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록한 허리가 아름다운 하코다테의 야경
밤의 하코다테역
하코다테의 핵심지역들이라고 할 만한 곳들을 순회한 뒤 체크인을 위해 호텔로 향했다. 하코다테역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가격이 저렴한 개인실이 있다고 해서 하루 정도는 잘 쉬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약한 곳이었다. 한참 걸으며 긴가민가하다가 호텔을 발견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곳이라서 놀랐다. 심지어 로비에 들어가서도 카운터까지 한참이나 걸어야 할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카운터에 바우처와 여권을 드리고 혹시 한국어 안내가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직원분이 크게 당황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영어도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한국어 안내도 자주 쓰이지 않는 곳에 있어 찾는데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코로나 때문에 외국인이 거의 없이 3년을 지내면서 외국인 응대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렇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직원분이 최선을 다해 자료를 찾고 안내해 주시는 모습에서 기분이 좋아졌다. 방을 업그레이드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올라갔더니 이게 웬걸. 침대만 세 개가 있는 엄청나게 넓은 방이었다. 창 밖으로는 하코다테야마가 고스란히 보이는 좋은 방이었다.(야마뷰!) 평소 헝그리한 일본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넓은 방은 처음 써보는 것 같았다. 우선 욕실에 뜨거운 물을 받아 고생한 다리를 녹여주었다. 기껏 편하고 좋은 방을 받았는데 하코다테 야경을 보러 나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애석하게도(?!) 비가 오던 날씨가 점차 개어서 야경을 볼 만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1시간 남짓의 목욕을 마치고 다시 하코다테역으로 갔다.
하코다테를 여행하면서 하코다테야마의 야경을 놓칠 순 없었다. 내가 워낙에 야경이나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려 세계 3대 야경에 속한다며 홍보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세계 신 3대 야경이라는 나가사키 이나사야마 전망대에서 별달리 느낀 것이 없어서 우선 3 대니 100 대니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모이와야마 전망대에서 다시 신뢰를 회복한 상태였다. 하코다테의 야경은 세계 3대 야경에 속하면서 일본 3대 야경에 속하면서 또한 홋카이도 3대 야경에 속한다고 한다. 일단 야경 순위를 뽑으면 무조건 들어가는 곳이라고 봐야 하겠다.
하코다테야마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은 등산버스를 이용하는 방법과 로프웨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동절기에는 눈이 많이 쌓여 등산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나는 동절기와는 거리가 먼 비수기 여행객이어서 상관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프웨이를 이용해 전망대로 이동한다. 시간이 적게 걸리기도 하고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편한 시간에 오를 수 있으며 로프웨이가 주는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선 로프웨이를 이용할 수 없었다. 대수선기간이라고 해서 마침 내가 하코다테에 있는 동안 운행이 정지되기 때문이었다. 미리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현장에서 로프웨이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크게 낙담하고 숙소로 돌아갔을 것 같다. 홈페이지에서 로프웨이 비운행 상황과 대안을 미리 알아두고 등산버스 시간표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코다테역으로 갔다. 비가 완전히 그쳐서 우산을 반납하고 잠시 기다려 등산열차를 탔다.
등산버스는 하코다테야마를 S자 곡선을 그리며 구불구불 올라갔다. 사람이 많아서 좌석에 앉지는 못했지만 일부러 창가 쪽에 딱 달라붙어있었더니 잠시 뒤 멋진 풍경이 나타났다. 버스가 크게 커브를 돌면서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하코다테의 풍경이 보였는데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나도 "이야~"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스름이 짙어지는 초저녁의 하코다테엔 가로등이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고 좌우로는 검은 바다가 커다란 호를 그려 육지를 삼키는 듯했다. 내게는 약간 한반도를 가로로 늘려놓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헤어핀 구간을 거듭하면서 점차 고도가 높아져 번번이 보는 풍경이 달라졌다. 하코다테 현지인은 로프웨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뷰를 보여주는 등산버스를 더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과연 그럴 법했다. 이렇게 보였다 안보였다 하면서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하코다테의 야경이라니. 케이블카를 타는 것에 절대 밀릴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코다테야마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거의 버스로만 실어 나르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올라와있었다니. 사실 하코다테의 낮풍경과 밤풍경을 모두 눈에 담고 싶어 숙소에 짐만 두고 바로 나오는 게 본래 계획이었는데 목욕을 하면서 몸이 녹아 흘러 1시간을 넘게 드러누워있다 나온 차였다. 이미 어스름이 충분히 내린 뒤여서 조금 더 일찍 올라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사람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난간 쪽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곳까지 이동하는데 줄을 서 있어야 할 정도였다. 사실 한국에서 10월 말에 안타까운 압사사고가 있었던 뒤라서 사람이 많은 것이 조금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난간 앞은 2층 높이 정도 되었는데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래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마침내 난간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하코다테의 야경. 예전에 모 여행프로에서 출연자들이 눈이 잔뜩 내려 쌓인 전망대에서 벌벌 떨며 구경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눈이 쌓인 골목골목에 가로등이 비쳐서 약간은 몽환적인 풍경이었는데 내가 갔던 시즌에는 당연히 눈구경은 할 수 없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낮에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했을 정도로.
야경을 꾹꾹 눈에 눌러 담고 다시 버스를 타는 쪽으로 내려왔다. 로프웨이를 탔다면 건물 내부로 이동해서 기념품샵을 구경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건물 외부의 버스정류장을 이용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야경을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내려가는 사람이 한 번에 몰리면 버스에서 또 서서 내려가야 할 것 같아서 조금 아쉬운 채로 일찍 내려가기로 했다. 이미 줄을 길게 서있었는데 버스 한 대를 먼저 보내고 그다음 버스에서는 자리에 앉아 내려올 수 있었다. 이날도 하루종일 걸어 다니면서 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앉아갈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앉은자리가 버스기사님 바로 뒷자리였는데 요금표가 상당히 복잡하고 재미있어서 계속 그것만 보았다. 중학생 이상은 대인, 초등학생은 소아, 1세 이상 소학교 미만은 유아(어린아이), 1세 미만은 유아(젖먹이 아이)로 나누고 구성에 따라 요금제를 나누어두고 그 구성에 따라 요금제를 또 세분화해 두었다. 어린아이가 많은 도시도 아닐 것 같은데 이렇게 디테일하게 구분하는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이것도 다 좌석에 앉아있었던 덕분에 다리에 여유가 있어서 눈에 들어왔지 싶다.
저녁을 먹지 못한 상태라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 도시락을 샀다. 양념된 돼지고기 덮밥인데 일본에서 여행 중에 밥 먹을 시간이 안될 때 종종 먹는 메뉴다. 식사와 함께 홋카이도산 벌꿀유자사와 한 캔을 곁들이니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태블릿으로 영화 한 편을 보며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배가 조금 불렀는데 공짜로 준다는 야식 라멘이 궁금해져서 시간에 맞추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직접 재료를 하나씩 담아 먹는 시오라멘이었는데 국물맛이 제법 좋았다. 시오라멘이 내 취향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라멘집에서 소유라면 말고 시오라멘을 먹어봐야지 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그동안은 돈코츠라멘이나 소유라멘만 주야장천 먹었고 시오라멘은 뭔가 심심할 것 같아 먹지 않았었는데 반성했다.
야식까지 때려넣고 올라와 두 번째 목욕을 마친 후 침대에 누웠다. 계속 토굴 같은 2층침대만 사용하다가 오랜만에 넉넉한 이불과 빵빵한 베개를 만나니 오히려 잠이 안 왔다. 그냥 푹신함과 뽀송함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여행이 이제 하루 반나절 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여행에는 돌아갈 때가 있게 마련인데 나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여행기간이 열흘로 늘어도 한 달로 늘어도 이 마음은 똑같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