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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네시스 Oct 27. 2023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15

천개의 바람이 부는 오누마 국정공원

오랜만에 넓은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던 덕분에 아침에 꽤나 상쾌하게 기상할 수 있었다. 잠도 다 깨지 않은 채로 욕조로 달려가 뜨끈한 물에 반신욕을 하면서 다리의 피로를 한번 더 풀어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숙소를 나가기가 싫었다. 체크아웃 시간은 한참 남아있는데 무슨 욕심으로 이렇게 아등바등 돌아다니나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힘들다고 쉬어버리면 한국에 돌아가 보지 못한 곳들을 한참이나 더 아쉬워하게 된다. 하루만 더 악바리 근성으로 버티기로 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숙소를 나섰다.   



편안한 숙소풍경
숙소가 하코다테야마 뷰였다.



다시 숙소를 이동하게 되는 것이라서 두고 가는 것 없이 짐을 싹 다 챙기다 보니 가방이 묵직했다. 사실 삼각대며 카메라 렌즈들이며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서 이미 묵직한데 가는 곳에서 조금씩 기념품들을 챙기다 보면 무게가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노면전차를 타러 가는 길에 등짝이 묵직하게 느껴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게 다 내 업보구나."라는 것이다. 사진 좀 멋지게 건져보겠노라며, 나중에 찾아보고 추억에 잠길 것이라며 챙기는 것들이 나의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사실 렌즈는 거의 하나만 줄창 쓰고 기념품은 조금만 지나면 찾아보지 않게 된다. 이것들을 들고 다니지 않았을 때의 홀가분함을 알지만 '만에 하나 나중에 쓸 수도 있어'라는 것이 나라는 인간의 고통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 고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내가 갑자기 무소유에 눈떠 모든 것을 훌훌 버리게 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 그래도 발걸음이 절로 나아갔다. 이틀차의 하코다테에서 만난 새파란 하늘. 사방으로 뚫린 도로가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공기. 홋카이도의 청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역으로 가는 길에 만난 '오시마신용금고'의 간판을 보면서 "오지 마 신용금고"로 보인다며 셀프 아재개그를 치고 사진을 찍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출근시간대의 하코다테역에는 여행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더 많아 보여 우쭐하게 여유를 즐겼다. 나치고는 꽤나 늦은 시간인 9시가 다되어서 출발하는 오누마공원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했다. (그 열차가 가장 빨랐다.)   



오시마신금, 돈부리요코초, 하코다테역 풍경



이른 아침이지만 열차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정석을 예약하여 창가 쪽 좌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멀리 평평한 지형에 볼록 솟아오른 하코다테야마의 모습을 보며 '내가 어젯밤 저곳에 있었지.'라는 추억에 잠겼다. 하코다테산은 가만히 있는데 앞에 있는 나뭇잎들만 재빠르게 지나가 내가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그 멋졌던 야경을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열차는 오누마공원에 접근하고 있었다.


복도 건너편 쪽 창가에 무언가 삐죽한 산이 눈에 들어오면서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고마가다케 산이었다. 묘하게 뾰족한 그 산봉우리는 아마도 점성이 높은 용암이 갑작스레 폭발하면서 생긴 형태이지 싶다. 예전에 호박엿을 먹던 때가 생각났다. 말랑말랑하게 해서 좌우로 쭉 잡아당기면 가운데 부분이 가늘어지다가 뚝 끊어져 뾰족한 형태가 되지 않던가. 딱 그렇게 만들어졌지 싶은 모양이었다. 일본이 화산의 나라라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열차 안의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창문에 매달려 그 산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그 순간 모두 한마음이었지 싶다.  



멀어지는 하코다테야마
고마가다케



오누마공원은 원래 전날 방문하기로 생각했던 곳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공원을 걸어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다음날로 미뤘던 것인데 운이 좋았는지 날씨가 아주 짱짱했다. 새파란 가을하늘까지는 아니라도 군데군데 푸릇한 하늘이 보이는 좋은 날씨였다. 오누마공원 역에 내리니 자전거를 렌털하는 분이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자전거는 호수를 타고 크게 돌아보는 코스고 도보로는 호수 내부의 작은 섬들을 걸으며 구경할 수 있었다. 자전거도 타고 돌아보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조금 애매하기도 했다. 자전거로 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걸어서 볼 수 있는 공간에 차이가 있어서 조금 고민을 하다가 여유 있게 걸으면서 구경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오누마공원은 1958년 국정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공원 같은 개념인 듯싶다. 오누마, 고누마, 준사이누마 3개 호수가 근처에 있다. 그 중 오누마 호수가 가장 큰데 둘레가 24km에 이른다고 한다. 여의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 대략 8km 정도 되니까 그 세배쯤 되는 셈으로 상당히 크고 넓은 호수다. 오누마호수에는 126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몇몇 굵직한 섬들을 16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다양한 위치에서 호수를 관람할 수 있었다. 마침 가을에서 겨울로 도착하는 길목에서 방문했는지라 울긋불긋한 낙엽이 나무 위에도 바닥에도 잔뜩 있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푹신한 낙엽을 원 없이 밟을 수 있었다. 날씨가 워낙 좋고 바람도 별로 없어서 호숫가에는 아주 잔잔한 물결만이 일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도 많지 않아서 정말 고요하고 호젓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오누마 국정공원과 고마가다케산
오누마호수 풍경
전날의 비로 젖은 낙엽들



오누마공원을 걷던 중 바닥에서 표지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센노카제니낫데)'라는 명곡이 탄생한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내가 대중문화에 조금 취약해서 당시에는 그 노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귀국한 후 노래를 찾아 들어보았다. 죽은 이의 시점에서 산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절절한 노래가 가슴에 와닿았다. 우리나라에선 팝페라 가수인 임형주 씨가 불러 유명해졌고 방송에서 사람들을 추모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쓰이는 듯했다. 내가 처음 들은 곡이 일본 아라이 만의 버전이라 그런지 그 노래가 가장 사무치게 들린다. 


본래 가사는 작가 미상의 영문시를 번안한 것으로 작곡가 아라이 만이 여기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친구 아내가 병으로 죽자 추모 문집이 나왔는데 거기에 이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읽은 아라이 만이 오누마에 있던 별장에서 호숫가에 불어오는 바람에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언급한 바 있어 호수에 작은 표지로 기록된 듯하다. 아라이 만도 2021년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오누마의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날고 계시지 않을까.  


私のお墓の前で 泣かないでください

와타시노 오하카노 마에데 나카나이데 쿠다사이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 주세요


そこに私はいません

소코니 와타시와 이마센

그곳에 나는 없어요


眠ってなんかいません

네뭇테 난카 이마센

잠들어 있지 않아요


千の風に

센노 카제니

천 개의 바람이


千の風になって

센노 카제니 낫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秋には光になって 畑にふりそそぐ

아키니와 히카리니 낫테 하타케니 후리 소소구

가을에는 빛이 되어 들녘에 내려 비춰요


冬はダイヤのように きらめく雪になる

후유와 다이야노 요니 키라메쿠 유키니 나루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돼요


朝は鳥になって あなたを目覚めさせる

아사와 토리니 낫테 아나타오 메자메사세루

아침엔 새가 되어 당신을 깨울게요


夜は星になって あなたを見守る

요루와 호시니 낫테 아나타오 미마모루

밤에는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봐요


私のお墓の前で 泣かないでください

와타시노 오하카노 마에데 나카나이데 쿠다사이

나의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 주세요


そこに私はいません

소코니 와타시와 이마센

그곳에 나는 없어요


死んでなんかいません

신데 난카 이마센

죽은 것이 아니에요


千の風に

센노 카제니

천 개의 바람이


千の風になって

센노 카제니 낫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千の風に

센노 카제니

천 개의 바람이


千の風になって

센노 카제니 낫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あの大きな空を 吹きわたっています

아노 오키나 소라오 후키 와탓테 이마스

저 넓은 하늘을 날아 건너고 있어요




-가사와 번역은 나무위키에서 발췌-  

천개의 바람이 되어 명곡 탄생지  


천개의 바람이 되어 명곡 탄생지 표지석



다음에 이동할 열차시간을 정해두었던 터라 남은 시간을 2로 나누어 최대한 갈 수 있는 만큼 가본 뒤에 돌아오기로 했다. 시간이 한정적일 때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하는데 가면서는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시간이 더 걸리지만 돌아오는 길은 곧바로 돌아오게 되어 교통편에 탑승하기 전에 넉넉하게 돌아올 수 있다. 한 시간 남짓 호수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며 나도 열심히 영감을 긁어모았다. 차분한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구경을 할 때는 섬의 다리로 돌아다니고 돌아올 때에는 열차 선로 쪽 곧게 뻗은 길로 왔다. 

역 근처에 돌아오니 시간이 생각보다 넉넉하게 남았다. 고민을 하다가 출출하기도 하고 해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 먹기로 했다. 전날 비도 온 데다 11월의 홋카이도는 생각보다 쌀쌀한 편이라서 아이스크림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와 간단한 디저트를 판매하는 MORI라는 통나무집 같은 곳이 보여서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계속 먹을 기회를 놓치고 있는 유바리 멜론이 들어갔다고 하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있어 시켰는데 메로나 생각이 많이 났다. 물론 훨씬 부드럽고 녹진하지만 어쨌든 향 자체는 메로나였다. 가게 앞의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먹고 있는데 가게에서 방금 주문을 받으셨던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추운데 들어와서 드세요." 


사실 일본에서 먼저 나서서 친절을 베푸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부탁을 했을 경우에는 친절함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정말 많았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은 잘 없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은데 사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이 없어 보이는 느낌도 있다. 혼자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참견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화목난로에 땔감이 타고 있어 공기가 훈훈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가게가 정말 예쁘다는 둥 너스레를 떨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언젠가 다시 홋카이도를 찾게 되면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 장소가 아닌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은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행복이다.   


모리 아이스크림 가게
화목난로
오누마 국정공원역 풍경
오누마 국정공원



사실 5일 차의 여행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도야호수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도야호수는 오누마에서 노보리베츠로 가는 길 사이에 있다. 우스산과 쇼와신잔에서 화산지형을 구경하고 넓은 화구호인 도야호수를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도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택시까지도 고려는 해봤지만 앞서 니세코에서 한번 택시를 찾지 못해 크게 데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언젠가 차를 렌트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도야호수를 지나쳐 노보리베츠로 직행하는 코스로 결정했다. 도야역을 지나치면서도 포기가 안되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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