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로 본 인류, 그럼에도 인간이기 때문에
다윈의 '종의 기원'. 그것은 그 시대상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역시 제목이 주는 selfish, 즉 '이기적'이라는 단어와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많은 오해를 빚어 왔다.
이 '이기적 유전자'를 해석하기 위해 여러 번 읽어보고 다양한 해석에 관한 글들과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 자체는 굉장히 어려울 수 있는데 최대한 오해 없이 내가 받아들인 측면을 기반으로 이 내용을 쓰려고 한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지구는 최초 화학 원료가 풍부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화학 원료의 종류는 물, 이산화탄소, 메탄, 암모니아 같은 단순한 화합물일 것이라고 말이다.
과학자들은 최초의 생명이 없었던 지구의 형태를 재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했다. 실제로 이런 단순한 물질들을 플라스크에 넣고 에너지원을 가한 뒤 2~3주가 지나면 대개 플라스크에서는 처음의 분자들보다 복합적인 것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분자들을 포함한 연갈색 액체가 생겨났는데 이 연갈색 액체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되었다고. 이것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대표 물질 중 하나인 단백질요소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생명체와 근사한 것이 생겨나는 기본단위. 우리는 그래서 유전자를 자기 복제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자기 복제자들은 계속 자신의 복사본을 만들어낸다. 반복적으로 복제를 해나가면서 이것이 바닷속에서 빠른 속도로 퍼졌을 것이고 이것이 생명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러한 자기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나면서 소위 다른 형태의 복제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다양한 종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유전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유전자를 둘러싼 핵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저자는 비유를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몸을 거대한 건물이라고 비유하면
그 건물의 설계도가 들어있는 책장이 있다고 말한다.
이 책장을 우리는 '핵'이라고 부른다. 이 안의 인간의 설계도는 46권이나 되며
그 각 한 권 한 권을 염색체라고 부른다.
이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보면 실처럼 보이는데 이 안의 내용을 구성하는 페이지를 유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유전자는 무시되는 열성 유전자와 반대인 우성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DNA로서의 유전자의 수명은 과연 어떨까.
이 DNA분자는 생명이 매우 짧다. 하지만 DNA분자는 반복적으로 사본을 만들어내고 그 사본들은 1억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유전자를 정의하고자 하는 부분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유전자가 사본 형태로는 거의 불멸이라는 것이다.
유전자는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생존하게 만들었고 이것을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이기적'이란 말에 사실 이 책이 나온 이후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이 부분에서부터이다.
이러한 모든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유전자라 하며 저자는 이러한 유전자를 담는 생명 단위를 모두 유전자의 기계라고 설명했다. 우리 인간도 따지고 보면 유전자를 운반하는 기계 중 하나이며 지구상의 어떤 동 식물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이러한 유전자를 담는 기계들은 유전자가 유리하도록 진화해 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신 중심의 사회인 고대와 중세를 지나 현대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다루는 인간주의가 가장 보편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저자의 이러한 유전자를 중심으로 생명체가 발전해 왔다는 설명은 누군가에겐 불편한 부분이며 인간은 이에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어떤 부분에서는 반발을 사게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을 깊이 들여다보고 따라가다 보면 이 같은 생각이 조금은 완화될 수 있다.
우선 유전자와 개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유전자가 진화하는 것이 절대 개체에 유리하게 진화해 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 우선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설명하겠다.
-집단선택론 vs 개체선택론
자연의 흐름에서 진화론적 관점에서 더 유리한 쪽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것이 자연 선택론이다.
이 자연 선택론 안에는 크게 '집단선택론'과 '개체선택론'으로 나뉠 수 있다.
집단 선택론이란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집단이 살아남았다는 가설이다. 저자 도킨스는 이와 반대로 개체선택론, 즉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유전자 선택론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집단 선택론의 관점으로부터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의 논쟁과 불편함이 있어왔다. 실제로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로 이러한 집단 선택론의 오남용으로 우성학으로 활용함으로써 , 히틀러가 나치즘을 키우는 근거가 되었고 백인이 우월하다는 논리로 잘못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지점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싶은 것은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저자는 우리 각각의 개체를 위해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유리함을 위해서 진화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생존해 있는 것들이 반드시 그 개체가 우월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자신이 유리하도록, 최대한 많은 자신의 사본을 남기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프로그래밍에 의해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도 많은 부분에서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프로그래밍에 유일하게 역행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 호모사피엔스, 즉 인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유전 보존의 유리함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우리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개체 (인간 자체 )가 오랫동안 살아남아야 하며 이를 위해 양질의 영양소가 필요로 하고 그래서 유전자 안에 양질의 음식, 즉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와 사본을 오래 유지하길 원하며 이를 위해 번식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이것이 인간이 성욕이 있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들은 인간뿐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의 앞에서 발표를 할 때 떠는 것 같은 행위도 이러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개체가 생명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단이 아닌 타 집단에서 튀는 행위는 공격을 받거나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현대화된 인간의 여러 삶의 패턴으로 인해 삶의 모습이 다양해지고 이러한 유전자가 원하는 방향의 역행하는 행위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나 앞서 말하였듯 유전자의 생존과 유지가 개체의 행복과 안녕과는 절대 무관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 우리는 과실 안에 에탄올, 즉 알코올을 좋아하게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되어 있으나 이것을 한 개체가 무한히 좋아하는 것은 개체의 자기 파괴 행위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유전자의 유지를 위한 프로그래밍이지 개체가 안녕과 행복을 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러한 대목에서 살아남은 것이 더 우월한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 책을 해석하면 무리가 있다.
일일이 모든 상황에서 어떻게 하라고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 유전자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불편해 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유전자결정론과 유전자선택론을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유전자결정론은 태어날 때 정해진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론인데 많은 대중들이 이것으로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유전자선택론은 유전자 입장에서 때때로 환경에 적응할 때 그래도 유전자를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는 이론이고 그렇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안받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전자가 같은 일란성쌍둥이가 하나는 햇볕이 많은 뜨거운 지역에서 자라고 하나는 햇볕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성장했다고 가정해 보자. 유전자는 유전자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자외선에 피부를 보호하는 멜라닌 색소를 더 많이 만들어내게 프로그래밍되었다. 해서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장 환경의 적응에 따라 유전자는 유전자의 유지에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며 해서 환경과 유전자 중 뭐가 우선인가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전자가 오래 보존되고 유지하기 위해 이기적인 것만 남아야 할 것 같은데 환경은 그렇지 않다.
ess의 개념
황제펭귄 vs 다른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자기 파괴적인희생
예를 들어보자, 황제펭귄이라는 종은 추운 북극에서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무리 지어 붙어 있는다.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개체 생존을 위해 중요하고 그것이 유전자를 오래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경우는 이 유전자의 보존이라는 개념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많다.
우리는 가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많은 열사들을 보기도 하며, 단순히 엄마와 자식의 관계만을 봐도 엄마는 자신의 유전자에 피해가 갈 것임(그러니까 개체가 생존하는데 방해되는 )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벌의 예를 들기도 한다. 벌은 상대를 공격하면 그 침과 함께 자신의 내장이 빠져나와서 죽게 된다. 이것은 자기 파괴적 행위이다. 하지만 자신의 집단, 즉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의 희생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을 매파와 비둘기 파란 설명으로 저자는 이야기한다.
매가 파를 이루고 비둘기도 파를 이뤄서 싸우게 되면 당연히 비둘기가 진다. 하지만 매가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비둘기파와 마주하게 되면 그 매는 불리해진다.
어떤 아름다운 잔디를 밟지 말자는 약속을 했다고 가정하자. 모두의 상생을 위해서는 이상적으로 잔디를 밟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누구 하나가 깨끗한 잔디를 밟았다고 가정하면 그 개인은 그 자연을 온전히 누리게 된다. 즉 어떤 집단에서 배신자가 나올 수 있고 또한 이런 집단의 배신자가 나오면 한두 번은 용서하되, 일정 선을 넘으면 처벌하게 되어있다. 이처럼 이기적인 것 혹은 이타적인 것이 서로 상호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가는 전략을 저자는 ESS전략이라고 한다.
즉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유전자가 더 오래 존속하기 위한 전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유지해야 할 것 같고 모두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면 좋을 것 같지만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가치'이지 사실은 유전자가 그런 개별적인 계산을 해서 행동한다기보다는
특정 집단에서 살아남고 그 집단을 유지하되 적절한 다른 전략을 취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과 싸우는 것, 혹은 처벌하는 것 등을 통해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것, 즉 그래서 진화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만드는 것이 ESS이다.
더 많은 개체를 , 더 많은 유전자를 복제할 수 있게 하는 상태.
이처럼 인간의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을 저자는 유전학적으로 설명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 vs 부모에 대한 사랑 - 비용과 이득
흔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우리는 내리사랑이라 표현한다. 많은 예시를 보면 부모의 사랑을 자식이 따라가긴 어려워 보인다. 이도 유전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부모의 유전자보다 더 건강한 개체 (자식)의 생식과 번식을 통해 더 많은 유전자를 유지하고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투자하는 기회비용에 비해서 부모의 사랑은 훨씬 더 헌신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많은 유전자를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더 많은 생식과 번식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인간은 아니 생명체는 그렇지만은 않다.
유전자는 무작정 많이 낳는 것이 아니라 이 유전자를 오래 생존하게 하는 것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실험에서 새끼가 많이 우는 소리를 내는 소리를 들려준 새의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새끼를 덜 낳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새끼가 운다는 것은 새끼 자신에게는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지만 더 상위 포식자가 새끼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들을 공격하거나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생존에 유리한 부분은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동물들도 개체수를 조정한다고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많이 낳는 것이 아닌 자신의 환경에 따라 유전자를 유지할 수 있는 개체를 돌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생존하기 유리한 조건으로 최대한 맞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전자는 생존에 유리한 것들이 결과적으로 오래 보존되었다는 것이지, 유전자가 목적을 갖고 행동한다는 목적중심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특정 상황일 때 유전자는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선택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것이지 개체의 생존과 안녕에 맞춰서 모두 프로그래밍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현재 결괏값에 대한 설명으로 봐야지 이것을 목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밈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밈은 단지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즉 생존 기계 측면이 아니라 ) 문화적 전달을 끊임없이 하고 있고 이것은 어떠한 부분에서 유전자 전달과 반대되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밈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밈은 종교적인 부분으로도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도 나아가기도 한다.
아까 말했던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가 무조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자연은 꼭 그렇게 발전해야 할 것 같은데 자연은 신기하게 그 균형을 맞추는 ESS를 선호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타주의와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는 마음, 선경지명 등으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비둘기파의 공동행위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유전자를 보존하도록 최대한 많은 유전자를 남기도록 세팅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수렵채집의 과거 환경에서 우리의 유전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유전자 복제본을 남기기 위해 뇌를 세팅할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행위를 했을 때 편안한 기분일 수도, 혹은 어떠한 부분에서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즐겁고 편안하게 안락하게 휴식을 하면 기분이 좋다.
반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불안, 질투, 분노의 감정들은
사실 이런 유전자의 관점으로 볼 때 유전자의 존속을 위해 유리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불편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연재해같은 태풍에 대비할 수 있고
질투를 느끼기 때문에 그 집단 안에서 성공할 수 있어 더 많은 유전자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부분에서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유전적인 것이 유리한 것에 대한 선택으로 규정하고 그 개체를 기계로 설명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서 불편함을 유래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과 유전자의 보존에 대한 설명일 뿐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한계를 느낄 때,
나를 설명하기 어려울 때.
이 유전적 보존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 유전적 보존 법칙에 대항할 힘이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도
묘한 희망감을 주는 설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유전자가 만들어놓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이다.
유전자의 생존에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는 감정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 몰입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피곤하지만 성장을 위해서 공부나 일을 하러 가기도,
지금은 귀찮지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 달콤한 음식을 거부하는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는 일이다.
인간이기에 선택 할 수 있다는 것. 그 부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