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가 이런 곳이었어?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곳 조용한 시골마을로 요양차 내려온지도 거의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냥 산새가 좋았고 조용하고 동네가 예쁘다고 생각해 주거지로 선택했을 뿐이지 어떤 동네인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한 점은 유서 깊은 마을답게 고택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드물지만 관광객들도 한두 명씩 찾아오기도 하고 소방차량, 보수차량들이 정기적으로 한 번씩 방문해서 동네를 꽤 요란하게 만들 때가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마누라가 고생해 만들어놓았다며 반찬들을 챙겨갈 것을 권하기에(맛은 보장 안 됨!) 집에 있는 딸아이 얼굴도 한번 보고 올 겸 겸사겸사 짬을 내어 집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늘 다니던 마을 초입이었지만 그날따라 마을 입구는 근사하게 달라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봉황문(鳳凰門)
"봉황(鳳凰)이라는 상서(祥瑞) 로운 새는 한꺼번에 아홉 개의 알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14세 유연당 김대현 공(悠然堂 金大賢)의 아들이 아홉 분이었는데 여덟째 분은 미성(未成) 때 요서(夭逝)하고 나머지 여덟 분이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그중 다섯 분이 대과에 급제(及第) 하니 인조(仁祖) 임금 께서는 팔영 오계 지미(八蓮五桂之美)라 크게 칭찬하였다. 그리고 국조 고전(國朝古典)에 의하여 유연당공께는 이조참판을 증직(贈職)하고 당시 마을 이름 오묘동(五竗洞)을 오미동(五美洞)으로 사명한 다음 경상감사(慶尙監司)에게 명하여 마을 앞에 里門을 세우고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때의 봉황문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훼손되어 없어져 풍산 김 씨(馮山金氏) 오미마을 후손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처음 세운 후 390년 만에 다시 세웠다.
봉황문 현판은 도림 강당 북편 협문(夾門)에 걸려 있는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그런 거였어?'
'내가 그런 동네에서 살고 있었어?'
'저쪽에도 근사한 고택들이 보이던데 저건 뭘까?'
그 생각에 나의 동네 투어는 시작되었다.
뭔 걱정이랴! 나에게는 8기 통 부럽지 않은 싱싱한 두 다리와 오늘은 유난히 더디게만 흐르는 시간이 있으니!
기분 좋은 날씨는 나의 발길을 더욱 재촉한다.
안동 죽암 서실(竹巖書室)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과 여덟 명의 아들 그리고 후학들이 글을 읽던 곳으로 학문을 낚으며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이서실에서 공부한 유연당의 아들 모두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중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멀리 풍산들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곳에 터를 잡았고, 건물 주변의 대나무와 바위가 마치 서실을 감싸고 있는 듯한 독특한 경관을 보여준다.
건물의 정면과 배면의 중앙 기둥 상부의 건축양식은 서실 건축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며, 가구 부재 및 기타 구조재의 상태는 양호하다.
안동 풍산 김 씨 영감 댁
풍산 김 씨 영감 댁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김상목(金相穆)이 영조 35년(1759년)에 지은 사대부가의 집이다. 처음에는'ㄱ'자형의 안채만 있었으나, 김상목의 손자인 김중우(金重佑)가 순조 26년(1814) 지금의 구조로 크게 지으면서 전체적으로'ㅁ'자형을 이루게 되었다.
'영감'이란 높은 관직을 지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로, 김중우의 아들 김두흠 (金斗欽)이 동부승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이 집을 '영감 댁'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집은 김두흠의 증손자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김정섭, 김이섭, 김응섭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영감 댁은 대문채, 정침, 창고,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당은 정침 뒤쪽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공간을 갖도록 하였다.
*동부승지: 조선시대 임금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 속한 정삼품 관직
**정침: 집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
근전 김재봉 선생 어록비
이 어록비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친 근전(槿田) 김재봉(金在鳳 1891 ~ 1944) 선생의 삶과 뜻을 기리고자 2006년 4월 이곳 고향 오미동 생가 앞에 건립되었다. 선생은 3.1 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54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국가를 되찾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옥고를 치른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대회(1922)에 참가하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으로 민족을 구하려고 나섰다. 특히 신사상연구회와 화요회에 이어,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공산당(1925)을 결성해 초대 책임비서로 추대된 선생은 사회주의 이론을 민족문제 해결의 적절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실천에 옮겼다.
1925년 12월 검거된 선생은 6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31년 11월 출옥하였다. 이후 쇠약한 몸으로 일제에 맞서던 선생은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2월 생가에서 서거하였다. 2005년 우리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어록비 앞면에 새겨진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라는 글은 선생이 극동 민족대회에 제출한 문서에 담긴 자필이며, 이는 항일 투쟁기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목적과 지향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비의 뒷면에는 선생의 연보가 적혀 있다.
안동 허백당 종택
허백당 종택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유연당 김대현이 1576년에 처음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는데 1600년 김대현의 아들 학호 김봉조가 다시 세웠다.
이 집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었다. 정침은 정면 6칸, 옆면 5칸이며 사랑마루 한 칸이 나와 있어 정면이 7칸이 된다. 사랑채는 정침 서쪽에 있는데,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높게 쌓은 단 위에 지었으며 대청과 방으로 이루어졌다. 대청에는 쪽마루를 설치하고 난간을 두었다.
*정침: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
오미 광복운동 기념공원
이 공원은 풍산 김 씨(豊山金氏) 집성촌인 오미마을의 동녘과 서녘을 가로지르는 북경재 언덕에 풍산 김 씨들이 일제 강점기에, 이에 항거한 행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단식으로 순절한 김순흠(金舜欽)을 비롯하여 겨레를 살리는 일에 앞장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이셨던 김응섭(金應燮),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김만수(金萬秀)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라를 구하셨던 김재봉(金在鳳)등 광복운동에 투신한 24분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탑을 건립하고 그분들의 행적과 활약상을 새겨 놓았다.
암울했던 일제로부터 오늘의 풍요를 안겨준 광복 인사들의 잊혀 간 행적을 후손들에게 일깨워 주고 훌륭한 선열들의 영광된 모습을 만세에 기리고 계승하여 후예들에게 산교육의 장을 삼아 미래를 도모코자 2008년 10월 11일 오미마을 문중원들이 국가보훈처와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조그마한 동산을 꾸미고 기념비를 세웠다.
도림 강당
도림 강당은 조선 시대의 학자 김대현(金大賢)과 여덟 아들의 위패를 모신 추원사(追遠祠)에 딸린 강당으로 순조 5년(1805)에 세워졌다. 김대현은 성리학의 대가인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고, 선조 15년(158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민심을 수습하는데 기여하였다. 김대현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덟째 아들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고, 나머지 8형제가 모두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시험인 소과(小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중 다섯 명이 대과(大科)에 합격하자 인조는 이들의 고향에 "5형제가 동시에 급제함은 아름다운 일이로다"하여 '오미(五美)'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강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대청과 온돌방의 지붕을 직각으로 연결하여 '공(工)' 자형을 이루는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붕은 학문에 전념하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향교의 명륜당이나 서원의 강당 등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공간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강당 오른쪽에 있는 추원 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의 일반적인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향병: 각 지방에서 그 지방 사람으로 조직하여 훈련한 병정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이렇게 유서 깊은 동네였다니!
물론 내가 위에서 언급한 장소들은 걸어서 반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코스다.
어떤 곳은 마을 초입에 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뒷산 중턱에 지어져 있어 어릴 적 보물 찾기처럼 솔솔찮은 재미를 선사해준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동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한번 알아보자.
역사란 의외로 멀고 어려운 것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역사의 중심이요 시작이 될 수 있다.
바로 문을 나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