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탄고도 2길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시 속에서 끝내 들리지 않던 엄마의 발소리.
누군가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는 생명 자체를 불어넣는 일. 지친 엄마가 돌아오는 발소리는 배춧잎. 그러니까 한없이 연약한 내 전부를 쌈쌀 수 있는 부드럽고 하이얀 배춧잎. 한 걸음의 중함을 아는 한 여유 있는 산책이란 게 얼마나 호사로운 일인지 감탄할 수밖에.
규격대로 살아온 어린 시절에 대한 반항으로 어제와 같은 오늘을 거부하는 시간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화무쌍한 사건을 매일같이 마주치는 여행 유튜버들이 부러워 죽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의외성 자체가 생활인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젊음은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가루사탕 같은 하루를 바라마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 정확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울 방송국 시계에 맞춰 매일 내던져야 하는 멘트의 시작. 방송의 내용은 다르더라도 어제의 복사판인 오늘이다. 초 단위까지 똑같다 보니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1년 전과 마찬가지다. 삶은 곧 무한의 타임루프. 그렇다면 방법은? 촬영을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장소로 나가면 되겠다. 그게 아니면 퇴근까지는 어제와 판박이처럼 살되, 광란의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게 젊음이었다. 루틴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언제부턴가는 기쁨이 되었다. 루틴은 지루함이 아니라 선물이었다. 어제 하던 대로 하면 하루의 끝까지 보장되는 기분이랄까. AZ 중의 AZ로 질주하는 증거이다. 특별한 게 꺼려지고, 예상치 못한 무언가는 달갑지 않다. 누군가로부터의 급작스런 연락도 부담스럽다. 덤덤하고 무탈한 일과가 최고다. 이쯤 되면 비난받아 마땅할 뒷방 늙은이가 된 것인가.
바뀌어버린 성향에 들어맞으면서도 부족해진 긴장감을 보충해 줄 방법은 그래서 '걷기' 밖에 없는 것이다. 발을 끊임없이 내디뎌야 하는 반복이 동반되니 루틴의 상징이다. 불현듯 놀라운 경치가 보이고 삶이 목격되니 감동과 자극의 불규칙한 습격이다. 정처 없이 무작정 걷기보다는 공인된 '스토리'가 있는 길을 밟고 싶다. 다행히 이곳은 강원도, 골라야 할 수많은 코스가 존재한다. 이왕이면 운탄고도가 좋겠다. 그 정도는 돼야 신발끈 고쳐 맬 각오 정도는 하고 출발할만하다.
강원도 영월에서 삼척을 잇는 173km 길이의 운탄고도(運炭高道). 서에서 동으로 1길에서 9길까지 조성되어 있다. 공식명칭은 '운탄고도 1330'. '탄을 운반하던 높은 길'이다. 1330은 모든 구간 중 가장 높은 지점인 정선 만항재의 해발고도. 전체 길의 평균 고도는 546미터지만 태백산맥의 굴곡을 직각으로 가로질러야 한다. 운탄고도1330 홈페이지에는 각 길의 고저와 굴곡이 단면으로 나와 있어, 난이도를 봐 가며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나마 만만한 길을 골라볼까 했는데, 어느 코스라도 제주의 올레길 같은 평안함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어차피 하루종일 순례의 자세로 뚜벅뚜벅 나아갈 각오니, 난이도가 아닌 길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기로 한다. 한동안 강원 영서의 쏟아지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영월의 강과 고지대를 감상할 수 있는 운탄고도 2길이다! 순례길의 굴곡을 확인한 뒤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당 떨어질 것이 걱정인 나이. 배낭 속 간식과 물도 꼼꼼히 확인한다.
2길은 전체 길이가 18.8km, 소요시간은 6시간 45분이란다. 높낮이는 극적이나 압도적인 준봉은 보이지 않는다. 낙점의 이유가 아름다움만은 아닌 것도 같다.
속 시원한 안내판이 있는 운탄고도 2길의 출발점
영월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각동리 입구에 내리면 곧 2길의 출발점이다. 6시간 45분 주파도 자신 없어 아침 8시가 되기 전 스타트를 끊는다. 9월의 해는 말갛게 솟아올랐다. 버스 정류장을 돌아 내려가 품이 넓은 강폭을 건너야 한다. 초가을의 아침 공기가 강의 수면에서 되튀어 촉촉한 미스트가 된다. 남한강 특유의 느리지만 장대한 그루브는 하루치의 벅참 총량을 다 잡아먹으려는 듯 감동의 게이지를 이른 아침부터 높여버린다. 과연 이 길이 '운탄'고도가 맞는 건지. 적어도 2길의 극초반부는 굽이치는 감상이 영화처럼 폭발하는 낭만의 걸음이다. 오늘의 구간을 완주하려면 길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을 강원의 매력을 하염없이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될 일. 수많은 유혹들을 뿌리치고 과연 오늘 내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 에라 모르겠다.
운탄고도 2길 초입에서 바라본 동강
동강을 건너 가재골로 가는 오르막을 탄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산길로 이어진다. 가재골에 가까워지면서 오른쪽엔 시내가 흐르고 물줄기를 따라 들어선 주택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별장일까? 겨울이 되면 이동이 쉽지 않겠다는 전원주택러 특유의 질투 섞인 분석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갈 만큼 간 것 같은데 이어진 이정표가 보이질 않는다. 게다가 경사는 점점 가팔라져 호흡이 가빠진다. 초반부터 이렇게 땀을 흘리면 안 되는데 큰일이지 싶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물성도 흙의 부드러움에서 각진 돌과 바위의 단단함으로 바뀌었다. 이러다 이 산의 정상까지 정복할 기세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숨을 크게 내쉬고 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내려간다. 연어의 회귀와는 방향이 반대라 그나마 다행인 걸까.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어야 할 이 아침에, 영월의 숲과 강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세상 청명한 공기 분자를 들이마시면서도 이놈의 뇌세포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니 몸이 고생하는 건 당연지사.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생길까 봐 일찍 출발한 거라고 자기 합리화 한 큰술을 추가한다. 순로를 잘 유지해 나아갔다면 가재골에서 좌회전했어야 대야리로 가는 길이 나오게 되므로, 내리막을 가는 지금은 오른쪽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잰걸음을 걷는다. 찾았다. 변명하자면 애초 올라오며 좌회전해야 할 바로 그 지점에 이정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았어도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는 것. 초롱초롱 맑눈을 유지했더라면 전혀 필요 없었을 변명.
가재골에서 대야리로 넘어가는 산길
자만이었다. 운탄고도란 게 곧 강원의 올레길이겠지. 천만의 말씀. 제주도민이었을 때 걷던 올레길은 급격한 경사의 변화나 회전 없이 전체적으로 직선에 가까운 구성이다. 잠깐 길을 놓쳤다 해도 금세 원래의 코스로 복귀가 가능하다. 게다가 산간이 아닌 해안을 따라 조성된 길이다. 깊은 산골을 경유해 당황할 일이 없다. 강원 산간의 명승길 중에서도 갓 태어난 축에 속하는 운탄고도는 앞서 간 선배님들이 아직 많지 않기에 믿음직한 순로의 흔적이 덜하다. 숲 속 구간이 많으니 나뭇잎이 우거진 계절에 길을 걸으면 이정표가 카멜레온이 되어버려 발견하기 까다롭다. 각별한 긴장이 필요하다. 한번 길을 잘못 들면 체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해 코스의 완주가 어려울 수 있다. 야무진 동반자와 함께 걷던, 내가 똑똑해지던 출발 전 철저한 준비가 필수다.
보색과도 같은 제주와 강원의 매력을 길 위에서 비교 감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장애물이 덜한 올레길은 지극히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을 시공간의 이동과 더불어 감상할 수 있는 반면, 강원도의 운탄고도는 단속적이다. 미친 듯한 풍경을 보여주고는 이내 숲 속의 어둠으로 안내한다. 숲 자체의 감상도 훌륭하지만 산림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다시 압도적인 광경이 충격으로 각막을 때린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동강의 장관이요, 저 마을을 타고 돌면 태백의 절경이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리는 프레임. 마치 뒤에서 두 눈을 가리고, "내가 말할 때까지 눈 뜨지 마." 하는 연인의 준비된 깜짝쇼와도 같다. 가슴 벅찬 스폿을 마주하는 방식으로 따지면 올레길은 레드카펫이 끝없이 깔린 아날로그, 운탄고도는 썸네일이 깜빡이는 디지털이다. 0과 1의 끊임없는 조합.
영월군의 하위 행정구역 이름은 즉물적 매력이 팡팡이다. 북서쪽에 있는 '무릉도원면'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복사꽃이 피는 봄에 이 부근을 지나게 되면 두 눈에 이상향을 담아갈 수 있다. 법흥계곡을 둘러싼 산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간은 기능을 잃어버린다. 과거 수주면이었던 이곳은 면민들이 고장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새 이름을 원해, 주민 주도로 지난 2016년 무릉도원면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이후에 소폭이지만 인구도 늘고 관광객의 방문도 늘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있는 '한반도면'은 어떤가. 우리나라에 한반도 지형을 닮은 곳들이 명소화되면서 우후죽순, 새싹 올라오듯 늘어나고 있다. 실눈 뜨고 전국의 땅을 관찰하고 다닌다면 한반도 모양 비슷한 땅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기도 하다. 영월군 한반도면 또한 옹정리의 평창강 지류 근처가 한반도의 지형을 닮았다는 이유로, 지난 2009년 서면이라는 옛 이름에서 개명된 비교적 신생인 면이다. 오늘 걷고 있는 운탄고도 2길은 '김삿갓면'에 걸쳐 있다. 영월군의 동남쪽에 있는 이곳은 조선의 방랑시인 김병연, 즉 김삿갓의 묘가 발견돼 외부에 알려지면서 역시 2009년, 하동면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인물의 이름을 내세운 면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괜한 해석이 필요 없다. 무릉도원과도 같아 무릉도원면이고, 한반도 지형을 닮아 한반도면, 감삿갓의 묘가 있는 김삿갓면이다. 공통점도 딱 떨어지도록 명백하다. ①관광활성화 목적으로 ②주민이 주도해 ③비교적 최근에 명명된 행정구역인 것이다. 흔히 마을은 주민 스스로 만들어가야 제맛이라고 하는데, 영월군의 면민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어렵지 않은 명제인 듯하다. 예언 한번 해볼까? 남아있는 북면과 남면의 이름에도 머지않은 미래에 기가 막힌 변화가 있을지어다. 당연히 주민들이 발의해서, 주민들의 아이디어로 말이다. 힘내세요, 북면과 남면 주민 여러분!
더 이상 쾌적할 수 없는 날씨임에도 발바닥의 통증은 오게 마련이다. 흘러가는 경치에 몰입해 하나가 되려는 의지도, 느리고 좋은 생각들만 하며 걸어야겠다는 다짐도, 점점 뜨거워지는 발바닥의 온도에 반비례해 밑천을 드러낸다. 다시 에고는 자연에서 세속으로. 마을 버스정류장의 의자에 앉으니 일 생각이 무럭무럭. 다음 주에 해야 할 업무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하나씩 정리해 본다. 아니, 정리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정리가 되어 공중에 말풍선으로 하나씩 떠오른다. 휴일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한탄하지만 곧이어 뒤따르는 감정의 반전. 가끔은 이런 순간이 요상한 행복으로 체감될 때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열대 해변의 리조트에서 휴가를 끝내고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망고빙수를 입에 넣고 직장을 떠올리려니 짜증도 나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짜릿한지. 지금쯤 아침회의가 한창일 사무실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여기 있지롱~'. 진심 가득한 조롱이 특권으로 다가온다. 조롱의 '롱'은 그래서 '롱'이 되었나 보다. 메롱!
망고빙수와 곁들이는 세속의 걱정이 적당한 선에서 그치면 차라리 소소한 행복이 되겠지만,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기분 좋은 휴가를 통째로 망칠 수도 있다. 오랜만에 쟁취한 자유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해 다시 맞닥뜨려야 할 일상이 공포로 체감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말을 보낸 뒤 맞는 월요일이나 휴가에서 돌아와 생업으로 뛰어드는 첫날에 절망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꿀 같은 쉼 후 다시는 열일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막상 일에 뛰어들어 그 중심에 나를 놓아버리면 차라리 안도가 된다는 사실을. 잠시 차분한 점(點)으로 여유롭게 존재하던 나를 다시 급류로 던져버리면 흐름을 탈 수밖에 없는 선(線)으로 순식간에 변신이 가능하지 않은가. 뜨거움이 겁나거든 용암 속으로 뛰어들어라. 오체투지만이 답이다.
모든 것이 일제히 움직일 때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배를 타고 있을 때가 바로 그렇다.
모든 사람이 타락해 가면 누구도 타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가 멈춰 선다면, 그는 고정된 하나의 점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가 있다.
- 파스칼 <팡세>
온갖 상념이 뒤엉켜 날아다닌다. 이 순간도 속세인데 속세를 혐오한다며 잘난 체를 한다. 에고의 분투! 강원도의 기운을 밟으며 발바닥의 온도를 높이는 오늘의 나는, 그래도 선보다 점이다. 잠시 멈춰 선 점이다. 움직이고 흘러가는 많은 것들이 슬프게 느껴진다. 흐르는 것들에 대한 연민. 그것만으로도 운탄고도를 걷는 효용은 차고 넘친다.
목적지 모운동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전 만나는 예밀리는 오아시스다. 예밀교차로를 지나는 순간, 강한 포도향이 코를 지나 대뇌피질을 때린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두꺼운 껍질이 어깨 위를 이불처럼 덮는 느낌. 이런 게 힐링이다. 힐링을 넘어 가슴이 뛴다. 막힐 것이 없는 강원도의 외딴곳에서 불현듯 조향사의 마법이 펼쳐진다. 예밀리라는 이름에 섹시함 마저 감돈다. 즉물적인 '김삿갓'면에 이토록 달달하고도 세련된 마을 이름이라니. 1914년 예의와 미풍양속을 건양한다는 뜻의 '예미(禮美)촌'과 '밀골(密谷)'이 합쳐져 아이스크림보다 부드러운 명칭의 행정구역이 탄생했다. 빽빽하게 가득 찬 건 예의범절만이 아닌 듯하다. 농밀한 유혹으로 넘치는 예밀리는 운탄고도 2길의 가파른 후반전을 앞두고 반드시 쉬어가야 할 황홀한 베이스캠프다.
예밀와인 힐링족욕체험센터
얼마나 많은 순례길이 이렇게 대놓고 '족욕'센터를 갖추고 있을까. 와인을 부은 물에 퉁퉁 부은 발을 담그고 시음용 와인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 나는 오늘 첫걸음을 걷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석회암 토질에 풍부한 일조량과 큰 일교차를 보이는 예밀리가 당도 높은 품종의 포도 생산 적지라는 사실은 외워둘 필요 없는 상식이다.
활력 뿜뿜으로 2길의 정점인 모운동을 향해 오른다. 족욕을 하고 나와 완충 상태가 분명했는데 생각보다 체력의 눈금이 급격히 떨어진다. 망경대산의 비교적 가파른 산길을 올라서도 그렇지만, 족욕체험센터에서 사 버리고 만 와인 두 병이 문제였다. 배낭을 가볍게 하려고 간식도 많이 넣지 않았는데 예밀리 여신의 꼬임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될 것을 멍청하게 현장에서 사 버리다니. 아기를 업고 집에 가는 엄마처럼 힘들어도 어쩔 수없다. 가야 한다. 뚜껑을 열고 마셔버릴까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무게를 줄이려면 없애야 하니까. 심사숙고의 결과. 운탄고도 순례자 최초로 만취해 구조된 사례로 남을 순 없었다. 늘 그렇듯, 멍청하면... 몸이 고생하면 된다.
모운동 마을
마을의 이름에 혼을 뺏기는 것도 유분수지, 이번엔 구름이 모여드는 마을이란다. '모운동(募雲洞)'. 자신의 특질과 너무도 들어맞는 공간들의 작명 쇼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없다. 전국의 모든 지명엔 각각 맞춤한 사연들이 존재할 텐데, 모조리 들춰내고 싶다. 공간성애자의 광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신박한 전국의 마을이름들이여 내 앞으로 다 모엿!
운탄고도 3길은 마무리가 급격한 내리막길이라 비교적 안온한 결말을 맞을 수 있는 반면, 2길의 피날레는 남아있는 에너지를 긁어모아 산길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영광의 증거다. 길의 끝에서 성취감은 가득이지만 아이고 나 죽겠네 식의 엄살도 피할 수 없다. 이 길을 낙점했던 이유 중 하나가 흐려진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모운동의 모습엔 꽤나 활력이 넘쳤다. 해발 1088미터 망경대산의 중턱, 약 700미터 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의 오늘은 화면과는 딴판이다. 폐광촌이 그렇듯 1980년대까지 인근 옥동광업소의 호황으로 먹고살만했던 마을은,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주민들이 떠나고 휑한 오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구름이 모여드는 낭만을 소유한 동네를 가만히 놔둘 순 없었다. 모운동을 살려보려는 사람들은 알록달록 벽화를 그려 넣었고 아기자기 박물관도 조성했다. 덕분에 제법 유명세를 저축하며 산골마을 탐방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오늘만 인적이 드문 것이겠지. 오히려 한적해 좋지 않은가. 서늘하지만 무해한 발걸음을 의식하며 마을을 탐색한다. 코스를 정복한 자의 거만이 동반한다.
부모님은 교사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영어, 어머니는 국어. 그러니 수학이 싫었을 수밖에. 외동인 꼬마는 책가방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 아파트 문을 열고 소파 속으로 뛰어든다. 소파는 생크림케이크.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엄마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오늘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겠지.
"외로웠겠네."
그게 혼자여서 느끼는 어떤 텅 빈 느낌이라면
"네."
혼자여서 싫었던 감정이라면
"아니오."
텅 빈 느낌이 나쁜 상태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로보다는 부러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 번도 쓸쓸해 미치겠다고 느낀 적은 없다. 혼자 먹는 밥은 여유롭고, 홀로 보내는 시간은 꼬마라 할지라도 농도가 짙다. 열쇠보이가 자란 지금도 달라질 건 없다. 혼밥은 설레고,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쓰기와 읽기는 얼마나 짜릿한지.
핏줄이라서 발달되는 초감각이 있다. 뒹굴뒹굴 굴러다니다가도 아파트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에서 가족의 아이디를 어렵지 않게 식별한다. "투벅 투벅". 모르는 사람이다. 무심해진 나는 계속 뒹굴뒹굴. "착착착착". 아, 엄마다.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현관으로 달음질한다. 엄마가 미역국을 끓이는 사이 포착되는 "척 척 척 척". 아빠가 왔구나. 가슴팍으로 점프를 해야지.
걸음이란 게 그렇다. 무리에서 나와 나만의 길을 찾으려 할 때 비로소 자각되는 두 발의 움직임. 불완전하고 외로운 존재 하나를 향해 다가가는 누군가의 소중한 크레센도. 나아가는 걸음은 조연이 되어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떠받든다.
운탄고도에서의 걸음은 두 말할 필요 없는 '무리에서 나와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한 움직임.' 그런데도 나는 길을 걸을수록 무리로 되돌아간다. 무리라기보다는 울타리. 어쩌면 그게 진정한 걸음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구름이 모여드는 모운동 마을에도 엄마아빠가 돌아오는 걸음걸이가 가득했겠지. 사람들이 떠나가버린 동네의 길목에서 발걸음 소리 하나 얹어주는 것. 내 걸음도 무가치한 것은 아니겠구나. 발바닥의 피로가 풀린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시장에 가서 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는 소년. 그래서 '엄마를 걱정'.
혹은 섬처럼 집에 둥둥 떠 있을 소년을 걱정하는 엄마. 그래서 '엄마의 걱정'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우리 엄마는 왔다. 착착착착. 상춧잎 갚은 발소리로.
점점이 박힌 모운동의 울타리들에도 화수분 같은 발걸음 소리들이 부활하기를.
영월의 산중턱에서 노랑과 주황이 마구 섞이고 있다. 어느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