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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에서 재회한 조지아 딸내미 '안나'

by 야간비행


3년째 여행을 하다 보니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여럿 된다. 그들과는 SNS를 통해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다. 동양인과 서양인,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도 다양하지만, 모두 여행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이어진 소중한 친구들이다. 나이가 많거나 어리다고 해서 위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또 다른 여행지에서 재회할 것을 기대하며 지내고 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린 친구가 바로 조지아 딸내미, '안나'이다. 굳이 '딸내미'라는 표현을 쓰는 건, 내 딸보다도 더 어리기 때문이다. 2000년생인 안나는 올해 스물다섯 살이다. 조지아 흑해 바닷가 근처 도시 포티가 고향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수도 트빌리시로 와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은 독립 디자이너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여행을 워낙 좋아해 몇 달 일해서 돈이 모이면 혼자 배낭을 메고 세계를 돌아다닌다. 영어, 러시아어, 튀르키예 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아주 야무진 친구다. 조지아에서 20대 여성이 혼자 여행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니, 안나는 분명 독특한 친구임에 틀림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다녔고, 졸업 후에도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결혼은 당분간 생각하지 않고 돈 벌어 여행하며 살겠다고 말하는, 영혼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다.


나이를 잊게 한 베트남과 헝가리의 추억

2024년 1월, 우리는 베트남 나트랑에서 우연히 만났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옆자리에 앉은 것이 인연이 되어 3일간 함께 여행했다. 놀이공원에 가서 아이들처럼 비명을 지르며 롤러코스터를 탔고, 밤에는 거대한 관람차에 앉아 야경을 감상하며 낭만에 젖기도 했다. 함께 바다 수영을 즐겼고, 저녁에는 해변의 디스코텍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나이 차이를 넘어선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잠시 놀라기도 했지만, 미국 생활 시절 덴마크 이웃의 '토플리스 수영'을 이미 본 적이 있었기에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KakaoTalk_20250908_051410657.jpg 2024.1월 베트남 나트랑 놀이공원에서 함께 롤러코스터

그리고 지난 5월 부다페스트에서 또 만나 1주일간 관광과 하이킹을 함께했다. 시내를 다닐 때 안나는 구글 지도를 보며 앞장섰는데, 길 찾는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빨랐다. 여기서부터 ‘아, 젊음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 부다페스트 외곽의 산을 함께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산 동호회에서 50~60대 들과 걷던 속도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20대 안나의 빠른 걸음에 놀랐다. 알고보니 험준한 조지아 산맥을 비박하면서 며칠씩 종주했던 강철 여성이다.

스크린샷 2025-09-08 053429.png 2025.5월 부다페스트 뒷산 하이킹: 안나는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닌다

안나의 남자친구가 부다페스트에서 근무 중이어서 나의 한 달 살이 기간에 맞춰 왔다고 한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맞출 만큼, 그녀는 나를 소중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내 나이를 몰라 자기 아빠 같은 친구라고 하더니, 부다페스트에서 내 나이가 68세인 것을 알고는 '할아버지' 같은 친구라고 한다. 안나는 나이와 성별을 떠나 오직 '친구'로만 나를 대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관계가 가능한 것은, 바로 여행이라는 문화적 개방성 덕분이다. 나 또한 어느덧 국제화되어 그런 안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우리는 40년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지내고 있다.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이유

내가 조지아 트빌리시에 왔을 때, 안나는 고향에서 할머니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를 보기 위해 기차로 6시간 거리의 트빌리시로 왔다. 젊은 친구가 왜 '할아버지' 같은 나를 만나기 위해 이 먼 거리를 왔을까? 내가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좋은 할아버지 친구이기 때문이다.


'입을 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 이상이다. 젊은이들의 생각과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공감한다는 뜻이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도 젊어져야 한다. 안나와 있을 때면 영어가 짧아 말을 많이 하기도 어렵지만, 딸내미의 수다에 맞장구쳐주고 그저 웃으면서 재미있게 들어준다.


'지갑을 연다'는 것도 밥값을 내는 것을 넘어, 마음을 열고 선의를 베푼다는 의미다. 안나가 그저 밥을 얻어먹기 위해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내가 그녀를 공감해 주고 배려해 주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기꺼이 함께 해주기 때문에 나를 찾는 것이다. 지공거사가 롤러코스터를 함께 타거나 클럽에 가서 함께 춤을 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젊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 나이에 젊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고집이 생기기 마련인데,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새로운 생각에 자극을 받는다. 젊음은 그 자체로 에너지다.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더욱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한국에서는 나이 차이 나는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 더구나 60대와 20대가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여행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여행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다.


안나는 월드컵 유럽 예선 불가리아 대 조지아 경기가 있는 9월 7일 트빌리시에 왔다. 축구를 좋아하는 안나는 트빌리시 경기장에서 경기를 관람한 후 내가 카공하고 있는 카페로 찾아왔다. 조지아가 불가리아를 3 대 0으로 이겼다고 한다. 응원하느라 목이 쉬어 있었고, 경기 중 비가 내려 흠뻑 젖어 있었다. 에너지 넘치는 안나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나는 나를 만나자 껴안고 볼에 키스를 한다. 나도 딸을 대하듯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젊었다면 영락없이 연인들이 재회하는 모습이다.


조지아에 올 때 외국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다는 한국 화장품 몇 개를 가져왔다. 안나에게 주었더니 환호성을 지른다. 화장품 사진을 찍더니 SNS로 이리저리 보내 자랑한다. 'K-Beauty'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쿠팡에서 구입한 저렴한 화장품 몇 개로도 안나가 감격스러워한다. 지난달 클럽에서 자기만 신분증 검사를 했다면서, 18세 이하로 어려 보인다고 자랑하더니, 한국 화장품 바르면 이제 15세로 보겠다면서 깔깔 거린다. 25세도 어려 보이는 게 좋은가 보다.

KakaoTalk_20250908_051144164.jpg 축구장 응원복장으로 흠뻑 젖어 나를 찾아왔다.

함께 식사하고 맥주도 한잔하면서 내가 트빌리시에 머무는 동안 함께 보낼 계획을 세웠다. 베트남에서 함께 클럽에 갔던 기억이 좋았는지 매일 밤 클럽에 가자고 한다. 밤에 산책하면서 버스킹 음악에 맞추어 춤추던 사람들을 보며 나도 몸이 들썩거렸는데, 안나와 신나게 춤을 춰 볼 생각이다. 콜라텍이 아닌 세계의 젊은 남녀가 모인 클럽에서 언제 또 춤을 춰보겠는가?


안나가 나의 향후 여행 계획을 묻는다. 이미 예약을 마친 2026년 여행 계획을 알려줬더니, 내년 초 이집트 카이로 한 달 살이 할 때 와서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한다. 몇 달 뒤의 일이라 알 수 없지만, 안나와 함께 한 달 살이를 하는 재미있는 경험을 해 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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