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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네시스 Aug 25. 2023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1

하늘을 날아 삿포로로

2020년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2021년 다시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2022년 열려라 참깨를 외쳤다. 문이 열릴 턱이 없었다. 그래서 주문을 바꿔보았다. "엔드코로나!!" 드디어 문이 열렸다. 일본관광이 재개되었다. 


2019년 말에 우연한 기회로 모 출판사의 리뷰대회에 입상하여 오사카 항공권을 받았다. 매년 한두 번은 드나들었던 일본이었지만 그때 나는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라 참고 있던 중이었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시험일자가 많이 남기도 하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덥석 여행계획을 세웠다. 남이 사주는 표라서 가격 생각하지 않고 난생처음으로 기내식을 주는 비행기를 타고 교토와 고베에 다녀왔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즐거운 여행을 추억의 책갈피에 추가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년에 합격하고 나면 일본에 다시 놀러 와야지.' 그런데 합격도 오지 않았고 출국길도 닫혔다. 이게 3년이 넘게 갈 줄이야?


2022년 9월이 되니 일본 입국이 슬슬 가능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처음에는 가이드가 있는 패키지여행만 허용되었다. 그러다가 규정이 조금 완화되어 숙소만 정해져 있는 자유여행스런 패키지까지 허용되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무비자 입국이 재개되었다. 슬그머니 표를 알아보니 이미 표가 매진인 날이 많았고, 혹여 있더라도 가격이 폭등 중이었다. 3년씩 생이별한 한일커플들도 있다고 하니 그런 급한 분들 먼저 만나는 것이 맞겠지 싶었다. '나 같은 여행객은 조금 기다렸다 가도 괜찮으리라.'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계속되어도 표값이 안정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직 코로나가 종식되었다는 보장이 없어서 항공사들이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수요가 폭주하는 가운데 공급 증가는 미미했던 것이다. 보통 가격이 비싸면 여행생각을 하지 않았을 나지만 마음이 조금 급해졌던 것은 왼쪽 옆나라(구 청나라) 사정 때문이었다. 코로나로 현재 국경을 봉쇄 중인 그 나라의 여행제한이 해제되는 순간 고즈넉한 여행과는 안녕을 고해야 하리라. 


이따금씩 스카이스캐너 사이트에 들어가 항공편을 알아보곤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갈 찰나 슬슬 티켓값이 사정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8년 전 뭣도 모르고 방문했던 도쿄를 다시 방문하는 AS개념의 여행을 해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이전의 푯값 기준으로 가격이 너무 높은 상태였다. 오사카와 후쿠오카는 꽤나 샅샅이 훑고 다녔으므로 아직은 재방문이 당기지 않는 여행지였다. 도야마나 에히메 같은 소도시를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항공사의 수요예측이 되지 않는지 취항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홋카이도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왕복 28만 원. 평소에 다니던 곳들과 비교해 보면 분명 비싼 금액이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홋카이도행 티켓보다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보통 40만 원 이상씩 하던 곳이었는데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니 비수기였다는 점이 작용한 것 같았다.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선선함을 느끼며 색색의 꽃밭을 구경할 수 있는 7~8월의 홋카이도여행. 그리고 한 겨울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 설원의 홋카이도여행. 사람들이 홋카이도에 대해 생각하는 대표적인 계절들이다. 그리고 자리가 있는 티켓은 10월 말.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늦은, 겨울이 오기엔 많이 이른 애매한 시기였다. 인간이, 아니 내가 참 간사한 게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홋카이도인데도 저렴한 티켓이 며칠째 없어지질 않으니까 '이 시기의 여행은 그렇게 별로인가?' 싶어서 욕심이 사그라들었다. 더 간사한 것은 그렇게 표를 지켜보다가 자리가 없어지고 가격이 올라가니까 미리 사두지 못한 표가 너무나 아쉽고 속상해졌다. 간 보다가 망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보다 며칠 뒤의 표가 같은 금액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제를 완료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꼬에요.


사실 티켓팅을 할 때 3박 4일 일정과 5박 6일 일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시즈오카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시즈오카 티켓팅을 하면서 3일짜리 일정과 5일짜리 일정을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런 생각이 있었다. '5일 뒤 귀국하는 항공권을 샀는데 3일만에 구경이 끝나면 어떻게하지?' 라는 생각. '남은 이틀동안 뭘 해야 하지?'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그때 3박4일로 티케팅을 했고 여행 마지막날인 4일차에 공항으로 끌려가다시피 돌아가며 속으로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난다. 3일 아니라 30일도 모자란다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 티케팅을 하면서 여행기간을 먼저 정하고 그 뒤에 보고 싶은 곳들을 인터넷에서 찾아가며 일정을 만든 뒤 숙소를 예약한다는 루틴이 있다. 항공권을 구입하는 시점에는 정보가 별로 없어서 '뭐 볼게 그렇게 많겠어?' 라고 생각을 하지만 계획을 세우다 보면 점점 보고싶은 곳은 많아지고 주어진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분단위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이 때가 바보같은 나를 꾸짖을 절호의 찬스다. "이봐 나새끼! 여행은 무조건 긴 게 최고야!" 그런 과거에 대한 후회를 바탕으로 10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5박 6일 일정의 홋카이도 여행계획수립작전이 시작되었다.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에겐 교통에 대한 선택지가 많지 않다. 바로 BMW다.  Bus, Metro, Walking의 약자다. 이번 여행에선 JR패스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 기준 홋카이도에서 사용할 수 있는 JR패스는 '삿포로-노보리베쓰 에리어 패스', '삿포로-후라노 에리어 패스', '홋카이도 레일패스'로 3종이었다. 본인의 여행지역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데, 하코다테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무조건 '홋카이도 레일패스' 외에는 답이 없다. 하코다테와 삿포로를 왕복하는 JR열차의 티켓이 19,000엔 정도인데 그것을 포함하는 홋카이도 레일패스 5일권이 19,000엔이기 때문이다. 비행기표를 싸게 샀다고 좋아했더니 교통비에 함정이 있었다. 가난한 뚜벅이 여행자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레일패스를 결제했다. (그래도 한국에서 할인받아 미리 구매했더니 16만 5천 원 정도의 금액으로 선방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블로그와 유튜브를 섭렵하며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고른 뒤 구글지도를 펼쳐놓고 동선을 최적화하는 작업을 했다. 이것은 참으로 피 말리고도 재미난 여행준비였다. 그렇다. 나는 ENTJ다. 들숨 날숨까지 계획하고 싶다.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도 정보 탐색과 수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알아본 교통편으로는 공항에 제시간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속 알아보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계획을 수정해서 인천에 있는 본가에서 하루 자고 새벽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집에 하루 묵고 가겠다고 연락을 드리고 나서도 교통계획에 의심이 가시지 않아 다시 검색해 보니 그 방법으로도 공항에 너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여행 시작부터 이런 방식의 두근거림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알아보니 강남역에서 새벽 4시께에 출발하는 공항버스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 강남에는 나의 쓸데없었던(?!) 친구가 넓은 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개똥이 약에 쓰려니 있었다(!!) 무릎 꿇고 전화를 걸어 저자세로 밤에 비바람만 좀 피하게 해달라고 하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다시 본가에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해서 강남에서 출발하기로 했다고 하니 아버지가 여행에 보태라고 엔화를 환전해 놨는데 어쩌냐고 하셨다. 주말에 하루 시간을 빼내어 집에 들렀다. 여행경비 넉넉하게 준비했는데 뭘 이런 걸 또 준비하셨냐고 하니 '밥 굶을까 봐 걱정돼서'라며 웃으시는 아버지. 어머니는 비행기표는 본인이 해주시겠다며 한사코 사양하는 내 통장에 송금을 해주셨다. 나이 먹고 부모님을 모시고 어디 다니지는 못할망정 혼자 여행 간다고 용돈까지 받고 다니는 못난 아들은 참으로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돈은 안 주셔도 되니 그저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면서 내가 언제든 돌아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든든한 항구로 계셔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친구네 도착해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수다에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결국 잠은 못 자고 버스시간이 다 되어 집을 나섰다. 약간은 쌀쌀해진 10월 말의 새벽. 공항버스에는 여행의 설렘이 가득했다. '계절에 아직은 좀 일러 보이는 털이 북실한 코트를 입은 저분은 나처럼 공기가 찹찹한 홋카이도에 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잠들었다간 내릴 곳을 지나쳐버릴 정도로 피곤한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부릅뜬 채로 버티며 공항에 도착했다. 3년 만의 인천공항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공항에 오랜만에 오기도 했고, 코로나 이후에 출입국과 관련해 바뀐 상황들이 많아서 조금 걱정을 했다. 배낭에 들어가지 않아 가방 아래쪽  끈으로 고정해 둔 덜렁거리는 삼각대를 수하물 규정으로 문제 삼지나 않을까, 백신접종증명서를 준비해 뒀는데 뭔가 맞지 않다고 비행기표를 취소시키지나 않을까 등등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카운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기존의 체크인에서 접종증명서를 추가로 제출해야 하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보안에서 짐검사까지 마치고 공항 로비에 들어서니 비로소 약간 안심이 되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려보내진 않겠지 싶었다. 시간은 오전 6시. 7시 25분 비행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난생처음 아침밥도 챙겨 먹어보았다. 육개장으로 배를 두둑하게 채운 뒤 미리 알아본 냅존이라는 곳에서 눈을 잠시 붙일까 생각도 해봤는데 잠들면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자지 않고 버티다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의 가속력에 몸이 뒤로 쑤욱 밀려나고 어느새 두둥실 떠올랐다. 인천공항이 점처럼 멀어져 갔다. 



3년만에 만난 인천공항은 대부분 그대로였지만 조금씩 바뀐 부분도 있었다.
든든히 육개장으로 배를 채우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서울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롯데월드타워의 우뚝 선 모습이 한강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섬 하나 없는 동해바다가 나오더니 한참 지나 육지가 나왔다. 일본 혼슈였다. 비행기는 육지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더니 다시 또 바다가 나오고 곧이어 커다란 섬이 나왔다. 그곳이 홋카이도였다. 유튜브를 어찌나 열심히 봤었던지 하코다테와 노보리베쓰 상공을 지나갈 때는 그곳이 어딘지 대번에 알아차릴 정도였다. 결국 비행기에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창문에 껌처럼 들러붙어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다.



서울 하늘을 가로지르며 출발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는 지형은 꽤나 다채롭다.
일본 혼슈의 끝. 아키타현 뉴도곶과 미즈시마
댐을 경계로 색이 달라지는 물길,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분화구인 아키타현의 토가만
홋카이도에서 보이는 요테이산, 하코다테
유황내음 가득한 노보리베츠



홋카이도공항에 내리니 넓은 통로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있었다. 여행객이 아니라 공항 쪽 사람들이었는데 MySOS(일본방역관련 어플리케이션)를 통해 방역 관련 사전정보를 입력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여 안내하고 있었다. 마라톤을 뛸 때 관중들 사이를 뛰어가는 기분이 이랬을까?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보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오하요고자이마스." "곤니치와"라며 환영해 주었는데 왠지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관광이 생업인 분들에게 코로나란 얼마나 재앙 같은 일이며, 그 종식을 알리는 무비자 관광객이란 얼마나 반가운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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