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읍 교래리 & 구좌읍 송당리
“윷이야!”
거나한 잔칫날이든 자그마한 회사의 체육대회 날이든, 혹은 오랜만에 동네 성아시(형,동생)들이 함께 하는 주말이든, 윷놀이는 빠질 수 없는 최고의 레크리에이션이다. 상대의 말을 잡아버릴 때의 쾌감은 기본이고, 한 번에 세 개의 말을 엎어 전력질주하는 순간은 황홀감마저 자아낸다. 한국인이 하나 되는 축제의 마당이고, 선인의 지혜마저 담긴 세계 최고의 보드게임이 아니던가. 다만 의기양양한 팀의 주장들, 청군 백군으로 편을 가르잔다. 제발 청군 백군은 이제 그만하면 안될까. ‘군(軍)’을 만들어 싸우자니... 듣기만 해도 섬뜩하다. 이런 구분을 지금껏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온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다. 상대의 말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얄밉다. 어떻게든 역전을 해야 한다. 저녁내기가 걸리긴 했지만 그보다는 자존심이 문제인 것이다. 남은 세 개의 말로 전세를 뒤집기는 버거워 보인다. 한낱 윷‘놀이’일 뿐인데 집중력의 강도는 어마어마하다. 마지막으로 큰 숨을 몰아쉬고 승부의 스냅을 튕긴다. 어....그런데 설마.
섰다, 말 하나가 똑바로. 그렇다, 세로로 섰다는 이야기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희박하지만 가능하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도 직접 봤으니까. 종종 그럴 수 있다. 적어도 제주의 윷놀이에서는.
제주 전통의 윷, 종지 안에 넣어 던진다
육지의 그것과 사뭇 다른 제주 전통의 윷놀이는 ‘넉동배기’ 혹은 ‘넉둥배기’로 불린다. 윷을 직접 잡아 공중으로 던지는 일반 윷놀이와 달리, 제주에서는 귀여운 종지에 더 귀여운 꼬마 윷을 집어넣고 잔 속 술을 상대의 얼굴에 끼얹듯 윷들을 쏟아낸다. 네 개의 자그마한 윷들은 한바탕 공중회전을 한 뒤 멍석 위에 내동댕이쳐진다. 윷의 모양과 종지를 이용한 던지기 외에 또 뭐가 다를까. 길게 놓인 멍석 정확히 반을 갈라 선이 그어져 있다. 내가 던진 윷들은 4개 모두 중앙선을 넘어 상대편 쪽 멍석에 떨어져야 한다. 정하기 나름이겠지만 보통은 하나의 윷이라도 선에 걸치거나 멍석을 벗어나면 실격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판의 생김새다. 마치 생선 가시를 빙 둘러놓은 듯 앙상함의 앙상블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일반 윷놀이 말판과 다를 건 없다. 말이 놓이는 자리가 선의 끝이나 교차하는 부분이란 것 정도. 종지 안에 있는 윷을 다시 한번 보시라. 어쩌다 한 번이긴 하겠지만 충분히 똑바로 세울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 중요한 것은 한 번의 던지기에 한 개의 윷만 똑바로 서도 게임은 그걸로 끝이라는 거다. 아무리 일방적으로 지고 있어도, 패색이 짙어도, 한 판의 넉동배기에서 윷을 한 번만 바로 세우면 ‘게임 오버’. 저녁쯤은 배부르게 얻어먹을 수 있다. 관중의 환호성은 덤이다. 제주 꼬마 윷의 엄청난 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한바탕 벌어지는 넉동배기 승부
넉동배기의 말판
신명나는 넉동배기 한판 승부는 조천읍 교래리의 일명 ‘토종닭 거리’의 음식점에서도 흔히 벌어진다. 흑돼지와 갈치구이를 먹고 말겠다는 관광객들의 의지에서 살짝 벗어난 메뉴이긴 해도, 제주 중산간의 자연에서 자란 토종닭 샤브샤브와 백숙은 점차 유명세를 얻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제주의 대명사가 된 ‘삼다수’마을이 지척이니 이곳 토종닭 거리는 물 좋고 닭 좋은 청청 지역이 아닌가. 제주시내에서도 많은 도민들이 모임의 공간으로 선택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윷이야!”, “잡았다!” 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교래리의 음식점에 적당한 넓이의 마당과 넉동배기, 말판이 없다면 그곳은 장사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걸로.
교래리의 음식점 거리
토종닭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면 가장 제주다운 풍광을 맞으러 가는 길이 여유롭겠다. 아쉽지만 소화가 되려는 신호가 오기도 전에 넉동배기 만큼이나 전통을 자랑하는 제주의 대표 관광지에 도착할 것이다. 한때 신혼여행으로 택시를 대절해 섬을 누볐던 시절, 서쪽의 한림공원과 더불어 제주 양대 사설 관광지의 위상을 자랑했던 곳, 산굼부리다. 사설인 점을 고려해도 비싼 입장료는 분명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돈 만 원쯤 훌쩍 넘는 관광지가 어디 한두 곳인가.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동안 이곳이 외면을 받은 것은 오히려 지나치게 유명해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뻔한 선입견을 지니기 쉽다는 것.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관광지의 느낌? 그러나 한 마디만. 장관이다. 그것 뿐이다. 산굼부리 측으로부터 단 1원도 받지 않았다는 결백과 함께.
산굼부리의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한라산
산굼부리의 전망대에서 분화구 쪽을 바라보는 관광객들
‘굼부리’란 화산체의 분화구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 이름 자체로는 어차피 화산섬인 제주 속의 공간이니 특이한 점이 없어 보이는데, 분명하고 유일하게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고 했던가. 아래로 깊숙이 파인 분화구를 감상하려면 적어도 그 깊이 이상의 오르막 등반을 해야 하는 게 이치인데, 유일한 예외가 산굼부리였던 것이다. 뚜렷하게 솟아오른 산의 형체 없이 큰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분화구만 땅 아래로 쑥 가라앉아 있는 지형. 바로 지리 시간에 들었던 ‘마르(Maar)형’ 화구다. 그것도 주변 땅보다 무려 100미터나 아래로 꺼져 있어 백록담보다도 더 깊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 유일의 마르형 분화구인 산굼부리가 뻔한 관광지일까. 지나치게 알려졌다고 해서 유재석의 예능 프로그램을 끊을 것인가, 아이유의 노래를 더 이상 듣지 않을 것인가 말이다.
온통 초록빛인 사진 속의 청량함도 좋지만, 억새가 파도를 치는 가을에 산굼부리를 찾아도 신비로운 광경을 기억에 담아갈 수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고, 혼자라도 감성의 성숙에 보탬이 될 것이니.
아부오름 입구 부근의 ‘나홀로 나무’
동쪽으로 달려 구좌읍으로 들어선다. 조천읍 교래리와 구좌읍 송당리. 읍이 다른 두 곳을 한 번에 소개하는 이유는 물론 두 지역이 이웃해 있어서이다. 오름의 연속은 부드럽게 이어질 뿐인데 경계를 나눈 건 인간들이다. 굳이 따로 볼 필요도 없다. 아니, 교래와 송당은 끊김 없이 지나야 신비로운 조화를 느낄 수 있는 연속된 공간이다.
열 번은 찾은 듯한 송당의 아부오름. 등산을 기피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부담이 없다. 그래서 이 게으른 인간도 열 번이나 찾았겠지. 아부오름을 갈 때마다 오름 아래에 있는 나홀로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1분 정도. 습관이다. 그냥 그렇게 된다. 아부오름은 영화 ‘이재수의 난’에도 배경으로 등장했지만, 역시 ‘연풍연가’의 엔딩 장면에 나온 나무의 배경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연풍연가의 O.S.T.는 이야기의 공간인 제주를 고맙게도 잘 표현해 준다. 한참 전의 영화라고 해서 망설일 필요 없다. 무선 이어폰으로 영화음악을 들으며 나홀로 나무 앞에 서 있어 보자. 당신이 곧 장동건이요, 고소영이다.
아부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오름들
다만 삼나무 숲이 동그랗게 조성된 분화구를 재회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름 정상 부분의 나무들이 지나치게 웃자라 푹 들어간 아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부오름의 매력은 높이에 비해 꽤나 깊이 파인 분화구와, 그 분화구의 중심을 호위하듯 원을 이룬 삼나무 군(群)인데 그걸 볼 수가 없다니. 한겨울이어도 정상 부근 나무의 높이를 생각하면 분화구를 관망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대대적인 가지치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오름의 능선이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송당리의 기운은 신성(神聖)의 발현에 제격이다. 언젠가 가족의 중대사를 앞두고 서울의 소문난 점집을 찾아갔다는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신통하다는 소문을 듣고 제주에서 찾아왔다고 하니, 네가 사는 섬에 귀신들이 가득해 영험한 무당들이 넘치는데 뭐하러 이 먼 서울까지 헛걸음을 했냐며 타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영험한 제주 신들의 고향이 바로 이곳, 송당리인 것이다.
‘당오백 절오백’‘이란 표현처럼 제주에는 마을 신을 모시는 당이 곳곳에 분포해 있다. 이제는 도시지역으로 편입돼 현대식 주택가가 자리 잡은 곳에도 동네 어딘가에는 당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디 당이라는 실체뿐일까,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캐릭터가 활약하는 탐라의 신화는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최고의 스토리텔링 결과물일 것이다. 무려 일만 팔천의 신들이 좌정하고 있고, 각자의 개성도 뚜렷하다. 이 많은 신들이 섬사람들의 일상에 하나하나 관여하고 있으니 조심스러운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는지. 모든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신구간(절기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에만 이사를 하는 풍습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숨 고르기라는 생각이다. 도민들이 겪어온 불편함을 씨앗으로 제주의 신화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키워가는 중이다. 사랑과 배신, 액션과 반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자청비 신화를 비롯해, 일만팔천 제주 신들의 이야기는 제주를 넘어 우리나라의 k-문화에도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 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제주 신화에 관한 책들도 여럿 출간되어 있으니 꼭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만을 흥미롭게 바라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언젠가 제주의 신들이 배우와 CG의 결합으로 되살아나 헐리우드를 집어삼킬 날이 올 거라 확신하는 바이다. 시나리오를 구성해 먼저 저작권 등록하겠다고 손드는 사람이 갑 오브 갑이 될지어니... 난 분명히 말씀드렸다.
송당 본향당, 무속인들이 있었다
송당 본향당과 당오름의 입구에 세워진 백주또 자녀들 석상
방대한 제주 신화 중 송당 본향당에 관한 이야기만 요약해 보려고 한다. 바다 건너에 살던 백주또(금백주)라는 여신이 제주에 와 한라산의 사냥신인 소천국을 만나 혼인을 한다. 이 커플은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을 낳고 화목한 생활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농경생활을 하던 곳에서 온 백주또는 소를 이용해 밭을 갈며 생계를 이어가려 했던 반면, 태생부터 수렵인이었던 소천국은 일을 해야 할 소들을 잡아먹으면서 갈등이 생기고, 둘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맡게 된다. 결국 이혼 도장을 찍은 후 백주또는 자식들을 데리고 소천국의 곁을 떠난다. 한편 아들 중의 하나인 궤네기는 이혼한 아버지를 만나러 가 감히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 뜯게 되는데, 이에 불경죄를 선고받고 무쇠궤짝에 갇혀 바다에 던져지는 형을 받는다. 죽은 줄만 알았던 궤네기는 용왕국 사람들에 의해 구출된 뒤 훗날 어머니의 나라를 먼저 평정하고, 고향인 제주섬으로 위풍당당하게 귀환을 했으니... 쫓아낸 아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온 것을 목격한 부모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버지인 소천국은 겁을 먹고 도망가다 절벽에서 추락사했고, 어머니인 백주또 역시 목숨을 잃게 되는데... 백주또가 죽어 좌정한 곳이 바로 이곳, 본향당 자리인 것이다. 나중에 이들이 낳은 아들과 딸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은 제주 곳곳으로 흩어져 각 마을을 지키는 당신(堂神)이 됐다고 하니, 송당의 본향당이 제주 본향당의 으뜸이 되는 까닭이자, 마을마다 당이 존재하는 이유일 수밖에 없겠다.
당오름 입구
본향당의 뒤에는 당오름이 자리하고 있어 한층 신성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당이 있는 곳의 오름이 당오름일 테니 제주의 많은 오름들은 ’당오름‘ 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귀여운 발음이라 백주’또‘의 ’또‘가 궁금해졌다. 제주인들이 ’신(神)‘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나. 위에 등장한 백주또의 아들 궤네기 역시 궤네기’또‘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들의 자식이니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아빠의 수염을 뽑아버린 호래자식에게 신의 지위를 부여한 게 맞는 건지 갸우뚱하게 한다. 권토중래의 위업을 비추어 보면 마땅한 대접을 받는 것일까. 하긴 술에 취해 사는 신도 있는 저쪽, 그리스에 비한다면 제주의 신은 양반이다. 백주또의 모습을 상상하며 길을 걷는데 복권판매점이 보인다. 아하, 전지전능한 신을 ’또‘라고 부르는 것이 이렇게 와 닿을 수 있을지. 현대판 전지전능의 대명사 ’로‘또가 있었다.
마을신 모시랴, 조상님 섬기랴. 제주도민들 만큼 섬김의 풍속으로 고생하는 지역민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본향당신에게 특정한 날 드리는 제사와 굿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벌초방학‘까지 주면서 어른들의 벌초 풍습을 이어가라는 철저함은 기본이다.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피곤함이 풀릴만 하면 상차림 준비를 또 해야 하는 잦은 제사의 부담 때문에 육지의 여인들이 제주로 시집오기를 꺼릴 정도였다고 하지 않는가. 이 정도면 섬김의 고생을 넘어 ’고통‘으로 받아들인 후손들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주도민들의 제사상엔 카스테라나 롤케이크같이 직접 만들 필요 없는 ’빵‘이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송당의 본향당신인 백주또가 먹는 카스테라라... 괴이한 접대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쌀이란 작물은 도통 구할 수가 없던 이 척박한 섬에서 쌀로 만든 떡을 올리는 대신 보리가 원료인 빵을 올리는 편이 나았고, 가까운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카스테라가 그 대표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주의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올려진 카스테라를 보고 신기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왜 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일까.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절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상 위에 놓인 초코 케이크에 가 있었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겠다. 게다가 조상님이 초딩 입맛이었다면 그에 맞는 메뉴를 올려드리는게 후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송당에서의 카스테라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