이 가르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선교적 삶

 

두번의 선교한국 대회를 통해 누구나 단기선교를 가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인 취업 전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으로 보고 이왕이면 영어도 배울 수 있는 과정을 찾다가 CSMTC(일명 MIT – Missonaries in Traning의 약어) 과정을 신청하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영어교육을 하고 이후 필리핀 자체 단기선교 프로그램(영어로 진행)에 동참하는 과정이었다. 약 7개월 간의 필리핀에서 교육을 마치고 타지키스탄의 어느 NGO 단체 협력 자원봉사자로 약 9개월간 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겠다는 마음까지 먹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학교를 통해 가는 목사 선교사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전문인 선교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이후 한국에 돌아와 취업을 하게 되었다.

1년 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전문인 선교사로 파송해 줄 수 있을 듯한 선교단체의 부부모임에 참석을 했었다. 실제 중동지역에 주재원 신분으로서 선교단체 파송을 받은 분도 있는 모임이었다. 다만 걸림돌은 3개월 간의 합숙훈련이 필수 요건이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돌봐줄 인프라도 없고 경력단절에 대한 대안도 없었다. 믿음의 문제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갓 결혼해서 아이가 없는 전문직 부부만이 가능할 법한 요건이었다. 즉 다양한 상황 및 분야의 사람들을 선교사로 키우기 위한 시스템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다른 선교단체들도 비슷했다. 또한 전문인 선교사의 후원과 그 직업을 통해 얻게 되는 소득의 사용 등과 관련해서 불합리해 보이는 부분이 다수 있었다.

선교단체를 통한 파송, 즉 그 선교단체 소속의 선교사가 되는 것은 내려놓고 생각해 보니 내가 “선교사”라는 타이틀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가 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선교사가 된 들 부끄러운 삶을 산다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며 평범하게 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더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운 것은 선교에 뜻을 품은 많은 직장인들을 선교사는 아니지만 선교지에서 동역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평신도라는 틀에 갇혀 열정과 헌신의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묻혀 지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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