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는 이유
초등학교 시절 일기 쓰는 게 제일 싫었다. 누구나 방학숙제로 일기를 밀려 써 본 추억은 하나쯤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가끔 좋아하지도 않은 동시를 베껴 쓰거나 노래 가사를 적기도 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더 이상 학교에서 일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일기를 쓰게 된 계기
군대에서 중대장이 되니 병사들에게 '감사나눔'을 강요하고 있었다. 군에서 누가 도입했는지는 모르지만 상급부대 지침으로 5감사운동 열풍이 한번 불었다. 취지나 감사나눔의 의미는 좋지만 감사를 강요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군대스럽다.
나름 열심히 쓰는 친구들도 있었고, 형식적으로 몇 줄 작성하고 마는 친구들도 있었다. 무작정 형식적으로 쓰는 부하들을 나무랄수 없어 나도 감사나눔노트를 작성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꾸준히 쓰진 못했지만 하루에 대한 감사를 작성할 때는 진심을 담아 고민했다.
강요에 의한 작성은 의미 없다.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저녁 점호 전 서로의 쑥스러운 웃음을 통해 나비가 꽃가루를 옮기며 퍼져가는 서로의 정(情)을 바랐다.
그렇게 우리 중대만 자꾸 감사나눔노트 양식이 바뀌었다. 꼰대 중대장 입맛에 맞는 '가는정 오는정' 노트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괜히 일을 만들어 행정병과 부중대장을 고생시켰나 싶다. 꼰대 중대장만 좋았던 노트로 기억할 수도 있지만 그때 이후 나는 일기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희로애락을 일기에 담았다. 가장 많이 담긴 이야기는 '성낼 로(怒)'였다. 상급부대 점검과 끊임없는 지적사항에 억울함과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를 일기에 녹아내고, 가슴속 응어리를 녹여 흘려보냈다.
'즐길 락(樂)' 또한 자주 기록했다. 전방 중대장 시절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다. 즐거움 또한 행복의 조건중 하나다. 행복의 시간을 글로 새겨 겹겹이 쌓인 추억이 되길 바랐다. 실제로 지금 중대장 때 쓴 일기를 가끔 열어보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습작의 시간이 아니었나 상기한다.
지금도 연필로 꾹꾹 눌러 자기 전에 일기를 쓴다. 미생의 삶을 시작하면서 잦은 술자리와 사람 사귐에 일기를 밀릴 때도 있지만 밀리면 밀린 대로 쓰지 않는다. 밀린 일기를 굳이 쓰려고 하면 버거움에 일기 쓰는 걸 포기해버릴 것 같다.
군대에서 시작된 일기의 첫 테마는 감사였지만, 지금은 틀을 정해 놓지 않고 그날의 감정을 깊은 생각 없이 쓴다. 자존감을 높이는 일 중 하나는 일기를 쓰는 일이다. 자존감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며 일기를 쓸 때면 살아있음과 행복을 느낀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오늘보다 나은 10년 후를 만들 수 있진 않을까?
10년 후 오늘의 일기를 다시 보면서 지금 일기도 인생의 완성본을 만들기 위한 습작이 되길 바란다.
길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출처 : 여행의 이유 - 김영하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