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자와 고화도 안료
웹서핑을 하다 웃긴 짤을 저장하듯이, 마음에 드는 유물 사진을 모아두는 폴더가 있습니다.
여태 도무지 쓸 일이 없었지만(박물관 사람들은 문화재로 농담하고 그럴 것 같죠? 안함...)
인생 참 모르는 일이라, 그 폴더에서 한 점 한 점 꺼내어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오네요.
추석 단맛 뒤 출근이 한층 더 맵고 쓴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일까요.
퇴근하고 싶을 때 꺼내보는 유물들이 있는데, 바로 이 사자 연적입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 연적이지요.
물 담는 부분은 순백자로 하고, 사자만 청화와 철화로 알록달록하게 칠을 했어요.
파란색은 청화(코발트), 갈색은 철화(산화철)랍니다.
똘망똘망 씰룩씰룩,
사자의 얼굴과 몸, 꼬리에는 아기자기한 곡선의 맛이 넘칩니다.
각설탕처럼 간결한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연적 몸통과 대조되니,
번쩍 고갤 들고 눈을 빛내는 사자에게서 더욱 보드라운 생동감이 느껴진답니다.
중국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오채(五彩)' 자기입니다.
사실 이 연적이 만들어지던 시기, 전세계의 도자기는 이렇게 컬러풀한 장식을 넣은 백자가 대세였어요.
이런 색색의 안료(물감)은 견딜 수 있는 온도가 낮은 편이라 저화도 안료라고 부릅니다.
섭씨 1200~1300도가 넘는 백자 가마에서는 다 타버리고 말죠.
그래서 유약까지 입힌 백자를 먼저 만든 뒤에, 그 위에 안료를 칠하고 낮은 온도에서 한 번 더 구워낸답니다.
일본 역시 이로에[色繪]라고 하는, 저화도 안료로 꾸민 백자를 만들어요.
사진의 접시는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채색 백자는 유럽과 이슬람 문화권으로 대량으로 수출되며,
쉬누아즈리 열풍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것도 에도시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만든 커피포트랍니다.
일본에서 봐도 이국적이고, 유럽에서 봐도 이국적이었을,
오리엔탈리즘 취미의 디자인이 인상적이죠... ㅎㅎ
그러나 이렇게 컬러풀한 저화도 안료를 채택한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 백자는 끝까지 청, 동, 철 3종 고화도 안료 외길을 걸었습니다.
이게 조선 백자에 사용된 안료의 전부입니다. ㅎㅎ
파란 매화꽃은 청화, 불그스름한 꽃망울은 동화, 매화가지는 철화 안료를 칠한 거지요.
청, 동, 철 이 세 가지 안료는 모두 고화도 안료입니다.
백자가 구워지는 고온을 견딜 수 있으므로,
흙으로 빚어 초벌구이한 그릇 표면에 바로 칠하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구워낼 수 있어요.
그림까지 유약으로 보호가 되기 때문에, 마모되거나 지워지는 일이 없지요. :)
백자 위에 십장색 무늬를 양각하고, 청화와 동화 안료를 칠한 병입니다.
이 정도가... 조선 백자가 감당할 수 있는 극한의 화려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이.. 아쉬우신가요?
조선 사람들도 많이 아쉬웠던지,
중국산, 일본산 화려한 수입 자기를 사다 집을 꾸미는 사치를 지적하는 기록들이 전한답니다.
저화도 안료로 그림을 그려 생산할 기술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저화도 안료를 찾는 수요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저렇게 단조로운 색들만 고집했을까 싶기도 하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지만,
저는 조선시대에 백자가 지니는 독특한 의미 때문이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에요.
백자의 깨끗하고 담박한 아름다움 자체가 성리학적인 검박한 기품을 상징했고,
그래서 가볍고 번잡스러운 장식을 넣는 것을 멀리하는 방향을 유지했으리라는 거지요.
종종 기름진 치킨도 시켜먹고 자극적인 마라탕도 시켜먹지만,
집밥이라면 역시 담백한 건강식이어야지, 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이 모순적인 조선시대 사람들의 취향이 이해가 되실까요? ㅎㅎ
오늘날 박물관에서 보이는 이런 알록달록한 조선 백자들은
사람들의 취향을 생각해 많이, 아주 많이 양보해서 만든
홈메이드 피자 같은 것일지 몰라요. :)
다시 연적으로 돌아와 사자의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볼까요?
아마 사자의 모양은 틀로 찍어낸 뒤 세부를 칼로 다듬었을 거예요.
색을 칠하지 않은 입주변엔 뾰족하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입술도 보이죠.
여기에 청화 안료로 자잘한 털결을 그려넣고,
그위에 다시 철화 안료를 중요한 윤곽을 덧칠해 입체적인 느낌을 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청화, 동화, 철화 안료를 사용해 이렇게 열심히 꾸민 흔적을 따라가 볼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요.
40색 크레파스!
어릴 때 40색 크레파스를 정말정말 갖고 싶었거든요.
언니가 학교에서 상으로 타왔는데,
금색이나 은색, 에메랄드 그린 같은 예쁜 색에는
절대 손도 못 대게 하는 게 얼마나 얄미웠는지 몰라요.
제 크레파스는 아마 12색이었던가... ... (눈물)
표현하고 싶은 색은 너무 많은데,
제 크레파스 상자에는 진하고 단조로운 색들뿐이라
그림을 그릴 때마다 아쉽고 답답했던 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러니, 조선시대에 백자가마에서 장식을 하던 사기장들은
하-얀 백자를 앞에 놓고,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이것도 그려달라 저것도 그려달라고 난리였을 텐데,
3색 가지고 뭘 하라고!! ㅎㅎㅎ
기다리던 메일이 와서 급하게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 연적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백자 위에 동화 안료를 두루두루 칠한 감 모양 연적이랍니다.
깊어가는 가을의 즐거움이 담뿍 담긴 빛깔이지요.
구석구석 감씨가 쏙쏙 박혀 있을 것 같이 단단하게 잘 여문 모양도 예쁘고요.
크기, 모양, 색, 질감과 광택... ...
비록 쓸 수 있는 색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나름으로 그 나름대로,
눈에 익어갈수록 돋보이는 아름다움이 조선 백자에 숨어 있어요.
그 맛에 더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즐거운 연휴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