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품격과 멋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소신발언을 해야할 때가 있다.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일이 결정될 때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발언의 후과가 미칠 영향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자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경우 권력자가 생각을 고쳐서 내 의견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직을 내놓거나 괘씸죄를 사서 주변사람까지 고초를 겪게 만들기가 쉽다.
우리 집안의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할아버지에게도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직언을 했다가 화를 입을 위기가 있었다.
1437년(세종19년)에 정극인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며 척불항쟁의 중심에 섰다. 당시 상소문에는 흥천사의 사리전을 창건하라는 임금의 교지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고 세도를 부리던 흥천사 주지 행호를 처형할 것과 승려들의 궁궐출입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정극인은 성균관의 모든 유생의 권당(동맹휴학) 시위를 주도했다. 성균관 동료와 후배들의 대표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홀로 남아 왕을 대면한 자리에서도 “전하께서 불교를 숭신하니 제생들이 중이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은 진노하여 사형으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황희정승이 “전하께서 만약 정극인을 죽이신다면 역사를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세종은 이에 자신의 잘못을 각성하고 행호를 제주로 귀양보낸다.
어떤 임금이라도 정면으로 반기를 든 신하를 인정하면서까지 자신의 말을 번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정극인도 이러한 상황을 알기에 홀로 죽음을 무릅쓰고 성균관에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극인은 37세의 나이로 이미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었으며 나이는 많았지만 출세를 목전에 둔 성균관 학생이었다. 척불항쟁의 기수가 되고 임금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관직을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의 책임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유학자로서 양심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조선조 초기에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이 아직 남아있었을 때 유생에게 척불은 구국의 신념이자 실학이며 진보적 가치였을 것이다.
600년의 시간을 건너 불우헌 극인 할아버지의 18대손인 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급자에게 직언을 고민할 때가 있다. 절대군주 앞에서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상황은 아닐지라도 보직을 내려놓거나 승진욕심을 버릴 정도의 각오는 해야 한다. 특히 승진 인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최종 인사권자를 비롯하여 여러사람이 불편할 얘기를 앞장서서 꺼내는 것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바보 같은 행동일 수 있다.
그렇지만 3년마다 바뀌는 기관장이 본인의 입신양명이나 보은을 위해서 조직을 운영하고 국가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면 누군가는 직언을 하고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조직의 발전을 저해하는 잘못된 결정에 참모들이 모두 입을 닫는다면 평직원이라도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언로가 열려있는 조직이 건강한 조직이며 그러한 회사/기관이 많아질수록 사회적 혁신의 토대가 굳건해지고 발전 잠재력이 큰 나라가 될 것이다.
불우헌 극인 할아버지는 임금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던 고관대작의 비겁함에 같이 숨죽이지 않고 뜻이 맞는 유생들과 연대하고 척불 선봉에 섰던 선조의 호방한 기개는 오늘날 후손들이 본받아 마땅하다.
선조는 벼슬과 권세를 쫓기보다는 신념을 지키고 재야 유림의 존경을 받는 삶을 택하였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류를 누리니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출세가도가 눈앞에 있음에도 임금 앞에서 직언함으로써 애써 위태로워 보이는 길을 선택했고 정치상황에 따라 귀양도 가고 투옥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학식과 덕을 쌓아 재야와 중앙정치를 오가며 81세까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봄에 대한 서정적인 감상 ‘상춘곡’ 그 이면에는 서릿발 같은 기개와 의지를 가진 선비가 서있다. 상춘곡을 다시 읊으며 직계 자손으로서 선조의 삶을 반추하고 내 삶의 자세도 다시 가다듬어 본다.
상춘곡(賞春曲)
정극인(丁克仁)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옛 사람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를 것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송죽 울울리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세우중에 푸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낸가
조화신공이 물물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어니 흥이야 다를소냐
시비에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하여 산일이 적적한데
한중진미를 알 이 없이 혼자로다.
이봐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쟈스라
답청이란 오늘 하고 욕기란 내일 하세
아침에 채산하고 나중에 조수하세
갓 괴여 익은 술을 갈건으로 받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
화풍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낙홍은 옷에 진다
준중이 비었거든 나에게 아뢰거라
소동 아이에게 주가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 맑은 물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는 것은 도화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것인가
송간세로에 두견화를 붙들고
봉두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천촌만락이 곳곳이 벌여있네
연하일휘는 급수를 재폈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샤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을고
단표누항에 허튼 혜음 아니 하니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