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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Feb 05. 2021

오류와 마법

켄 리우, <종이 동물원>

  우리가 바라는 것과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났던 일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간극이 존재한다. 이루지 못한 희망만큼의 차이는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채우지 못한 어떤 틈은 후회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애타게 다가갔으나 생각만큼 가까워지지 못한 마음을 우리는 아쉬움이라 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인연을 떠올릴 때 느끼는 그 막막한 거리를 우리는 그리움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감정들이다. 감정은 이렇듯 오류에 기반한다. 그만큼 바라지 않았다면, 그만큼 가깝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괴로울 일도 없을 것이다.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다면, 이룰 수 있는 희망만 가진다면,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누구도 죽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것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할 이야기다. 우리가 가진 오류와 세상이 주는 제약들을 없는 것처럼 살아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소설 속에서나 말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상상해본다. 감정을 없앨 수 있다면 우리는 늘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인공지능이 내게 딱 맞는 삶을 추천해준다면 어떨까. 태어나면서 자신의 영혼을 형체화된 물건으로 지니게 되는 세상에서 자신의 영혼이 얼음으로 태어난 이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영상, 사진 기법을 넘어서 실재를 그대로 포착해 기록할 수 있는 매체가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특정 순간에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인간 개조를 통해 죽음뿐 아니라 물리적 한계 또한 넘어설 수 있다면 그 개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거를 기록이나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될까. 진실을 알게 된다면 모든 갈등과 고민이 사라질까.      


  켄 리우의 단편 소설집, <종이 동물원>은 이러한 질문들을 기반으로 그려낸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흥미를 돋우는 설정을 넘어서 그의 소설들을 감정을 다룬다. 정확히는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설계상 오류와 그것이 즐거움이나 행복과 연관되지 않고 고통과 슬픔, 분노로 표출되게 만드는 세상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켄 리우가 택한 전달 방식,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는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종이 동물원>의 첫 번째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을 읽고 나면 의아할 것이다. 잭이라는 중국인-미국인 혼혈 아이와 카탈로그에서 골라져 홍콩에서 미국으로 시집 온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 과학소설의 요소라고는 엄마가 숨을 불어넣은 종이접기 동물들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점밖에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울고 있는 내 모습에서 시작한다. 기억 속의 나는 엄마와 아빠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
  잠시 후, 엄마는 꼬깃꼬깃 접은 종이 덩어리를 입에 대고 풍선처럼 숨을 불어넣었다.
  “칸, 라오후.(봐, 호랑이야.)” (...)
  나는 엄마의 피조물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꼬리를 움찔거리다가 내 손가락을 향해 신나게 덤벼들었다. (...)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움직였다. 그건 엄마의 마법이었다.(p.13-14)     


  엄마가 숨을 불어넣은 종이접기 동물들은, 어린 잭의 친구가 되어 준다. 그러나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성장한 잭은 고등학생이 되고, 자신의 엄마가 카탈로그와 중개 업체를 통해 중국에서 미국으로 시집왔음을 알게 되면서 엄마를 경멸하게 된다.   

  

  신부로 팔려 가려고 자기 사진을 카탈로그에 싣다니,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 (...) 경멸의 맛은 달콤했다, 와인처럼.(p.15)     


  그가 어릴 때부터 잭의 가족에 대한 주변 이웃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멀쩡한 남자처럼 보이던데. 왜 이런 짓을 했을까?”라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집에 놀러 온 마크라는 아이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다투게 된다. 엄마가 만들어준 종이 호랑이, 라오후에게 쓰레기라고 한 마크에게 잭이 달려든 것이다. 다툼 와중에 망가진 자신의 스타워즈 인형을 보고는 마크는 잭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거 엄청 비싼 인형이란 말야! 이젠 가게에서 팔지도 않는다고! 네 아빠가 네 엄마를 사 올 때 낸 돈보다 더 줘야 할지도 몰라!”(p.20)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상심한 잭에게 식사 자리에서 엄마는 묻는다. “쉐샤오하오마?(학교 잘 갔다 왔어?)” 잭은 중국어로 말하는 엄마가 밉다. 여기는 미국인데 왜 영어를 쓰지 않는 걸까. 우리 가족은 왜 매일 중국 음식을 먹는 걸까. 그는 엄마에게 말한다. “영어로 말해요. 영어로.”, “우린 미국 음식을 먹어야 해요.”(p.21) 잭의 아빠가 그를 거들자 엄마의 어깨는 처진다. 그런 그들에게 엄마는 말한다.    

 

  “내가 ‘사랑(love)’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愛]’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p.23)   

  

  이후로 잭은 엄마가 중국어로 말을 걸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점차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말이 없어진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엄마의 병실에서다. 그녀가 오래 참아오던 통증은 이미 몸 안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있던 암 때문이었다. 그녀는 잭에게 자신이 만들어 준 종이접기 동물들을 담아둔 상자를 꼭 챙겨달라고 말한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청명절이면 그걸 꺼내서 자신을 생각해달라는 말과 함께.


  그로부터 2년 후, 어느 날 잭은 그의 여자 친구가 예쁘다며 구석에 있던 상자에서 꺼내어 집 여기저기에 둔 종이접기 동물이 예전처럼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다. 오랜만에 만난 종이 호랑이, 라오후는 그에게 장난을 치다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서는 저절로 풀어져 버린다. 종이 호랑이를 접었던 포장지의 뒷면에는 한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맨 위에 적혀 있는 아들을 뜻하는 한자뿐이다. 그렇게 엄마한테 편지를 받은 잭이 인터넷에서 확인한 그 날은 청명절이었다.      


  길에서 찾은 어느 친절한 중국인 관광객이 번역해 준 엄마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 그래서 너한테 편지를 쓰기로 했어. 내가 너한테 만들어 준 종이 동물들 안에, 네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 애들 몸속에 편지를 쓸 거야.
  내 숨이 멎으면 그 아이들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온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면, 이 종이에 나의 일부를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을 거야. (...) 네가 혹시 내 생각을 떠올리면, 넌 내가 남긴 일부를 되살릴 수도 있을 거야. 내가 너한테 만들어준 동물들이 다시 뛰고 달리고 덤비면, 어쩌면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수도 있겠지.(p.30)     


  그리고 그녀는 그를 낳기까지 거쳐온 인생에 대해 말해준다. 역사의 풍랑 속에서 잃어버린 그녀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그러나 잭을 낳고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을 닮은 잭의 모습 속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에 알고 사랑하던 모든 것, “그 모든 게 진짜였다는 증거”(p.33)를 발견한다. 자신의 기억조차 흐려져 갈 때 그녀를 살아가게 해 준 마법은 잭의 존재였다. 그리고 잭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그녀와 그녀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중국어 억양으로 말을 했을 때 그녀는 살아서 이어지는 자신의 언어를 느낀다.     

  그랬던 잭이 더는 엄마와 말을 하지 않으려 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그 감정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리고 편지를 읽은 후의 잭의 마음, 그의 감정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할까.


  세분화된 분류에서는 이러한 소설을 과학소설을 포괄하는 ‘사변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분류가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감정처럼, 완벽한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소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호함이 이 소설에 생명을 준다. 어떤 여백,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 사이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마치 납작한 종이로 만들어낸 종이 덩어리에 숨을 불어넣었을 때 마법처럼 호랑이가 살아 움직였던 것처럼.          



  켄 리우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그것이 기억의 본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한 습관에 ‘이야기 짓기의 오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의 일면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속에 있는 은유를 좀 더 선명하게 구현할 뿐이다.(p.8)     


  이야기 짓기의 오류란 서사화의 오류를 말한다. 실제로는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 일들, 무의미한 사건들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인간의 속성을 일컫는 인지과학의 용어다. 이는 저자의 말대로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혹은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리 존재를 견디는 인간의 방식이다. 띄엄띄엄 존재하는 사건들, 흐릿해져 가는 기억들 사이를 납작한 종이를 부풀리는 숨결처럼 이야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논리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못하더라도 어떤 오류 혹은 마법 - 감정을 담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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