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은혜 사이에서
<개인의 신앙적인 내용을 포함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나의 시간은 하나님이 쓰시는 시간이 된다."
한 목사님의 설교 중 이 문장이 마음에 길게 남았다. '하나님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마주하며 나는 지난날의 시간들을 차분히 복기해 보았다.
효율성의 감옥, 크로노스
몇 년 전, 영화치료 연수를 들을 때였다. 진행자는 우리에게 물었다.
"본인의 삶과 지나온 시간에 만족하십니까?"
옆에 있던 한 선생님은 자신은 매사에 최선을 다했기에 삶의 어느 한순간도 후회가 없노라고 말했다. 그 단단한 자기 확신이 설령 그것이 인본주의적인 뿌리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참 부러웠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되돌리고 싶을 만큼 치명적인 잘못된 선택은 없었지만, 조금 더 빨리 결정을 내렸더라면 시간을 덜 낭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나에게는 지난날에 대한 묘한 정죄감이 있었다.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지 못했다는 자책,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문제들 앞에서 느꼈던 무망감. '왜 빨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나.' '왜 그토록 시간을 허비하고, 또 허비당했나.'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물리적으로 흐르는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의 잣대로 나의 젊음을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그 시간들이 내게는 그저 '낭비된 시간'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내면의 문법: '가정법 과거 완료'
나의 시간은 여전히 문법적으로 꼬여 있었다. 과거는 깨끗하게 '완료'되어야 비로소 의미로 충만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될 수 있는데, 내 사고와 정서에는 여전히 '가정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랬더라면..."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과거로부터 닫히지 않은 문장들, 여전히 마음속에서 소란스러운 사건들은 '가정법 과거 완료'처럼 내 삶의 문장에 머물고 있다. 이 미완의 문법은 카이로스의 시간과 자주 충돌한다. 학습된 패배감이나 체념 때문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계획과 예상, 전체를 관망하고 나서야 움직이는 'J(판단형)' 성향인 나에게 이런 불확실성은 참 낯설고 힘겹다. 인생의 길이 명확히 보인다면 좋으련만,
누군가 그랬다. 인생이 명확히 보인다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구경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그 불확실성이 때로는 우울감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내면의 문법을 바꾸려면 그만큼 더 정직하게 어둠을 통과해야 할 테다.
하나님의 문법: 실패조차 품으시는 '완료형'의 은혜
다시 처음의 묵상으로 돌아가 본다. 성령 충만할 때 나의 시간은 하나님이 쓰시는 시간이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허비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조차, 주의 영이 만져주시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으로 재해석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안에서 '가정법'이라는 문법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분의 뜻은 항상 정확한 순간에 이루어지며, 그 일이 발생한 자리에서 온전한 맥락과 해석을 갖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실패로 보이고 낭비로 보이는 순간조차 그분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는 문장을 이어주는 하나의 '절(clause)'로 흐름 안에 포함된다. 무너짐조차도 하나님의 이야기로 포섭되는 은혜.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비밀이다.
내가 시간의 주인 노릇을 하려 할 때 시간은 '허비된 무엇'이 되지만, 하나님께 주권을 내어드리면 그 시간은 나를 늠름하고 당당하게 빚어온 훈련의 시간이 된다. 1년 전, 5년 전의 사진 속 내 모습이 참 어려 보이듯, 나는 그때의 시행착오 덕분에 지금 이만큼 자라 있으니까. 그러니 다시 절실해져도 괜찮다.
아직 완료되지 못한 나, 그 자체가 예배가 되기를
2026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나는 여전히 '완료형'이 되지 못한 많은 기억들과 '가정법'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시간들을 뒤적이며 문장들을 써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 정직한 고백과 서툰 문장들이 언젠가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완료형 시제'로 읽히게 될 날을 믿고 싶다.
‘세월을 아끼라(Redeeming the time)’는 말씀은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 쓰라는 압박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 하나님의 뜻을 채워 넣으라는 초대일 것이다.
여전히 완료되지 못한 나이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이 시간 자체가 하나의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크로노스가 당신의 카이로스에 닿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