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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pr 11. 2024

경사(傾斜) 예찬

-동해시 논골담길





  마음이 끌리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난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걸."이라 말해도 속속들이 파헤쳐보면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다만 설명이 안 되는 것뿐이다. 개인적 성향, 경험, 미적 기준 등이 버무려지면서 순간적으로 나를 N극으로 만들고 특정 대상을 S극으로 만들어 덜컥! 달라붙게 만드는 것이다. 이유 없는 호감은 없다. 애를 닳게 만드는 S극은 사람일 수도, 문장일 수도, 음악일 수도, 그림일 수도, 공간일 수도 있다.


 대학시절 샌프란시스코에 두어 달 있었다. 자본주의의 제왕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비판이 덜했던 시기라고 변명을 깔아 두더라도, 여물지 않은 풋내기에게 신세계는 거부하기 힘든 이국(異國)의 공기를 쏘아대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걸었다. 낯선 공기가 익숙한 공기가 되어 폐를 채울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어쩌면 도심에 언덕이 이렇게 많을까. 높은 고도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내려다본다면 마치 모굴스키 슬로프 같을지도 모르겠다. 경사가 급한 언덕이 많아 휴식은 잦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눈에 담긴 도시의 모습은 고도의 변화가 세밀하게 쪼개진 프레임으로 다가왔다. 힘들면 그만 좀 걸어야 하는데 왜 제어가 되지 않는 건지... 답은 급경사로 걸음이 힘든 이유, 그 자체에 있었다.   

샌프란시스코(픽사베이 이미지)


 발길의 끝은 언제나 High on a hill이었고 케이블카들은 Climb halfway to the stars였다. 토니 베넷의 노래가사 그대로. 힘들지만 아름다운 건지, 힘들어서 아름다운 건지 알 수 없다. 언덕길에 지어진 집에서 살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중력을 거슬러 힘겹게 올라온 뒤 뒤돌아 바라보는 조망은 왜 눈물이 나게 만드는 걸까. 경사진 공간의 매력은 이토록 치명적인지! 그때부터였다, 경사 성애자로서의 자아가 발현된 것이.  

     동해시 논골담길로 가는 아랫부분 진입로


 경사는 고되다. 그래서 등산은 만만하지 않다. 중력의 방향을 거슬러야 하니 보잘것없는 피조물로서는 몇 곱절의 운동에너지가 필요한 막노동이다. 산을 오르는 건 썩 내켜하지 않는 약해빠진 이유다. 정상에서의 포효는 강건한 심신의 소유자만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However, 우습게도 등산은 싫은데 언덕이라면 환장한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도심 속 언덕길'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고뱅이*가 나갈 정도로 가파른 곳도 있지만, 경사를 가꾸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감상하며 올라가다 보면 두 다리의 고난에 주의가 집중되지 않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다.  

 경사가 그리워질 때 수시로 찾는 동해시 논골담길. 더 알려지기 전에 흠뻑 감상해 보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흠뻑은 무슨, 순식간에 동해시의 대표 관광지가 돼 앞사람 엉덩이만 관람하며 올라가는 일이 잦아졌다. 다행히 고갯길 중간중간 갈림길이 나온다. 바닥의 화살표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오르막의 선두에 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논골담길의 매력은 역시 조망이다. 좁은 길을 따라 서 있는 집들 자체의 개성에 더해서 멀찍이 경사를 이루는 슬레이트 지붕들의 집합, 무엇보다 묵호항을 시작으로 점점 광활해지는 동해의 장관이 압권이다. 한 걸음 오르면 한 움큼 감동이다. 분절이 없는 감동의 그러데이션!  

 

  

 언덕의 정상에 위치한 묵호등대 주변으로 동해시에서 의욕적으로 조성한 도째비골이 있다. 전망대와 체험거리 등이 있어 논골담길, 묵호항과 패키지로 묶인다. 가이드 입장에선 땡큐다. 주위를 감상하며 논골담길을 올라 정상의 호연지기를 선사한다. 묵호등대 내부를 둘러본 후 도째비골에서 공중 자전거를 태워 긴장감을 한 큰 술 보태준다. 내려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여행자들의 뱃속에선 너무도 자연스러운 꼬르륵 소리. 논골담길 출발지점에서 지척인 묵호항에서 가성비 끝판왕인 활어회 센터를 목도하게 될 지어니.   

 왜 '논골담길'인가. 

 'A는 왜 A가 되었을까?'라는 호기심을 풀기에 세상은 완벽하다. 그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와 유래가 몇 초간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대놓고 드러나니까. 그러니 포털이 아닌 책에 이런 단순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일뿐더러 '지면 낭비'다. 신속한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을 마치 선생님인 듯 "내가 알려드릴게~", 얼마나 건방진 일인가. 저자만의 생각이 보이지 않고 지식만 나열한 책은 사지 마세요.

 그럼에도! 당신의 손가락 혹은 손가락 말단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하나만 말씀드린다. 아는 분은 조용해 주시고 모르는 분은 검색이 마려워도 참아주시길. 분명 '담'은 있지만 '논'은 있을 리 만무한 바닷가 언덕인데 왜 '논골담길'인 건지. 혹시 우리가 아는 그 '논'이 아닌 다른 '논'인가?  

 우리가 아는 그 논이 맞다. 단지 쌀이 생산되는 쓰임새로서의 논이 아니고 물이 고여 있는 질퍽한 성질로서의 논이다. 묵호 앞바다에서 오징어를 비롯한 여러 어종들이 풍족하게 잡혔던 시절, 물고기들을 언덕 위의 집까지 운반하면서 흘러내린 바닷물로 온 고갯길이 질퍽한 논과 다름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경사가 급하니 윗동네에서 흘린 바닷물도 계곡물처럼 흘러내렸을 것이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쌀 대신 수산물을 덕장에 널었으니 모름지기 귀한 먹거리를 수확한다는 '논골'의 역할은 그대로다. '바닷가의 논고을', 자격이 충분하다.   

(좌) 부산 초량 이바구길 조망  (우) 전주 자만벽화마을


 많은 국내 대도시 속 구도심을 가보면 도시재생사업으로 탈바꿈 중인 언덕마을이 있다. 부산의 이바구길엔 모노레일까지 설치돼 있다. 일본과 청의 문물을 속절없이 받아들이던 강제 개화의 창구, 초량의 지나온 운명을 상징하는 것일까. 짧은 거리를 이동할 뿐이지만 유럽 '푸니쿨라'의 감성은 충분히 느낄 수 있겠다. 모노레일 창으로 비추는 급경사의 연속이 흥미롭다. 이 경사를 그대로 두고 양쪽에 개인주택들이 아닌 상가와 공동주택들이 박혀 있다면 홍콩 소호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주변 느낌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엔 자만벽화마을이 있다. 시에서 심혈을 기울여 낙후돼 가는 산자락 마을을 여행 스폿으로 변신시킨 곳이다. 오르내리는 골목길의 모습은 논골담길의 그것과 비슷하다. 한 발 한 발 옮겨 경사의 매력을 느끼려는데 사진 속 강아지가 짖는다. 체구에 비해 우렁찬 짖음이다. 자만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오셨다는 할아버지께 꾸지람과 더불어 일장 연설을 듣는다. 우리 동네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벽화 그려 넣은 다음에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죽을 지경이라고. 괜스레 강아지가 원망스러워진다. 이래 봬도 세 마리의 개를 자식처럼 키우는 세상 너그러운 애견인인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당황하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역정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논골담길이건 자만마을이건 빈 땅에 계획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아니다. 원주민이 살았거나 살고 있는 집들에 약간의 붓터치만 더한 옛 주거지일 뿐. 날 것 그대로의 매력이 사라져 버린 동네라면 삶은 없어지고 경사만 남는 속 빈 강정과도 같을 것이다. 주말이면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강아지의 성대가 바빠지고, 여기에서 일상을 보내는 주민들은 그래서 얼마나 괴로울까. 할아버지의 꾸짖음은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인 것. 누군가는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좌) 서울의 한 달동네                 (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픽사베이 이미지)


 경사의 미(美)에는 대가가 따른다. 점증되는 아름다움을 찬양만 할 수 없는 이유다. 할아버지의 분노를 넘어서는 고통과 설움은 대개 경사를 따라 깔려있기 마련이다. 경사는 고되다. 단순히 오르기 힘듦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경사지는 힘없는 사람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비탈에서의 두 다리는 한순간도 수평이었던 적이 없다. 양쪽 다리에 적절한 힘을 배분하지 않으면 이내 굴러 떨어져 낙상을 입기 십상이다. 한숨을 돌리려 긴장을 늦추게 되면 몸은 미끄러지고 삶은 내동댕이 쳐진다. 우리는 그런 아픈 경사지를 '달동네'라 부른다. 혹서기에 열병으로 사망사고가 일어나는 곳도 달동네고, 혹한기 동사가 발생하는 곳 역시 달동네다. 'Moon Village', 영어로 바꿔봤을 뿐인데 낭만이 폭발한다.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지 못해 언덕 위로 쫓겨와 달이 가까이 보이는 것일 뿐인데 그 이름 참 아이러니 가득하다. 누군가는 월세(달세)로 사는 사람들의 동네라 달동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 해도 휘영청하나 무심하게 뜬 저 밤하늘 속 달이 서글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달동네가 가장 취약한 부분은 접근성이다. 도심 속 야트막한 동산에 살고 있을지라도 달동네 주민들은 도심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오르내리기 벅차다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평지의 사람들과 그들은 별개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 한 복판 달동네 주민의 고단함은 유니세프가 전하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의 배고픔만큼이나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나마 그 애달픔조차 '철거'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만나면 사치가 된다. 인구는 줄고 있다고 하는데 약자가 살아갈 공간은 왜 잠식당하기만 하는 걸까.    

 '파벨라(Favela)'는 고유 지명이 아니다. 브라질의 빈민가를 총칭한다.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상과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알려진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가 가장 악명이 높을 뿐이다. 경사를 따라 덧씌워진 빈곤과 결핍은 달동네와 마찬가지다. 다만 이곳의 파벨라는 마약범죄의 소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법지대의 공포를 실감하게 한다. 우리의 달동네와 다르게 철저히 접근을 막는 작용을 한다.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라도 두른 듯하다. "우리에게 접근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나? 알고 싶으면 어디 한번 들어와 보시지." 범죄의 소굴이라는 낙인이 찍혀 절대 빈곤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바다를 향한 예수상이 있는 산의 뒷면에 위치해 있어 예수의 눈길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외면뿐일까.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2008)> 초반 변신한 헐크와 이를 쫓는 군대의 폭주로 속절없이 파괴되는 곳 역시 파벨라다. 범죄자들의 동네니 박살 나면 어떤가. 마음껏 깨부수길. 질 나쁜 마을이니 그래도 싸다는 세상의 단죄 또한 감당해야 한다.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 서 있는 예수상. 그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 파벨라가 있다.(픽사베이 이미지)


 다시 말하지만 경사는 고되다. 고되기 때문에 고되야 하는 사람들이 살아온 것이다. 그렇듯 고된 경사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가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죄책감도 따라온다. 누군가는 피땀 흘려 생을 이어갔던 도심의 언덕길을 오르며 정취가 그만이라는 설익은 감상을 내뿜는 이 얄팍함.  

 그러나 알고 싶다. 철이 없을지는 몰라도 언덕을 따라 켜진 불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기에. 도대체 경사지가 주는 묘한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속절없는 삶이 녹아들어 있으니 단순히 볼록 솟아있는 자연물의 존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반동(反動)'이다. 앞에서 말한 중력에 대한 거부다. 수직 암벽에선 살 수 없어도 경사진 언덕이라면 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자연력에 대한 작은 도전. 편안을 거부하는 반작용. 고개를 들어 바라봐야 하는 곳에 터를 잡았다는 일종의 자랑스러움.

 '반역(反易)'이다. 일상에 매몰되어 버린 속세를 떠나는 속 시원한 이동. 마음 같아선 하늘나라에 살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기에 언덕배기라도 올라 정착하겠다. 범인들과의 단절을 자청하는 정신승리. 세상의 권위에 대한 거스름.  

 '반전(反轉)'이다. 소외된 생명들이 내쳐졌던 그곳. 그래서 위태로움 가득했던 장소에 대한 재발견. 과거의 고됨은 재현되고 체험돼야 마땅하다는 가치관의 전도. 공간의 비효율이 아름다움이 되어 버린 시대의 흐름.   

 단순히 높은 곳에서의 조망을 바라는 건 정복자의 본능이다. 높으니 멀리 볼 수 있으니까. 보이는 그곳까지 내가 정복해 버릴 것이기에. 그래서 마천루의 숲 속, 각각의 나무들은 내가 더 높다 키재기 하는 것이고, 그 나무들의 주인은 다름 아닌 '가진 자'이다. 경사를, 달동네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조망에만 몰입할 수 없다. 존중돼야 할 것은, 조망할 수 있도록 발이 딛고 있는 바로 그 공간이다. 

 발한동에서 바라본 논골담길의 원경


 험하게만 보였던 동해의 거친 포말이 경사지의 정상에선 순두부같이 유순한 비눗방울. 귀엽다. 검푸른 동쪽의 바다도 이토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을. 누가 동해를 무섭다고 했나. 

 꿈을 꾸었다. 스케일로 봐서 리우데자네이루의 피벨라에 가까운 달동네 위를 날았다. 항공사 CF에 나왔던 연주곡이 흘렀다. 내가 마치 비행기가 된 듯. 빠알간 지붕이 대세인 그 장엄한 경사지를 따라 솟구치는 능선에 감동을 하며 날갯짓을 했다. 이 동영상, 호접몽으로 뭉개지지 않고 또렷한 아이맥스의 영상과 음향으로 영원히 기억할 자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고갯길 중턱에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휴일 아침, 잠옷에 외투 하나 걸친 현관 밖을 나선다. 익숙함에도 두 아킬레스건에는 경사의 오르막 방향으로 긴섞인 힘이 들어간다. 언덕 위쪽을 올려다본다. 하늘과 맞닿은 고지대의 지평선이 늠름하다. 아래를 본다. 조금은 헐떡이며 올라왔을 어제의 내가 대견스럽다. 미끄럼틀이라도 놓아 단박에 지치고 내려갔다 다시 걸어 올라와도 좋겠다. 행복하다. 중력을 거슬러 우리는 올라갈 테니 슬픔과 아픔은 빗물에 쓸려 경사면을 따라 훌훌 떠내려가기를. 여기 꿈의 언덕에서 고되었던 우리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고뱅이-'무릎'의 강원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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