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가득한 노보리베츠
마침내 열차가 노보리베츠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로 유명하다고 했는데 의외로 내리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의외로 황량한 관광지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지옥계곡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아마도 사람들이 오전 중에 많이 들어간 것이던가 단체 버스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던가 하지 않았나 싶다. 왠지 사람들이 버스표를 판매하는 자판기에서 줄을 서 있기에 나도 구입해야 하는 것인가 싶어 얼른 사두었다. 안심하려고 사둔 표인데 버스를 타고 산기슭을 구불구불 올라가면서 혹시 맞지 않는 금액권을 구입한 것이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선 추가금을 내면 되기는 할 텐데 내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유로 생기는 실랑이가 불안한 것이다.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으면서도 항상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MBTI에서 N타입이 걱정을 사서 한다더니 딱 내가 그 꼴이다.
노보리베츠역 출구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곰 목상과 커다란 곰 박제가 있었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곰은 귀여운데 곰 박제는 위압감이 들었다. 내가 살면서 곰에 대해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고작 곰돌이 푸 정도가 전부였다. 곰이라기보다는 곰돌이라는 모양새로 곰을 인식하고 있던 내게 거대한 실물 곰 크기의 박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코카콜라의 북극곰이나 각종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조금은 우둔하고 귀여운 곰들을 보며 커왔을 것이다. 그 결과 사실 그들이 엄청나게 강력한 맹수라는 사실은 종종 잊고 살게 된다. 일본에서는 종종 곰에 의해 사상자가 나오는데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시는 곰들을 귀엽게만 보기 힘들어진다. 마침 여행을 가기 전에 곰과 관련된 사건을 유튜브로 다수 접할 수 있었는데(하필이면 홋카이도 여행을 검색하다가 알고리즘이 나를 흉포한 곰의 세계로 이끌었다.) 하나같이 섬뜩한 이야기뿐이었다. 노보리베츠에는 곰목장이 있어서 야생에서 포획된 곰들을 사육하는 시설이 있다. 로프웨이를 타고 오르면 곰목장의 관람이 가능한데 나는 언제부턴가 동물원에 가면 동물들이 신기하지 않고 가엽게 여겨지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목장은 가보지 못했다.(그렇지만 관람을 해야 목장의 곰들도 간식이라도 한 끼 얻어먹게 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도 가엽고 참 결심이 쉽지가 않다.) 불곰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물원을 보면 항상 생각나는 시가 있어 잠시 소개해보고자 한다.
부산에 눈이 내리면 - 손택수
부산에 눈이 내리면 북극곰이 운다
북극곰이 제일 먼저 동물원 쇠창살을 흔들며
으엉으엉 눈이 내린다고 운다
향수병 같은 거야 잊은 지 오래지만
제 똥을 짓뭉개고 앉아
우울한 덩치로 늙어가는 짐승의 슬픔을 과연
누가 알겠는가 눈이 내리면
그도 내심 몸속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콧김이 송골송골 맺힌 코를 벌름벌름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사무쳐서
북쪽을 향해 머리를 짓찧고 싶어지는 것이다
눈이 귀한 남쪽 항구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부산에 눈이 내리면
하나밖에 없는 동물원에 눈이 내리면
북극곰이 정말 서럽게 운다
긴 목에 목도리 하나 없이 겨울을 나야 하는
기린은 이 겨울이 딱 질색이겠고
낙타도 코끼리도 시큰둥 썰렁한 우리 안에 들어가
전기스토브를 쬐며 덜덜 떨고 있겠지만
눈이 내리면 북극곰 눈에는 모두가
제 혈족으로 보이는 것이다
흰 털가죽 뒤집어쓴 북극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 부산에 눈이 내리면 나도 따라 울고 싶어진다
흰 털가죽 덮어쓰고 울타리 밖에 갇혀서
으엉으엉 울타리 흔들고 싶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로프웨이를 타고 곰목장에 들어가야(심지어 로프웨이와 곰목장 입장료는 분리징수되지 않음) 굿타라호수 전망대에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차를 몰았다면 호수 가까이까지도 가볼 수 있지만 나는 대중교통으로만 이동하는 뚜벅이였기 때문에 그리 할 수 없었다. 5일 차의 일정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계획을 짜면서 힘들었던 기억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아쉬움을 안고 곰 박제를 보고 있자니 버스가 도착했다.
노보리베츠역에서 지옥계곡으로 이동하면서 커다란 도깨비 상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머리에는 뿔이 달려있고 입에는 커다란 송곳니가 있으며 호랑이 무늬의 가죽 반바지를 입고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어렸을 적 읽었던 전래동화에 그려져 있던 모습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구전설화 속 도깨비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나라 구전설화에서는 도깨비에 뿔이 있다거나 하는 언급은 거의 없고 송곳니 이야기는 아예 없으며 가죽바지로 대표되는 복장이라던가 하는 것이 정형화되어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도깨비의 외형적 특성은 일제강점기에 전달된 것으로 일본 스타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야기를 살펴보면 성격도 꽤나 다른데 일본 도깨비(오니)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괴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나라 도깨비는 잡스런 귀신으로 장난이나 내기, 씨름 등을 좋아하는 인간 친화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홋카이도에서의 도깨비는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도깨비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두려워하던 것에서 파생된 개념이라는 설이다. 피부가 상대적으로 붉고 털이 많으며 원시적인 복색을 하고 있던 아이누족과 다투던 일본 본토인들이 그 두려움을 형상화한 것이 도깨비라는 설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우리나라 도깨비 하면 공유라는 배우의 이미지로 대동단결 된 것 같고 되려 전래동화 속 도깨비의 이미지는 희미해져 가는 중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부터 도깨비하면 공유부터 생각이 나니 말이다.
산골짜기 길을 구불구불 타고 오르니 갑자기 커다란 건물들이 잔뜩 나타났다. 노보리베츠는 홋카이도 개발이 이뤄지고 나서야 온천도시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후쿠오카의 구로카와 온천이나 유후인 같은 전통적인 온천마을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온천 리조트단지의 형태를 띤다. 기본적으로 10층 이상 되는 거대한 건물들이 쿠스리선벳츠 개천 좌우로 수두룩 빽빽하게 건설되어 있어 전문 관광단지라는 느낌을 팍팍 풍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악산 대명리조트 같은 건물들이 쭈욱 늘어서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깔끔한 설비로 온천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지만 나 같은 가난뱅이 여행객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애초에 1박에 2만 원도 안 하는 숙소에 묵으면서 돌아다니는 여행인데 이런 리조트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 주머니가 넉넉해지면 그때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보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노보리베츠 온천을 찾은 이유는 이 거대한 리조트단지 너머에 있는 오유누마와 오쿠노유라는 천연 온천호수, 그리고 지옥계곡(지고쿠다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보리베츠는 아이누어로 색이 짙은 강을 의미한다고 한다. 투명하지 않고 혼탁한 색을 보이는 온천수이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노보리베츠 정류장에서 높은 곳으로 계속 도로를 타고 걷다 보면 "오유누마천 천연족탕"이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나온다. 졸졸 흐르는 개천 옆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르면 데크에 방석이 놓여있어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이 나타난다.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서 발을 한번 담가보고 가려고 했는데 아직 피로가 쌓인 것도 아니고 해서 오유누마 호수까지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여기서도 다시 앞선 교훈을 상기시켜 본다. 눈에 보였을 때 해야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유누마를 보고 지옥계곡까지 감상하면 족탕을 멀리 빙 돌아가는 코스가 되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서 발을 담그기가 쉽지 않다. 가능하더라도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일인 셈이다. 다음에 이곳을 찾는 분이라면 지옥계곡을 먼저 보고 온천호수를 본 뒤에 샛길로 내려와 피곤한 다리를 족탕에 담가주는 것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이렇게 샛길 위주로 된 코스를 이용하기 어렵다고 하니 이 부분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온천이 흐르는 산 자체는 가끔씩 계란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의 여느 산자락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풀이 자라지 못하고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구멍들이 나타난다는 점은 꽤나 큰 차이라고 하겠다. 산을 오르는 중턱에서 그런 곳을 하나 발견했는데 예전에는 관람이 가능했던 곳이지만 현재는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놓은 상태였다. 증기의 힘이 세져서 간헐천처럼 솟구치게 되었다던가 혹은 주변 땅이 물러져서 위험해졌다던가 하는 이유에서 막아둔 것이리라. 나무로 어설프게 막아놓은 담장 너머의 풍경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역시나 안전이 제일이다. 호기심은 털어두고 찬찬히 산길을 오르며 숨이 점점 가빠올 때쯤 깔끔한 도로가 나타났다.
사실 차를 몰고 왔다면 오유누마 근처에 주차장이 있기 때문에 이곳까지 논스톱으로 도착했을 것 같다. 버스도 조금만 더 힘내서 여기까지 와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긴 하다. 그래도 고생하며 힘을 쓰다가 멋진 풍경이 나타났을 때 기운이 나는 경험은 도보로 걸어본 사람만 아는 감정이리라. 도로를 따라 조금 걷고 있자니 갑자기 넓은 공간에 터키석 빛깔의 호수가 나타났다. 그 주변으로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고 곳곳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화산이 존재하는 우주 어딘가가 있다면 이런 풍경이지 싶었다. 온천수가 모여있는 호수기 때문에 물 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고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수증기가 하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일본의 여러 화산지형들을 구경하러 다녔지만 이는 노보리베츠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