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삿포로로
경치에 압도되어 한참을 구경하고 있자니 해가 많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해가 일찍 지는 홋카이도였기도 한 데다 심지어 산자락이어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후의 그림자가 매서웠다. 오유누마 옆의 오쿠노유를 잠깐 구경하고 그 옆의 전망대를 통해 지옥계곡으로 가는 코스로 이동했다. 계단도 잘 되어있었지만 어쨌든 등산로에 가까운 코스라서 선선한 날씨에도 등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에서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떴다.
'메모리가 부족합니다.'
나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모리가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고 여분의 메모리는 가방의 무게를 덜어주고자 노보리베츠역의 코인로커에 털어놓고 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배터리였다. 5박 6일의 일정을 위해 2개의 배터리를 챙겨 왔는데 3박 차에 벌써 새 배터리로 교체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8박 9일의 일정이었어서 이번 6일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당시에는 카메라 RAW 파일 보정을 하지 않던 시절이라 저장도 JPG로만 했었고 그래서 배터리를 덜 먹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RAW+JPG 모든 방식으로 저장하게 해 두었는데 이것이 배터리를 훨씬 더 먹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3일 차부터는 배터리를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쓰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배터리가 아닌 메모리가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마주하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아직 오유누마의 전망대 풍경이나 지옥계곡을 한참 더 찍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프리뷰를 보며 심하게 망친 사진들을 골라내어 지우기 시작했다. 사실 프리뷰를 보는 행위 자체가 카메라의 배터리를 소모하기 때문에 나는 두배로 초조해졌다. 그렇게 100여 장을 골라내 지우고 다시 산길을 걷다가 한번 더 메모리 부족 메시지를 보고 또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원래 잘 찍은 사진이던 아니던 모두 저장해 놓는 나에게 어떤 사진을 골라서 지운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당혹과 힘듦을 거듭하며 걷다 보니 지옥계곡이 보였다.
이쯤 되고 보면 나는 일본에서 지옥을 찾아다니는 인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첫 도쿄 방문에서는 하코네의 오와쿠다니(별칭이 지옥계곡)에 갔었고, 이후 나가사키에서는 운젠지옥, 벳푸에 있는 7개의 지옥온천을 순례했으며 이 노보리베츠에서 다시 지옥계곡을 찾았다. 유황증기의 독성 때문에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벌거숭이 땅에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불지옥 같은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옛사람들이 지옥을 떠올린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코를 찌르는 유황냄새도 분위기를 더한다. 오랜 기간 분출된 증기 속의 유황성분이 돌에 들러붙어 곳곳에 노랗거나 초록색의 얼룩으로 남아있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규모가 크다면 더욱 그렇다. 노보리베츠의 거대한 지옥계곡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생각을 하겠지만 아마 그중에 하나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야겠군.'이 아닐까.
다시 버스를 타고 노보리베츠역을 돌아와 열차를 탔다. 이제 홋카이도에서의 여행이 진짜로 끝이 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도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 더 이상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윽고 열차는 삿포로역에 도착했고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상당히 차게 느껴졌다. 지난 5일간 바람막이 점퍼 하나로 아무런 문제 없이 보냈는데 비가 온 뒤라서 그런가 아니면 11월이 되고도 며칠이 지나서 그런가 갑자기 확 추워진 것이다. 애초에 홋카이도여행을 계획하면서 내가 들고 간 옷이 추워진 날씨를 커버하지 못하진 않을까 고민하긴 했었다. 그렇다고 두툼한 옷을 한벌 더 넣으면 안 그래도 버거운 짐이 버거킹짐이 된다. 그래서 우선 가진 옷을 껴입되 그래도 안 되겠으면 한 벌 사는 것으로 생각해 두었다. 현지조달은 여행의 꿀팁이다. 벌벌 떨면서 일단 숙소로 향했다. 스스키노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저렴한 도미토리식 호텔이었는데 가는 길에 저녁식사까지 해결할 요량이었다.
홋카이도에서 유명한 음식을 들자면 양고기를 철판에 구워 먹는 칭기즈칸, 그리고 각종 야채와 고기를 넣고 국물이 자작하게 끓여낸 스프카레가 있다. 물론 다른 맛있는 음식점들도 많지만 홋카이도만의 특색을 느껴보자면 이 둘만한 것이 없다. 칭기즈칸을 먹는 것을 두고 꽤나 오래 고민했는데 거의 단벌옷에 가까운 여행자라 고기냄새가 배는 것이 좀 신경 쓰이기도 했고 양에 비해 가격이 센 편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언젠간 좀 더 넉넉한 여행도 해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가성비를 따지는 과정까지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아무튼 그렇게 칭기즈칸을 포기하게 되고 스프카레만은 꼭 한번 먹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다만 홋카이도에서 5일 차가 되는 동안 도무지 시간을 내서 저녁을 먹을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는데 마지막 날 드디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맞았다.
스프카레를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가게 중 하나인 스아게 플러스를 찾았다. 9시 30분까지 영업을 한다는데 8시 정도에 도착을 했는데도 이미 줄이 엄청났다. 가게는 2층에 있는데 1층 계단까지 사람들이 빽빽하게 줄을 서 있는 상황이었다. 1층 가게의 문 앞까지 북적거려서 그 가게 주인장은 짜증이 좀 나지 싶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밥을 먹으러 온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괜스레 주눅이 조금 들었지만 그래도 스프카레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그것을 이겨냈다. 한참 줄을 서 있자니 종업원이 음식 메뉴표를 대기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일본어 메뉴판이라 혹시 한국어나 영어가 없는지 물어봤더니 대답 없이 메뉴표를 회수해 갔다. 일언반구 없이 일어난 일이라 종업원이 화가 났나 싶었는데 잠시 뒤에 한국어 메뉴판을 들고 왔다. 바빠 죽겠는데 메뉴판을 또 들고 와야 하니 정신이 없긴 했겠지 싶었다. 이런 정도로는 나의 멘털을 흔들 수 없다. 게다가 잠시 뒤에 나를 자리로 안내해 주시는 분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가게에 대한 인상은 좋았다.
혼자 식사를 하는 손님들은 창문가에 난 자리로 안내를 해주는 듯했는데 다행히 양 옆에도 혼밥을 하러 오신 분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치킨스프카레를 시키고 밥에는 치즈를 얹는 옵션을 더했다. 감자모찌가 별미라고 해서 그것도 같이 시켰다. 먼저 나온 것은 감자모찌였다. 같이 나온 생맥주와 함께 쫀득한 감자떡의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밥과 카레가 나왔다. 사실 나에게 카레란 꽤 오랜 시간 동안 오뚜기 삼분카레였다. 그러다가 부산의 모루식당이라는 곳에서 요리로 나오는 카레의 맛을 알게 된 이후로는 집에서 고형카레를 이용해 생크림까지 넣어 카레를 만들어먹는 등 점차 카레 입맛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이날 스아게 플러스의 스프카레는 향신료의 내음이 은은하게 퍼지는 해장국을 한 그릇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쌀쌀한 날씨에 계단에 서서 힘들게 기다리던 그 시간들을 보상해 주는 따스한 맛이었다. 특히 피망, 감자, 당근 등 홋카이도산 채소들의 맛이 정말 좋았다. 가지를 정말 싫어하는 내게도 카레향을 듬뿍 머금은 촉촉한 가지는 예외적인 맛이었다. 맥주까지 마셔서 배가 터질 듯이 불러왔다. 살짝 알딸딸한 기분으로 숙소로 향했다. 카레와 맥주 덕분이었을까 몸이 조금 훈훈해져 있었다.
사실 3년쯤 전에 교토에 다녀오면서 도미토리식 숙소는 이제 그만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이가 있어서 체력회복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결국 이번 홋카이도에서의 마지막 숙소도 도미토리였다. 어차피 누워서 자는 것이 전부인데 큰돈을 쓰기 아깝다는 생각을 계획단계에서 하지만 결국 넓은 곳에서 편하게 자는 것은 돈값을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느낀다. 여행지에서의 생각을 계획단계에서 깨달으면 참 좋은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것이 나란 인간인 듯하다. 홋카이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숙소는 수건 하나 무료로 제공되지 않는 정말 저렴한 곳이었고 나무판자로 조립된 닭장 같은 2층의 칸들에 잠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첫날에 묵었던 숙소처럼 차라리 2층침대로 되어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저렴하다고 무턱대고 숙소를 잡은 나 자신을 잠시 한탄하던 찰나 카운터에서 만났던 직원이 내 칸으로 찾아왔다.
"카메라를 카운터에 두고 가신 것 같습니다."
바우처와 여권을 꺼내기 위해 잠시 카운터 앞에 내려둔 카메라를 잊고 그대로 올라왔던 것이다. 일부러 들고 와준 정성과 그 친절한 표정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나에게 이 숙소는 꽤 괜찮은 숙소라는 결론으로 남았다. 설비가 부족해도 그것을 커버하는 친절함과 배려가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숙소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뜨끈한 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니 잠이 소록소록 왔다. 마지막 날에도 반나절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어서 계획을 세워둔 차였다. 엄청나게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짐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