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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혁 Apr 03. 2020

남자는 수동 아이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고등학생 시절, 우리는 모이면 운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졸업하면 바로 오픈카 산다. 내가 한 번씩 태워줄게."

웃기고 있네? 넌 면허 시험부터 떨어진다. 내기해도 좋다.”


맞다. 우리는 운전에 앞서 면허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시답잖은 허세 앞에 현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근거 없는 자신감과 허세만이 공기를 채웠다. 면허 시험은 당연히 ‘원패스’, 운전은 준프로 레이서, 딱 그렇게 생각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그 시절 우리 중 누구 하나 원 패스로 면허증을 거머쥔 녀석은 없었다. 모두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몇 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자 한 녀석의 자신감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냥 오토 시험 볼까?”

오늘부터 절교다.”


우리에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아니 포기해선 안되는 하나의 허세가 존재했다. 남자라면 수동이라는 절대적인 허세 말이다. 분노의 질주 빈 디젤처럼 파워풀한 기어 변속과 타이어를 짓이기는 가속, 그런 건 헛된 꿈이었다. 우린 울컥거리는 가속 페달을 달래가며 앞으로 기어나갔고 덜덜 떨려오는 클러치에 시동이 꺼질까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클러치가 떨려오는 만큼 ‘불합격’이란 불호령이 떨어질까 마음 졸여야 했다. 처절하고 처량한 방구석 레이서들은 그렇게 인생에서 첫 수동 운전의 공포를 헤쳐 나왔다.


현실은 영화와 많이 달랐다. 오픈카를 사긴커녕 BMW(Bus, Metro, Walking)에 의존한 대학생활이 우릴 맞이했다. 집이 좀 사는 녀석도 부모님 찬스를 통해 갖게 된 자동차가 소형차 혹은 경차였다. 더구나 남자! 답지 못하게 오토였다. 이미 시대는 수동에서 자동으로 대세가 기운 것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남자답지 못하게 흘러갈 우리들의 20대 청춘을 나라님이 구제해 줬다는 사실이다. 군대라는 남자들의 집합소에서 우리는 드디어 면허증에 새겨진 ‘1종 보통’을 당당히 내밀 수 있었다.


군대에서 꿈꿔왔던 수동 모델을 몰 수 있게 됐으나 여전히 현실은 매몰찼다. 전기모터의 도움을 받아 휙휙 돌려댔던 핸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압식 핸들이 양팔에 잔근육을 만들어냈고 서스펜션이 존재하긴 하는지 울컥거리는 승차감과 육중한 무게의 차체는 엔진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더 무서운 것은 이놈의 나라는 왜 이리도 거칠고 험한 산길이 많냐는 것이다. 툭하면 빌빌거리며 오르막을 올라가다 어느 순간 시동이 뚝 꺼져버린다. 그럴 때마다 뒤에서 들려오는 선임의 날 선 눈빛과 욕설은 식은땀이 줄줄 흐르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수동 운전에 익숙해졌을 때도 운전 재미를 찾긴 어려웠다. 애인 달래듯 살포시 클러치와 페달을 밟아대며 최대한 승차감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군대의 불문율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간 뒤통수 멀쩡히 제대하긴 힘들었을 테다. 결국 수동 운전을 할 줄만 아는 남자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간인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며 어떤 녀석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경제적 여유도 차츰 생겼고 자동차를 구매하는 녀석이 늘어갔다. 그러나 수동 모델을 택하는 녀석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피곤을 덜기 위해 자동 변속기가 얹어진 자동차를 찾았고 와이프와 아이를 위해 재미 보단 실용성 있는 자동차를 샀다. 교복을 입고 지평선을 가로지르던 방구석 레이서들은 어느 누구도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 채 여전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방구석 레이서 꿈을 이어갔다.


이젠 교복이 아닌 옥죄여오는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남자답지 못한 남자들이 모여 그 시절을 회상한다. 여전히 남자는 수동이라며 허세 가득한 말들과 일장연설의 운전 스킬을 열거하면서 말이다. 아, 물론 우리 중 한 녀석은 그런 우리를 비웃으며 수동 운전의 묘미를 가르치긴 한다. 그 녀석 야채 농사를 지으며 매일매일 전투적인 수동 운전을 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자식들아, 남자는 수동아이가! 니들이 수동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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