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며.
# 최근 친구와 만나서 인생, 가치관, 행복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친구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부분에서 나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맞을까?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편안하고 안락하게,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삶을 보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매번 답이 없는 삶의 목적을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과거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는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면 정답은 아니어도 그 가이드가 될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사피엔스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몇년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사실 사피엔스를 못들어 본 사람들은 많지 않을텐데 아이러니하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를 수 있는 혹은 알고 있더라도 잊고 있었던 사피엔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피엔스는 사실 두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완독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번째는 방대한 책의 페이지와 압도적인 두께 ㅎㅎ
두번째는 이 내용이 다루고 있는 방대한 역사, 짧게 잡으면 6백만년 전부터 미래를 다루고 있는 광활한 역사의 부담스러움..
해서 나 역시도 이러한 세부적인 역사를 다 아는 역사광은 아니기에 유발하라리가 설명하려는 크게 네가지 관점에서의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에 대한 흐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을 크게 네가지 과정으로 나눈다.
1. 인지혁명
2. 농업혁명
3. 인류의 통합
4. 과학혁명
과 마지막은 인류의 미래에 관해 제안하고 있다.
1. 유발 하라리가 주목한 부분이자, 상대적으로 다른 많은 역사학자들과 학자들과의 차이점인 '인지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인류는 최초에 많은 유인원들 사이에서 지금 호모사피엔스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발하라리가 본 인지혁명은 대략 7만년전이다.
호모의 종 안에는 알다시피 다양한 종이 있었다.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 (일하는 사람),그리고 우리 인류는 우리에게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명명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종보다 뇌가 컸다. 큰 뇌는 다양한 성과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게 했다. 또 다른 특징은 직립보행이었다. 이렇게 뇌가 커지면서 인류는 뇌에서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근육이 퇴화했다. 실제로 뇌는 인간의 몸의 2~3퍼센트만 차지하지만 인간이 휴식할 때 뇌가 쓰는 에너지는 25퍼센트나 된다.
더불어 직립보행이라는 점은 인간이 손을 쓰는 것이 가능해 지게 만드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이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 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직립보행 이후 인간은 디스크라는 대가를 치뤄야 했고 네발로 다닐 때 보다 엉덩이의 근육들이나 크기가 약화되고 작아지면서 인간의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워졌다고 설명한다. 뇌가 커진 덕에 아이의 머리는 커졌는데 직립보행으로 엉덩이 및 골반등은 작아지니 아이를 일찍 출산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종에 비하여 인간의 아기는 오랜 기간동안 스스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엄마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육아는 혼자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설명이다.
또다른 변화는 화식, 즉 식량을 익혀 먹는 것이다.불을 사용하게 된 인간은 이러한 익히는 요리법 덕분에 더욱 다양한 종류의 식재료를 먹을 수 있었고 이러한 화식이 생식에 비해 소화가 훨씬 빠르게 잘 되기 때문에 인간의 창자가 짧아지고 남은 에너지가 더 뇌로 가서 인간이 뇌를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이 더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가장 유사한 종인 네안데르탈인을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 시켰을 것이라 이야기하며 그 원동력이 바로 앞서 말한 인지혁명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말한다.
인지혁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상상을 개념화 하고 그것을 언어로 전달하여 공유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유발하라리의 책을 읽고 사람들이 놀라워 했던 부분과 어떤 부분에서 불편했던 부분은 바로 이 인지혁명일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삶이 많은 것에 상상하는 것과 그것을 개념화한 약속 아래 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인지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유발하라리는 이 개념을 푸조라는 회사를 들어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성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삼성은 실재하는가? 이게 무슨 질문인가 싶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삼성은 무엇인가? 강남역과 수원에 있는 삼성의 건물이 삼성인가?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성의 지도자라고 불리우는 그들이 삼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삼성이라는 개념이 정의하는 집단과 어떠한 위치, 또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생산물 등을 통합해 삼성이란 개념을 상상해낸다. 이밖의 삼성을 구성하는 것은 굉장히 많다. 실재로 삼성은 법인인데 이는 회사가 인간처럼 어떤 권리를 추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삼성 뿐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국가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한반도라고 정의를 해놓은 그 땅덩이 만을 우리는 국가라고 하는가? 그 이상의 상상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런 상상의 개념을 집단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하겠다. 이런 집단적 상상력으로서의 존재는 많은 역할을 한다. 실제로 전형적인 침팬치 무리의 개체수는 20~50마리다. 이들은 친인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미도 집단 생활을 한다. 인간의 뇌에서 결속할 수 있는 최대 자연적 규모는 150명 정도라고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집단과 더 많은 사람들과의 공동체속에 협업하며 조직을 이루고 유지한다. 이는 이러한 상상적 개념을 믿고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설명한다.
이 상상적 개념은 사실 가상의 실재에 가까운데 이것은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은 없는 것을 상상하고 말하는 것이고 가상의 실재는 이 개념은 있지만 한가지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집단적 무언가이며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이다.
인간의 즉, 호모사피엔스의 이러한 능력 덕분에 인간은 제국을 건설하고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신화를 만들어내고 종교를 만들어냈다.
더불어 호모 사피엔스가 발휘한 능력이 뒷담화 능력이다. 이렇게 집단화 된 인간들은 더이상 친인척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뇌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수준의 다수의 사람들과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이 집단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배제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네안데르탈인은 보통 혼자가 아니면 작은 집단으로 사냥 기술을 개발하였으나, 사피엔스는 수십명이 협력하는 사냥 기술을 개발했다. 때문에 사피엔스가 더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집단화 하여 개념화 하고, 뒷담화로 집단에서 배제해야 할 사람들을 걸러가며 언어로 그것을 전달하기 때문에 발전하였으며 이는 우연적인 사건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 두번째로 농업혁명이다. 유발하라리는 수렵채집인과 농업인의 삶에 관하여 설명한다. 농업혁명 전의 지구에 살고 있던 5백만~8백만의 수렵채집인은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수천개의 개별 부족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간들의 삶이 더 윤택해지고 평화로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수렵 채집인들은 첫번째로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훨씬 적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수렵채집하는 다양한 식단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농부는 상대적으로 매우 제한된 종류의 불균형한 식사를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밀을 기르는 민족, 쌀을 기르는 민족 등 제한된 곳에서 제한된 종류의 곡물로 식사를 하게 된다. 더불어 농업에 비해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을 것이라 말한다.
농업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산다. 농업을 하면서 수렵 채집의 형태와 사냥의 형태보다 울타리를 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이 더 편안함을 알게 되고 한정된 곳에서 모여 살며 가축을 길렀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기를 수 있는 가축의 종류도 한정적이다. 양, 돼지, 소 ,닭 정도인데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인류를 죽음에 이르르게 했던 전염병들도 사실은 이러한 가축에게서 옮겨진 병들이 많았다고 한다.
더불어 농업을 하면서 누군가는 잉여 곡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사유재산의 시작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해서 이러한 잉여 생산물이 빈부격차와 전쟁등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전쟁과 폭력의 시작은 이러한 농업혁명으로 인해 누군가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것들이 생기며 이것을 활용한 지배층과 피배층의 발생, 그리고 서로 잉여생산물을 빼앗으려는 폭력과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우리가 수렵채집사회에 비해 농업사회가 되며 노동에 들이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자연의 번성과 성장의 속도는 가히 엄청나기 때문에 인간은 우리가 재배하고자 하는 특정 작물 외의 것들을 제거하거나 그것이 잘 자라도록 하는데 시간을 많이 쓰게 되었다. 또한 밀은 껍질이 있어 그것을 음식으로 만드려면 반드시 껍질을 벗겨야 하고 그래서 집에 곡물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많은 밀들을 흘리게 되었을 것이며 이것이 농업이 퍼지게 만든 원인이 된다고도 설명한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자연의 변화가 굉장히 중요해 지고 , 당장 먹을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미래를 예측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올해 농사가 잘 되더라도 어떤 해에는 흉년이 들 수 있으며 그러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와 같은 것들, 즉 신의 개념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설명한다.잉여 생산물들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 등의 문화를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우리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끌어당겨 걱정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농업혁명으로 얻게된 부작용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호모사피엔스의 입장이 아닌 우리가 기르는 '밀'의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보자. 밀은 지구의 역사상 지금이 가장 호황기다. 가장 많은 밀들이 경작되고 있으며 과거에는 자라지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밀이 생산된다. 인간이 그렇게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밀이 행복한 상황일까? 밀의 개체수가 많아진 것이 꼭 그것이 행복해 지는 조건은 아닐 것이다.
야생 닭의 자연 수명은 7년~ 12년이고 소는 20~25년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닭은 보통 30일 안에 죽는다고 알려져있다. 그 이상이 되면 경제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파는 비용보다 키우고 처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농업혁명으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인간의 개체수도 빠르게 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지구에 인류가 많은 것이 과연 개별 인간에게 행복한 상황일까? 많이 태어나는 사람의 수 역시 부정할 수 없지만 그만큼 많이 굶어 죽거나 질병등 전염병으로 죽는 숫자들도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안에 인류는 서서히 지구의 압도적인 종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문명을 발전시킨 인간은 종교와 같은 앞서 말한 집단적 믿음에 그 에너지를 쏟게 된다. 어떤 학자는 종교라는 것이 이렇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 인간이 그 이유를 신에게서 가져와서 신이 인류에게 부여했다고 말하며 생겨났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인류는 이제 신에게 그 권한을 부여받으며 우리가 키우는 가축들과 곡물등을 죽여도 되게 되었다.
농업혁명으로 명명한 이러한 문명의 발전은 종교의 개념을 설명하고 발전시키기도 한다. 종교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신을 믿는 집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지혁명에서 우리가 옳다고 존재한다고 믿는 집단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자유는 사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종교'이며,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물학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하여 진화하였다. 또한 이 진화는 평등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집단을 운영하기 위한 것의 수단으로 집단의 가치를 개별자의 자유를 부여하는 자유민주주의로 명명하면서 평등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국가를 위해 죽는 것과 같은 행위는 집단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것들은 진정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해서 어떤 경우에서는 이 집단을 통솔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개념이며, 일반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것이 상상의 산물임을 인지하는 것은 그들이 원치 않는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유지되기 위해선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야 하며 , 둘째 그것을 위해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들을 지속하고 이어가기에는 인간은 한계가 많았다. 인간의 뇌는 제국 규모의 데이터 베이스를 저장하기에 용량이 부족했고 , 인간이 죽으면 뇌도 같이 죽으며 인간의 뇌는 특정 정보만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해서 이러한 상상의 산물들을 이어가고 지속시킬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자의 최초 형태는 숫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서 유발하라리는 오랜 시간 인류가 이어온 백인 우월주의나 남성 우월주의 같은 것들을 그 개념을 이어오고 지속해 오는 집단의 문자의 이어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사실 생물학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다. 남성이 더 우위에 있거나 백인이 우위에 있거나 평등해야 한다는 개념마저도 그러하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우연히 그렇게 생겨난 것을 인류가 어떻게 가치를 매기고 그것을 약속하느냐에 따라 지속해 왔던 것이다.
3. 인류의 통합에서는 농업혁명 이후부터 과학혁명까지의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농업혁명 이후 인류는 점차 더 큰 규모의 집단을 이루었고 이를 다양하게 통솔해 왔다. 이 과정 안에서 반드시 개입한 것이 돈이다.종교의 특성은 반드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해 돈과 결부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돈은 알다 시피 돈은 화폐 그 자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돈은 초기에 생산한 것들을 교류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화폐 형태는 보리, 조개 등 굉장히 다양했다. 돈은 이것을 가지고 다른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전환성의 특징을 가져야 하며 그 약속을 이행한다는 보편적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한다. 이러한 돈들에서 잉여들이 생겨나며 인류는 제국이란 형태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제국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불편한 감정을 주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국의 개념은 사실 오래전 부터 있어왔으며 그 영향을 계속해서 받아 왔다. 제국은 상당히 많은 숫자의 국민을 지배해야 하며 탄력적 국경과 잠재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동양권도 오랜기간 중국이라는 제국에 영향을 받아 한자를 사용하며 살아왔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 우리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 분류로 나누려는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우리를 만드려고 하고 완벽하게 그들을 배척하려는 것이 제국주의의 면모이다.
지금 현대에서도 우리는 각자 개별 나라의 특성을 인정하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과학의 발전과 빠른 전자기기의 발전 등으로 점차 동일한 글로벌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종교를 발전시키면서 가장 많은 이념 갈등으로 전쟁을 치뤄왔다고 설명한다. 로마인들이 오랬동안 관용을 거부해왔던 것은 유일한 신은 일신교라는 기독교적 사상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문명에서 다신교들이 존재해 왔지만 일신교의 사상이 보편적으로 알려진 요즘은 다신교의 문화가 열등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특정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된 불교를 설명하며 불교야말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종교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을 숭배하는 단순한 개념을 넘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옳다고 생각하는 사상들을 포함한다. 현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인본주의 개념이다. 인간이 중요한 가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과연 그러한 가는 의문이다. 지구라는 곳에서 사피엔스가 지구의 자연을 통제하면서 당위성을 부여한 것. 그것이 어쩌면 인본주의의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잘못된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이다.
4. 마지막으로 현대를 통과하는 과학혁명을 인류 역사상 큰 변화로 설명한다. 과학혁명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무지를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인간은 그 전까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았다. 인류는 과학혁명 이후로 무지를 인정하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 인류는 무지를 인정하는 과학혁명 이전에는 세계 지도를 채울 때에도 자신들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상상으로 채워 넣었었다. 덕분에 알지도 못하고 가보지도 못한 곳들을 채워넣어 세계지도는 빽빽했다. 하지만 15~16세기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빈 공간이 많은 세계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지를 인정하는 가치관은 기존의 전통적인 것에서 더 역동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무지의 혁명으로 인해 첫번째 인류는 무지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두번째 관찰과 수학이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사실 그 전의 수학의 개념은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가했다. 하지만 과학과 결합되면서 그것을 논증하는 수단 혹은 예측하는 수단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하면서 산업혁명을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했던 돈의 개념으로 돌아와 보자. 돈이라는 가치는 사실 어떠한 재화와 일대일로 맞교환 되지 않는다. 지구라는 곳은 물질이 한정적이다. 헌데 돈은 어떻게 늘어나고 재 생산되는 것일까. 예를 들어 A 제빵사는 빵을 만들어 그것을 팔아 100만원을 은행에 저금한다. B 노동자는 자신이 번 한달 월급 100만원을 역시 은행에 저금한다. 그렇다면 은행이 갖고 있는 돈은 200만원이다. 하지만 은행은 제빵사와 노동자에게 이자를 주기도 하며 또 다른 C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가 은행은 돈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산물과 믿음으로 만들어 진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은행이 C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역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을 것이며 그것을 믿는 '신용'이라는 시스템으로 가능해진다.
이렇게 돈은 그 실체는 없어도 점점 그 규모를 부풀려가며 그 기반은 앞으로 미래가 더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과 신용 덕분이다. 하지만 과연 무한히 발전만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지구는 한정된 물질과 한정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무한히 발전한다는 것은 사실 아이러니하며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하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며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과 그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과학은 필요하다. 사실 과학만이 발전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수많은 과학자와 그것을 믿는 자본가들의 투자, 그로 생산된 또다른 재화가 다시 재투자되면서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이 지점에서 과학과 제국은 결혼했다고 유발하라리는 설명한다. 우리는 심지어 지구 밖의 것들을 탐구하는데 이르렀으며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유전적 변형도 시도하고 어느정도 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고 유럽적 사고관이 퍼질 수 있었던 것, 즉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한 것은 증기기관같은 기술적 부분이 아니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성숙한 가치나 신화, 사회정치적 구조였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돈은 제국과 과학 진흥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런 미래에 대한 발전을 전제로 하는 낙관적인 전망은 현대 경제를 계속 성장시켰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다양한 지구의 에너지원을 활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러한 끊임없는 발전과 산업사회는 소비 문화를 부추기기도 했다. 사실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것 역시 문화적 산물이다. 고대에 부자는 돈이 많을 때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무덤을 지어줬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아마 유럽으로 여행을 갈 지 모른다.
이렇게 소비하려는 욕구는 지구의 생명체인 가축들을 마구잡이로 잡고 죽인다. 돼지는 기대수명이 10년이 넘지만 6개월 내에 도축당하고 젖소들은 새끼를 낳고 젖을 짜 우유를 만들기 위해 인간이 새끼를 죽이고 또 다른 새끼를 갖게 만든다. 이런 산업화된 비극이 과연 생명체에게 긍정적인지는 미지수다.
우리 인류가 시간을 중시하게 된 것도 역시 산업혁명의 부산물이다. 모두 같은시간에 공장에 나오는 것이 중요했고 그로 인해 그들을 옮기는 대중교통의 시간표 체제가 인간의 시간의 중요성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과학을 발전시켜 질병을 확실히 줄일 수 있었지만 질병과 행복이 꼭 정비례 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기대수명이 늘어났다고 해서 현대 인류가 행복하다 볼 수 있을까.
# 유발하라리는 미래 사회를 내다보며 앞으로의 인류의 방향성도 제시한다. 현대는 인본주의가 중심이 되어 있고 서두에 말한 것 처럼 인류는 인류 개체의 행복함을 위해 발전해 온다고 믿고 있다.
유발하라리가 정의하는 행복을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세로토닌이 높게 유지되는 상황이다. 세로토닌이 1부터 7까지의 수치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사람이 아침에 일어났는데 10억원의 로또가 당첨되었다.! 오후에는 남북을 통일시킬 엄청난 발견을 해냈다! 저녁에는 과학계에 길이 남을 인류를 위한 엄청난 발견을 해 노벨상을 받았다!
이 사람의 하루에서 세로토닌 수치가 100을 넘을 수 있는가. 아무리 최대치를 잡아도 그는 7까지 갈 뿐이다. 인류의 행복이 세로토닌의 높은 상태의 유지라면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다.
실재로 우리는 미래에 엄청난 빈부격차에 살고 있지만 뇌의 원리를 발견해 약 한알만 먹으면 늘상 세로토닌 수치가 7이 유지되는 상태를 살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우리 인류가 지향하는 바인지 그는 묻고 있다.
# 이 책을 보면서 호모사피엔스, 즉 인간이기에 당연하고 인간이 중요하다는 상식은 역시 의심해 볼 가치가 있음을 느꼈다. 동시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어쩌면 인류를 발전시키기 위한 상상의 산물은 아닌지 의심해 보면서. 서두에 말했던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정말 행복인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