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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22. 2022

Chapter2 느영나영
- 나이 듦이 안심인 이유

제주시 한울누리공원








 “앗 뜨거!”

어떤 곳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정신을 놓지 말아야 했다. 한지로 겹겹이 쌓여 묵직해 보이는 두 꾸러미의 자루에 손을 대는 순간, 화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잠시 자루가 식을 때를 기다린 다음 살짝 눌러보니, 이번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밀가루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2016년은 윤년이었다. 달력의 날짜를 실제 태양력에 맞추기 위해 여분의 하루 또는 달을 끼워 넣는 해. 많은 사람들이 윤년의 윤달에 조상의 묘를 개장해 이장하곤 한다. 손(損) 없는 날에 결혼과 이삿날을 잡는 게 몸에 밴 우리인데, 돌아가신 분의 흔적을 이동시켜야 하는 날은 오죽할까. 장묘업체가 쾌재를 부르는 대목 중 대목이기도 하다. 코로나19의 습격으로 2020년 도쿄 올림픽은 전례 없이 연기되기도 했지만, 매 올림픽이 열리는 해가 곧 윤년이니 기억하기 어렵진 않겠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공원 분묘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유골을 수습해 화장을 한 뒤 제주로 옮겨 오는 길, 두 분을 배낭 속에 모시고 오는 여정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업고 가는 효도 관광의 그것인 듯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마침내 개장이라는 실례를 무릅쓰고 두 분을 제주의 품속에 초대했다. 봉분의 넉넉함에 비할 바 없는 좁은 공간이었으나 화목장(花木葬)이라는 이름 그대로 꽃과 나무 사이에 계실 테니, 손자에게 크게 뭐라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제주시가 관리하는 자연 장지 ‘한울누리 공원’

     

하늘색이 워낙 좋아 퇴근 후 두 분이 계신 곳을 찾았다. 전경이 일품이다. 산 사람들마저 탐이 날 정도의 터가 아닌가. 하긴 후손들이 양지바른 곳을 고르고 골라 낙점한 명당일 테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훌륭해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일반 수국보다 한층 질박한 멋을 자아내는 산수국이 지천이고, 등 뒤엔 멋진 오름, 눈앞엔 푸른 제주 바다가 장관이다. 그래서일까. 조상을 그리며 공원을 찾아온 후손들의 표정이 그리도 넉넉할 수 없다.

탐색할 가치가 있는 제주의 공간들 속에 장지를 포함시킨 것은 철학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드라마틱한 뷰 때문이리라. 사유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승생악이 가까운 중산간 지대지만 이곳의 주소는 명백히 제주시 ‘연동’이다(도로명은 제주시 산록북로 70). 신제주 한복판에서 1100도로 방면으로 15분 정도 차를 달리면 도착할 수 있어 접근성도 뛰어나다. 가파르지도, 그렇다고 아주 완만하지도 않은 한라산 자락의 경사지에 5만기를 안장할 수 있는 규모의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잔디형, 화초형, 수목형, 정원형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는데, 40년이란 사용 기간에 비해 도민 10만원, 비도민 20만원(정원형 제외)이란 사용료는 유족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잔디를 비롯한 주변 환경관리를 시에서 알아서 맡아주니 그처럼 고마울 데가 없는 것이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길에 효율과 경제성만을 내세우는 것 같아 인간미가 떨어질 법도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손자의 부담이 덜어짐을 아시게 된다면 반색하지 않으실까. 덤으로 숨 막히는 장관이 두 분의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가성비는 끝판왕, 그 자체다. 요즘 공동주택의 분양가 산정에 조망권이 얼마나 중요하게 반영되는지 다들 알고 계시지 않은가 말이다. 조망의 수준으로 본다면 이곳은 공원묘원 계의 ‘강남’인 것을.

여행자의 입장에서 보자. 굳이 제주의 풍경을 찾으려 한울누리공원까지 올 필요가 있을까. 공원이라 해도 어쨌든 ‘묘지’가 아닌가. “장쾌한 제주시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하기에 일품이니 무조건 이곳으로 오세요.” 하는 말이 섣불리 나오긴 힘들다는 뜻이다. 오셔도 되는, 오셔야 하는 이유 두 가지로 권유자의 마음을 스스로 편하게 하고자 한다.

먼저 제주시의 전경과 광활한 북쪽 바다를 이곳만큼 한 눈으로 감상할 포인트는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내리막길 전망 포인트가 많은 서귀포 쪽과는 달리, 북쪽은 도로가 놓인 지형상 시내권을 넘어 바다까지 뻥 뚫린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는 한울누리공원과 같은 자연 장지 설립의 공적 기능일 수 있겠다. 유족들과 후손들로 언제나 넉넉함을 연출하는 공원묘원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이상적인 풍경이 아닐까. 자치단체는 주민들의 공원 방문과 이용을 유도해 사회복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땅 속에 묻혀있는 조상들은  산 자들의 잦은 왕래에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가시라. 떠들썩하지 않은 차분함으로 북제주의 기운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니까.       

바다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한울누리공원

     

조부모님을 모신 지 4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코로나 상황 속 안타까운 이별. 다시 한울누리공원을 찾았다. 일반적인 봉분묘원처럼 다음 돌아가실 분의 위치를 점찍어 놓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으랴. 망설임 없이 부산에서 숨을 거두신 아버지의 흔적을 들고 당신의 부모님 곁으로 왔다. 정확히 말하면 ‘곁’은 아니었다. 그 4년의 시간 동안 주변의 빈자리가 거의 채워진 바람에 공원의 가장 아랫부분에 모셨으니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지척이다. 제주의 장관을 세 분이 함께 실컷 감상하시길.

  이젠 조문을 가는 일이 일상이 된 나이가 되니, 죽음이란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의 한 이벤트일 뿐이라는 담담함이 더 단단하게 다가온다. ‘무뎌진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만은 없겠다. 급작스럽고 불행한 끝을 맞게 되는 일부 비극을 제외하면, 한 세상 그럭저럭 살아오다 적당한 나이에 삶을 마친 분들을 추모했던 기억이 대부분이기에,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보다 애잔함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곧 그만큼의 세상의 종말이자 우주의 상실인 것이다. 죽음을 추모한다는 것이 근조 봉투에 무심하게 넣은 돈을 유족에게 전달하며 육개장 한 그릇 후딱 비우고 돌아오는 요식 행위만은 아닐 텐데, 철저히 규격화된 행사에 다름 아닌 것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세월이 갈수록 무정해지는 인간사가 죽음의 형식화에 크나큰 원인인가 싶다가도, 상실의 공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죽음을 일상화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그 또한 이해 안 될 것이 없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기 싫지만 누구나 직접 겪어내야 하는 것이 죽음까지의 과정이다. 100세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정보는 밀물처럼 들이닥친다. 세상의 마무리를 맞기 전에 최대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에 더해, 죽음을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긍정적으로 여생을 보내자는 심리적 안정감을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키는 것이 웰빙과 웰다잉의 전제 조건임을 우리에게 알리려 하는 것이 목적이겠다.

죽음 ‘후’의 공포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역설적이게도 죽음 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죽음 뒤 다른 삶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죽음 후의 ‘삶’이 두렵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만약 죽음이 나의 회로가 영원히 꺼져버린다는 의미라면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유신론자나 영혼의 별개 존재를 믿는 사람과는 달리 죽음을 액면 그대로 나의 모든 것에 대한 전원 차단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도대체 두려워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두렵다’는 감정과 관련된 뇌의 신경세포들이 전기적 연결을 통해 자극이 발현돼야 두려움이란 것을 느낄 텐데, 그걸 담당하는 신체가 기능을 멈춰버렸으니 스위치 오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소리다. 나 없는 사후는 내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대로 우리 몸의 전원이 꺼지는 동시에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숨진 나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 주위에서 목 놓아 울고 있는 나의 배우자와 가족들을 바라보며,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에너지 상태로 떠도는 덕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빛의 속도로 둘러보니, 내 생각과 다르게 나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친구도 보인다. 괘씸해 미칠 지경이다. 저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오는 것도 같은데, 그 빛을 따라 올라가 버릴지 조금 더 여기 남아 있을지 고민도 한가득이다. 이대로 빛을 따라가서 심판을 받아버리면 혹 천국으로 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몸서리가 쳐진다. 몸이 없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느낌에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다. 아, 소름이란 것도 없구나. 그러다 ‘이 정도면 악행까지는 저지르지 않고 성실히 살아온 편이 아니겠어’ 하는 자신감이 슬그머니 샘솟는다. 빛을 따라 오르려는 순간, 아들과 딸, 손주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딱 한 시간만 더 있다 갈까, 그때는 빛이 다시 내려올까?’ 하는 미련이 이어진다. 살아 있을 때보다 골치가 더 아프다. 골도 없는데 골치가 아픈 것에 혼란을 느낀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건지, 내가 영혼이라는 존재가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좋을 거라고 한탄하며 영안실에 누워 있는 나를 다시 바라본다.          

표석이 공원의 가장 아랫부분까지 들어차 이제 여유 공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제주 전통방식인 산담이 둘러진 무덤

     

한울누리공원 맞은편을 바라보니 나무가 빼곡한 오름 아래 제주 전통의 무덤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무덤 주위를 둘러싼 돌담을 뜻하는 ‘산담’은 제주의 풍경 그 자체가 된 지 오래다. 나를 닮은 나를 복제하며 세상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우리는 태어나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다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반짝이는 삶에서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곧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는 방법임을 점점 더 믿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성숙의 과정인 것인지. 

힘들게 제주도까지 효도 관광을 모셨다고 어깨를 으쓱해본다. 그동안 그런저런 경치만 보느라 지루하셨다면 이제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실컷 즐기시기를. 세 분에게 손자와 아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따뜻한 남쪽에서 평안히 쉬시라고 명패를 바라보며 말씀드린다. 부담 되도록 나만 잘 되게 해달라고 떼쓰는 일은 없을 테니. 영혼이 남아 계신다면 들으실 테고, 없어도 상관없겠다. 마음속엔 영원히 살아 계신 세 분이니 말이다.     

“이제 집으로 가볼게요. 오늘은 바람이 쌀쌀하네요.” 

손자가 감기 걸리면 싫어하실 것 같았다.

“그렇죠, 할아버지, 할머니?”

“제 말이 맞죠, 아빠?”    

한울누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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