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다가 청크린을 풀었나? 청의호수
다시 계단을 내려와보니 어느새 관광객이 많아져있었다. 일찍 와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음 행선지인 청의호수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비에이는 유명한 관광지이긴 하지만 대중교통은 촘촘하게 운영되는 편은 아니다. 흰수염폭포나 청의호수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간격이 2시간 이상인 경우가 많았고 그 반대편(각종 이름 붙은 나무들을 구경할 수 있는)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아예 없었다. 흰수염폭포에서 청의호수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걸어가 보기로 했다. 구글지도에서 약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했으니 내 느린 걸음으로는 50분 정도 걸릴 터였다.
청의호수로 가는 길에 인도가 생각보다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외진 곳에는 인도가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니세코라던가 니세코라던가...) 이곳은 처음부터 끝가지 인도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주변에 숲은 울창하고 하늘은 푸릇푸릇해서 걷는 느낌이 좋았다. 이따금씩 낙엽이 쌓인 곳을 지나가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또 좋았다.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서 정말 한가로이 평탄한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스머프의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랄랄랄랄랄라 랄라랄랄라~ 그 표지판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곰을 주의하라는 푯말이 있었다. R元年은 일본의 연호인 레이와를 의미하는 것일 테니 그 원년인 2019년에 곰이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홋카이도지역은 야생곰이 서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과 2년 전에 삿포로시내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친 사례도 있다. 마침 나는 유튜브에서 홋카이도를 검색하던 중 알고리즘의 마법으로 곰 사건에 대한 영상을 여러 편 보게 되었다. 100여 년 전에 사람을 해친 곰 이야기도 있었지만 2016년에 발생한 사건도 있었다. 북극곰을 코카콜라로, 곰을 곰돌이 푸로 배운 나에게 그동안의 곰은 귀염둥이 곰돌이들이었지만 현실의 곰은 재앙 그 자체였다. 곰이 상당히 집요하고 새끼를 건드리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는 것도 영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저 표지판은 나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여럿이 다니면 곰이 알아서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나 홀로 여행객인 데다 키도 작아서 위압감도 없지 않은가. 그때부터였다. 푸르던 하늘이 시퍼렇게 보이고, 낙엽 밟는 소리가 곰발자국 소리로 들려 놀라게 되고, 차가 많이 지나다니지 않아 고즈넉하던 그 길이 도움을 요청할 사람 하나 없는 스산한 길이 된 것은. 예전에 봐둔 영상에서 곰이 종소리를 무서워한다고 해서 현지인들은 가방에 종을 매달고 다닌다고 했다. 갑자기 없는 종을 만들어낼 순 없는 법이니 유튜브에서 급하게 종소리라도 찾아 재생해 놓을까 했는데 어디서 범종소리만 잔뜩 나와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나의 하산길은 저 푯말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쥬라기공원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랩터를 피해 도망 다니는 주인공...
그렇게 벌벌 떨며 길을 내려가는데 "백금부동의 폭포" 표지판이 보였다. 사실 이 길을 걸으려고 생각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흰수염폭포와 청의호수 사이에 폭포가 하나 있어 기회가 닿으면 구경해 볼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찾아봐도 정보가 많지 않아서 막상 근처에 가면 길도 없을지도 몰라 가능성으로만 열어두었던 곳인데 표지판을 보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문제는 내가 곰 주의 표지판을 보고 난 뒤였다는 점이다. 백금부동의 폭포는 차도 옆으로 슬쩍 난 샛길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데 숲이 우거지고 땅이 질척거렸다. 뭔가 본격적인 숲이 시작되는 분위기인데 참 곰이 살기 좋은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폭포면 물가인데 물 마시러 곰이 오지 않겠어?) 하필이면 덤불이 우거진 곳이 시컴튀튀하게 곰가죽같이 생겨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어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았다. 경계하는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폭포는 경이로웠다. 낙차가 크다기보다는 계단처럼 되어있는 물길을 따라 흰 거품을 내며 쏟아져내리는 형상이었다. 그 아래로 철철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까지 자연스러웠다. 그 옆으로는 작은 제단이 있어서 지장보살(일본에선 부모보다 일찍 죽은 아이를 구원하는 역할로 알려져 있다.)이 있었다. 마침 골짜기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후광처럼 느껴져서 신비로웠다. 사람이 온 흔적은 있는데 자주 온 흔적은 아니었어서 여전히 곰은 무서웠다.
그렇게 한참을 바들바들 떨며 걸어오던 내 눈앞에 나타난 주차장은 마치 구세주같았다. 이곳에는 사람도 많고, 여기서 내려갈 때는 버스를 탈 것이라서 이제 더 이상 곰은 무섭지 않았다. 역시 곰은 무서운 생물이 아니라 귀여운 생물이지. (직접 마주하게 되지 않는 이상은) 공기마저 안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만든 잘 정비된 주차장이 주는 안정감이란.)
청의호수(아오이이케)는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는 호수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풍경에서 오히려 대자연의 다양함을 느끼게 되는 독특한 장소다. 흰수염폭포(와 그 상류)부터 내려온 온천수에 수산화알루미늄이 들어있는데 이것이 콜로이드화되어 입자적 특성을 띠게 되고 그 결과물로 순수한 물과는 다른 발색을 만들어낸다. 기온, 습도, 구름의 양, 계절 등의 영향을 받아 색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청의호수를 찾는 사람들마다 보았다는 색과 느낌이 다르다. 다만 한겨울에는 호수가 땡땡 얼어서 푸른빛을 볼 수 없다고 하니 그건 조금 아쉬울 것 같다. 애플 매킨토시의 배경화면으로 켄트 시라이시 작가의 청의호수 사진이 사용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 사진엔 호수는 얼지 않은 채 나무만 눈으로 덮여있었다. 시기를 잘 맞춰 가면 겨울풍경이면서도 푸른 호수를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청의호수를 구성하는 물은 자연에서 유래한 것이 맞지만 호수 자체가 원래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88년 진흙 분화로 피해가 발생하자 이듬해인 1989년 콘크리트로 사방댐을 만들었고 물의 일부가 옆으로 흘러 호수를 구성하게 된 것이 청의호수다.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지만 완전 자연발생은 아닌 셈이다. 갑작스레 흘러들어온 물에 곧게 자라 있던 나무들이 고사했고 나목이 되어 호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이 또 묘한 느낌을 준다. 배경으로는 빽빽한 숲과 하얀 설산이 자리 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가을의 청의호수는 주황색 단풍 가득한 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어 눈이 참 즐거웠다.
청의호수에서도 사람이 많지 않아서 여유롭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비수기 특수를 톡톡히 누리는 기분이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어서 청의 호수 주변을 돌아다녔다. 단풍이 가득한 삼림은 그 자체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쭉 뻗은 도로와 함께 사진에 담으니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버스정류장이 하도 단출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잠시 뒤에 보니 예닐곱 명 정도가 줄을 서있었다. 버스를 타는 곳이 확실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도카치다케의 정상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쪽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다. 나에게 활화산은 아무리 보아도 신기한 존재였다.
버스에 타서 다시 비에이역쪽으로 향했지만 비에이역 조금 전에 내렸다. 비에이초리쓰뵤인마에(비에이정립병원 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이 지역의 유명한 맛집인 준페이가 있다. 작은 마을에 줄을 서서 먹는 맛집이라고 찾아본 블로그며 유튜브마다 칭송이 자자했다. 예약이 없으면 먹기 어려운 경우도 태반이라고 했다. 나는 예약 없이 방문했는데 대기가 많으면 기다려볼 생각이었고,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면 다른 곳에서 대충 때우자는 생각이었다. 나 혼자 여행은 밥을 먹는 부분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발생한다. 개인석을 마련해 둔 음식점에서는 빈자리가 곧바로 나거나 하면서 2인 이상 테이블 손님보다 빠른 식사가 가능한 경우가 제법 많다. 물론 1인 식사를 받지 않는 음식점도 있어 그런 점에선 불리하다. 그래도 일본이라는 특성상 후자는 많지 않다. 준페이에는 개인석이 있었는 데다 그날 손님이 많지 않아서 들어가자마자 바로 착석하고 주문을 넣었다. 새우튀김덮밥이 유명한데 새우 옵션에 3마리와 4마리가 있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3마리를 먹고 아쉬울 수 없어서 4마리를 주문했다. 삼총사는 부족하기 때문에 달타냥을 포함해 넷이라는 완성형 숫자를 만들지 않았던가. 4는 아름다운 숫자다. (우리나라는 4층을 F로 표시하긴 하지만...) 다다익선!
새우가 살이 튼실한 것이 먹는 맛이 있었다. 유자소스가 들어간 샐러드와 미소장국, 그리고 겨자소스를 두른 듯 한 매실장아찌로 구성된 식사가 1만5천원 정도였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 할 것 같은 새우 퀄리티였다. 사람들이 모두 소스 이야기를 했는데 적당히 단짠단짠 한 것이 입맛에 딱이었다. 양도 넉넉해서 다 먹고 난 뒤에 배가 제법 불렀다. 후식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시키니 콘 스탠드에 꽂혀서 나왔다. 특히 콘 부분이 바삭한 와플형태로 구워져 있어서 재미난 맛이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까지 먹으니 배에 더 이상 무언가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어떤 블로그에서 보길 준페이에 김연아가 다녀갔다고 했다. 사인이 걸려있다고 해서 두리번거렸는데 카운터 근처에서도 발견할 수 없어 점원분께 혹시 유나킴의 사인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처음에 잠시 못알아들으시는 듯하다가 곧바로 이해하시고 카운터 왼쪽의 벽으로 데려가주셨다. 거기에 김연아의 사인이 있었다. 수많은 유명인들(그러나 나는 누군지 모르는)의 사인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사인. 그리고 일본인 점원이 바로 이해하고 데려다주실 수 있는 그 인지도. 국뽕이 슬쩍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음 일정을 위해 비에이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