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3-B코스
10월이 됐다. 인생 전체가 열두 달이라고 한다면, 나는 아직 열 번째 달까지 도달하지는 못한 느낌이다. 사고 없이 장수하게 된다면 7월 말, 평균수명을 누린다면 8월 중순쯤을 지나고 있지 않을까? 모든 일 년과 십 년씩의 단위에 똑같은 가중치를 부여한다면 남은 생을 감사하게 여기며 알차게 살아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달력은 매달의 농도가 같을 수 없는 것. 전체 열두 달 중 1월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훌쩍 지나가 버리게 되고, 대략 3월까지는 좌충우돌하며 재도전해야 할 노도(怒涛)의 시기이겠다. 반대로 11월 중순쯤부터는 정신과 육체의 기운이 떨어지면서 무엇에 집중해 또렷한 삶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인생의 말기일 것이다. 인생의 10월은 그래서, 한 사람의 내공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유무형의 결과물을 생산할 수 있을 가장 확실한 계절이다. 1월부터 9월까지 쌓아온 지식과 지혜, 기쁘고 아팠던 경험들이 노련함이란 무기와 버무려져 황금빛 수확의 계절을 증명하는 눈부신 기간이 아닐까.
일 년 중 열 번째인 ‘현실의 10월’도 축복을 받은 시기임에 틀림없다. 아직은 한낮에 더운 9월과 본격적으로 스산해지는 11월 사이에서, 추수의 기쁨과 부드러운 가을의 공기를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날들의 집합인 것이다. 오름에 앉아 억새의 군무를 감상하는 계절이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순도 백퍼센트로 떠올릴 수 있는 추억 재생산의 시간이기도 하다.
1월에서 2, 3, 4……, 12월까지, 숫자를 앞에 붙여 한 달씩을 표현하니 어려울 게 없다. 앞의 숫자만으로 대략적인 해당 월의 기후와, 심지어 동식물의 활동성까지 알 수 있으니까. January, February……로 표기되는 달력을 보아도 어렵지 않게 각 달이 연상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잠깐. 아무렇지 않게 쓰고 말했던 것들에게서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인가. 달력 이야기를 하려니 서양식으로 표기된 각 달의 명칭에서 궁금증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유럽 언어의 시조인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나타내는 mono(1)-di(2)-tres/tri(3)-tetra(4) -penta(5)-sex/hexa(6)-septem/hepta(7)-octo/octa(8)-novem/nona/ennea(9)-decem/deca(10)라는 숫자 관련 접두어는, 그리스나 라틴 계열 언어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해당되는 숫자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어를 말하고 한글을 쓰는 우리도 ‘트라이포드’니 ‘테트라포드’라는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옥토퍼스’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연체동물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를 바탕으로 달력에서 각 달의 명칭을 곱씹어보면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 1월 January부터 8월 August까지는 로마의 신들이나 황제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리고 그의 조카의 이름을 땄다고 하니 그렇다 치는데, 9월부터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달들의 연속이다. September는 ‘7’을 뜻하는 ‘septem’이란 접두사가 있으니 7월이 돼야 하는 것 아닌가? 10월인 October는 마땅히 8월에 갖다 붙여야 할 이름이다, 문어는 ‘옥토’퍼스니까. 마찬가지로 November는 9월, December는 12월이 아닌 ‘10월’이 되었어야 한다. 부드러운 사색의 계절이자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10월이 그 명칭부터 원리에서 어긋나 있으니 어찌 찝찝하지 않겠냐는 소리다.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풀려버린다. 당연히 ‘로마’력(曆)을 사용하던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으로 역법 체계를 바꾸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0개의 달로 구성된 하나의 묶음이 12개의 달로 세분화되면서 두 개의 달이 추가되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두 개의 달을 가장 첫 번째, 두 번째 순서로 배치해 원래의 1월은 3월이 되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달들도 두 계단씩 뒤로 미뤄지는 바람에 Septmber인 7월은 9월이, October였던 8월은 10월이 된 것이다. 한 사람의 결정이 후대의 전 세계인들로 하여금 원뜻과는 상관없는 명칭을 쓰게 만들고 있으니…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음이 확실하지 않은가.
무조건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October’다. 오랜만에 제대로 걸어보자고 다짐을 해본다. 평소 걷는 것은 자신 있었으나 작정하고 올레길을 주파해보자 결심하니, 갑자기 무리하는 건 아닌지 약해빠진 걱정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적한 야외라 안심이 되어도, 혹시 모를 코로나19의 매개체가 되는 민폐를 끼치면 안 되겠기에 그중 유명 관광지를 지나지 않는 올레 코스를 택하기로 한다. 수년 전 완주했던 코스이기도 했다. 그때는 올레 축제가 열려 많은 올레꾼들과 함께 했지만, 평소엔 줄지어 가는 올레꾼들을 그리 자주 볼 수는 없는 길, 바로 제주올레 3-B코스였다.
제주올레 3코스의 출발점, 온평 포구
올레 3코스는 A와 B, 두 개의 노선이 있다. A코스는 통오름, 김영갑 갤러리 등을 경유할 수 있는 길이고, B코스는 바다를 옆에 바짝 두고 표선해수욕장까지 내달리는 해변길이다. 그중 B코스를 선택하고 긴 숨을 들이마시며 2만 보(步)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약간은 더운 듯하나 이 정도면 괜찮은 날씨다. 무엇보다 하늘과 바다의 색이 제대로다.
제주 동쪽 성산읍 온평리는 제2공항의 예정지로 발표된 이후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이것저것 다 고려해보니 새 공항은 필요하고, 여러 평가를 거쳐 장소도 나라가 합리적으로 결정했으니 그에 따르라’ 하는 주장에, 의견은 찬반으로 엇갈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많은 지역 주민이 상처를 받았고, 격돌하는 주제와 논리도 이젠 지겨울 따름이다. 다만 그렇다. 한때 연(年) 천5백만 명이 들어와 심한 몸살을 앓았던 제주에, 심지어 5천만 명이 들어오는 상황을 감안해 새 공항을 짓겠다는 것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공항만 늘어나면 되는 일일까? 천문학적 숫자를 수용해야 하니 숙박 시설과 도로, 환경 처리 시설도 그에 맞춰 건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환경단체의 회원이 아니더라도 끔찍한 제주의 미래가 그려지는 게 상식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주민들은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을지, 관광객들은 그런 곳에 과연 오고 싶을지 의문이라는 이야기다.
온평 환해장성(環海長城)
3-B코스의 시작은 환해장성의 안내판과 함께 한다. 삼별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처음 성이 지어졌다고 하는데, 야트막한 부분은 시골집을 둘러싼 여느 담장의 높이와 다를 게 없다. 제주도 내 여러 곳에 환해장성이 있지만. 이곳 온평리의 장성은 아래쪽 계단 부분을 다듬어놓고 그 위에 담을 쌓은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참으로 담의 종류가 다양한 제주 아닌가. 제주의 무덤을 둘러싼 ‘산담’, 목마장 주위에 쌓았던 ‘잣성’,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설치한 ‘원담’, 그리고 이곳 환해장성 등 제주 ‘돌과 담’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쓸모 있는 배움이 될 수 있겠다.
인적이 드문 제주의 바닷가는 금세 사람을 무장 해제시킨다. 파도의 힘찬 움직임과 제주 동쪽 바다 특유의 코발트빛은 나그네의 가볍지만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해준다.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해변 끝 악센트가 되어 있는 등대들은 놓쳐버리기 쉬운 원근감을 첨가하고 있다. 적어도 이 코스의 올레길에선 시선이 바다 쪽으로 고정되는 까닭에 두 다리의 피로함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예상대로 해안도로를 걷는 올레꾼은 나 혼자뿐이다.
올레3-B코스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꼬닥 꼬닥’ 걷는다는 제주올레 이사장님의 표현이 썩 맘에 든다. 호기롭게 첫발을 내디디고 진격의 올레꾼 모드를 유지하다가, 중반을 지나 슬슬 골반이 뻐근해짐을 느낀다. 자가 운송 수단인 두 다리를 내려다보며 한 발자국에 “꼬닥!”, 다른 발을 내디디며 또 “꼬닥!” 소리를 내본다. 야무진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할 뿐이다.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며 한입 한입 꼭꼭 눌러 씹듯, 걸음마다 따라 나가는 몸뚱어리가 신기하고도 고마운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말테다. “꼬닥!” 소리와 함께.
중요한 회의가 있었는지 교육이 있었던 날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아도, 그 장면은 생생히 기억 속에 있다. 순수함 가득한 PD 선배였다. 탁자의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놓인 수십 명분의 인쇄물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배열한 뒤 스테이플러로 찍어내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마땅히 해야 할 질문.
선배는
“아냐, 난 이런 일이 너무 행복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어.”
반 농담이 섞인 대답이었기에 웃음으로 반응했지만, 머리 아픈 일들의 한가운데에서는 스테이플러로 종이를 찍어대는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곰곰이 되돌아보니 그건 내 적성이기도 했다. 똑같은 업무라도 명민하게 지름길을 파악해내지 못하고 무조건 순서대로 하나씩, 한 장씩, 한 명씩…….
따지고 보면,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야말로 올레길 걷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인간상이 아닐까. 꼬닥 꼬닥 걷는 한 걸음마다 70센티미터씩 목표에 가까워지고, 70센티미터 전방의 경치를 보장받을 수 있으니 어찌 도중에 멈출 수 있을 것인가. 걷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손을 들겠다.
신풍-신천 바다목장
처음 3-B코스를 걸었을 때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이 지점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느닷없이 광활한 풀밭이 시야에 펼쳐진다. 진청색 바다와 연두의 풀밭이 어우러져 비현실을 자아낸다. 바다목장이라고 해서 어패류를 양식하는 ‘바다 속의’ 목장이 아니라 익숙한 축산업 용도의 목장인데, 그저 바닷가에 위치해 있을 뿐이다. 초지의 경계가 육지부의 끝까지 형성되어 있어, 절벽 바로 뒤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아도 엉덩이가 푹신할 지경. 저 멀리 소들이 보인다. 청정 제주에서도 특별히 멋진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녀석들은 알고 있을까?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병을 옮긴다는 진드기가 두려워 풀밭에서 ‘뛰논다’는 표현에 주저하게 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뛰고, 구르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보고 싶을 뿐이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3-B코스의 막바지가 가까워진다. 멀리 표선 해수욕장의 드넓은 백사장이 보이면 곧 장도의 결말부에 접어든 것이다. 도중에 포기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거만한 걸음걸이로 백사장을 향해 성큼성큼 보폭을 넓힌다. 오히려 종점을 앞두고 다리에 힘이 붙는 느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란 이런 것일까. 아, 올레길에선 ‘워커스 하이(walkers’ high)’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다.
표선 해수욕장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 백사장이 더 광막해졌다. 바다는 모래사장 수백 미터를 걸어야 그 끄트머리가 보일 뿐이다. 백사장과 해변공원에는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이 적지 않다. 백사장을 지나 코스의 종착점에 도착했다. 3년 전, 깃발을 들고 단체로 목적지에 골인했던 감동은 없을지라도, ‘걷다 보니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다음에 도전할 올레길을 탐색해볼 요량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니, 시계방향으로 제주 한 바퀴를 둘러싼 전체 올레 코스가 특별하게 다가온다. 왜 올레길은 시계방향으로 만들어졌을까?
지인들이 제주를 찾아 바닷가를 드라이브하겠다고 하면 반시계 방향을 추천한다. 여행 일정이 넉넉할 때, 하루는 차의 오른쪽에 바다를 두고 제주 시내에서 애월, 한경, 안덕이 있는 서쪽 지역을 누비며, 다음 날은 서귀포에서 출발해 역시 오른쪽에 바다를 낀 채 동쪽 해변을 거쳐 위로 올라간다는 얘기다. 차가 진행하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만 살짝 돌리면 코발트빛의 바다를 볼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이 있는 것이다. 난감한 것은, 그럼에도 올레길은 ‘시계’방향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까짓것,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지만 우측통행이 습관화된 우리에겐 영 어색하다. 운동회 때 계주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둥근 땅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아하,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 될 거 아니냐고? 안 될 것은 없다. 그래도 된다. 단지 올레길 ‘정’주행이 아니라 ‘역’주행이 되어버리니, 기분이 썩 개운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주위 환경이나 스토리가 있는 보행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서 결정된 올레의 방향이겠지만, ‘안전’이라는 요소를 감안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 해안가를 시계방향으로 걷는 올레꾼은 반시계 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정면으로 보게 된다. 번듯한 차도가 드문, 거의 포장되지 않은 좁은 올레길 특성상 그렇게 된다. 밤길을 걸을 때 뒤에서 갑자기 차가 나타나면 서로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워 위험한 경우가 있는데, 차라리 마주 오는 차를 보는 쪽으로 산책을 하는 게 훨씬 안전하지 않을까. 만약 올레 코스가 반시계 방향으로 되어 있었다면 같은 방향으로 달려오는 차들을 감지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진정 이런 부분까지 반영한 코스 구성이었다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 마땅한 것임을.
제주올레길 코스
재능을 떠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3-B 코스다. 까만 장성 너머 짙푸른 바다의 색깔이 세련된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 싶다. 해풍에 나부끼는 바다목장의 초록빛 풀들과 평화롭게 그 풀을 뜯는 한우의 모습은 이상적인 풍경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광대한 백사장과 해수욕장을 감싸는 야자나무를 캔버스에 담는다면 프랑스에서 활약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분위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화풍을 택하던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길 하늘과 땅이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구석구석 걸으며 황홀해질 제주는, 그래서 예술을 품은 섬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겠다.
이 섬에서는 그려보시고, 들어보시고, 써보시길 권한다. 잠시 왔다 가시더라도.
제주 동남쪽의 거침없음은 언제나처럼 여전했다.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듯하다.
발가락이 부었다.
퉁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