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숲, 페를라허 포르스트 공동묘지 ①
청량한 뮌헨 라거의 성분엔 천연 숙취해소제라도 들어있는지 부담 없는 아침은 당연한 듯했다. 주당들 앞에선 두 말할 나위 없는 소리다. 그들에게 독주도 아닌 맥주는 마셔봤자 배만 부르는 음료수일 뿐이니까. 독일인 앞에서도 쓸데없는 설명임엔 마찬가지다. 식사의 범주에 들어가는 맥주를 섭취하는데 취할 까닭이 없으니까. 원활한 장 운동으로 가벼워진 육체를 이끌고 도시의 남쪽 외곽으로 향한다. 하늘도 상쾌하다. 추모하며 감탄할 공간은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근엄하거나 화려한 입구란 찾아볼 수 없고 방문객을 위한 번듯한 안내판도 없다. 있었다면 식별이 어려운 곳에 설치되었거나 시인성이 형편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찾지 못했겠지. 멀리 묘비들의 군락이 보여도 과연 제대로 찾은 것인지 의심병이 도지게 만드는 추모의 현장, 페를라허 포르스트 공동묘지(Friedhof am Perlacher Forst)다.
운전을 하고 오지 않을 경우엔 뮌헨 중심가에서 18번 버스를 타고 '백조의 호수 거리(Schwanseestraße)'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근처 어디에 호수가 있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정류장과 불과 십여 미터 거리에 묘지의 입구가 있다. 단조롭고 휑한 모양새다. 한쪽만 열린 철문에선 지각을 면하려 정면 돌파해야만 했던 학교 정문의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남독일 최고의 문화도시 뮌헨이 자랑하는 대규모 공동묘지엔 어울리지 않는 첫인상이 아닌가. 입구에서 시작되는 자갈길의 진입로는 묘지 내부 깊숙이 그대로 이어져 구역을 양분한다. 나무들은 듬직하되 무겁지 않게 묘지를 호위하고 있다. 풍성한 잎들은 차양막이 되어 고맙게도 여름날의 직사광선을 가려준다. 'Forst(숲)'을 묘지명에 굳이 포함한 이유를 알겠다. 한산한 묘지에서 유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묘비를 닦고 화초를 정리하고 있다. 페를라허 묘지는 앞으로도 가족묘를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이 광활하다. 이 넓은 구역을 돌려면 처음부터 무리하면 안 될 일이다.
건축가 헤르만 라이텐스토르퍼의 설계를 바탕으로 1931년에 조성된 묘지에는 골고루 빛이 쏟아진다. 특정 구역을 돌출시켜 강조하는 유난은 떨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묘지에 같은 농도의 배려가 있다. 특별대우란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공원묘지를 다독이는 숲의 기운은 추모를 편안한 감성으로 순화한다. 애써 슬픔을 강요하거나 애도를 부추기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영면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자들의 추모에도 최적의 공간이다. 그러나 어찌 전범국의 묘지에 부드러운 죽음 의례만 있었을까. 옛 것이 평범한 유럽에서 100년도 안된 장례와 추모의 장소는 신생아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페를라허 포르스트 묘지는 개장 직후 독일 역사의 비극을 증언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 남매의 이름을 빼놓고 남독일의 나치 저항운동을 말할 순 없다. 5남매 중 둘째와 넷째로 태어난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 숄(Sophie Scholl). 히틀러 체제의 영속을 위한 어린이 친위대 격인 히틀러유겐트의 단원으로 활동했던 남매는 강압적 훈련과 사상의 통제, 검열을 경험하며 나치 사상의 주입에 회의를 품었다. 뮌헨대학으로 진학한 한스는 강제 수용소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뜻을 함께 하는 친구, 교수들과 '백장미단'이라는 반 나치 모임을 결성했고, 동생 조피도 대학생이 되면서 백장미단에 가입해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는 전단을 작성하고 배포했다. 죄 없는 사람들이 학살되고 있는 수용소와 각자의 미래를 위해 순진한 정진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교, 천인공노할 나치의 명령을 기꺼이 따랐던 본인들의 히틀러유겐트 시절이 참을 수 없는 부조리로 엄습하면서, 한스와 조피는 시대의 비인간성을 낱낱이 문장에 담아 교내외에 알린 것이다. 체포를 각오하고 벌인 일이니 뮌헨대학 수위의 신고로 게슈타포에 잡히는 순간에도 이들은 놀라지 않았다. 초고속으로 집행된 재판에서 남매를 비롯한 백장미단원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시작한 재판정에서는 기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사형 집행 역시 초특급이었다. 선고 후 몇 시간 만에 숄 남매와 그들의 친구 크리스토프는 참수형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사형 집행 직전 크리스토프가 숄 남매에게 툭 던진 말이 압정이 되어 심장을 찌른다.
"죽음이 이렇게 간단한 줄 몰랐어."
뮌헨 시는 뮌헨대학의 중앙광장을 숄 남매 광장(Geschwister Scholl Platz)으로 명명했고, 백장미단원이었던 쿠르트 후버(Kurt Huber) 교수의 이름을 딴 후버 교수 광장을 그 건너편에 조성했다. 연좌의 그물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숄 남매들의 맏딸 잉에 숄(Inge Aicher-Scholl, 1917~1988)은 나치 패망 후 <하얀 장미>라는 책에서 나치의 만행과 동생들의 희생을 세계에 증언했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1978년에 출판되었다.
활짝 피어났어야 할 하얀 장미의 꽃잎들은 그렇게 광기에 뜯겨 흙 속으로 되돌아갔다. 백장미단의 꽃잎, 꽃잎, 꽃잎들이 여전히 투명한 정신을 발산하고 있는 곳, 여기 페를라허 포르스트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는데 알게 모르게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한다. 남들의 부고를 그렇게나 많이 접했어도 본인의 죽음은 절대 오지 않을 사건인 것이다. 고뇌하고 연구하고 탐색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죽음을 애써 외면하기 위한 눈가림이란 해석도 있다. 외면은 해 보는데 불현듯 찾아오는 존재의 한계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어떻게든 선한 삶으로 귀결시키려는 합리화 과정을 밟으며 모른 척했던 죽음 뒤의 시간을 인정하는 것이다.
숄 남매의 삶에는 죽음의 외면을 위한 고심은 없었다. 숄 남매의 죽음에는 어떤 정리도, 합리화의 시간도 존재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몰입한 시간과 존재 이후를 고뇌하지 않은 투신이 있었을 뿐이다. 역설일까. 남매는 양명한 기운이 감싸는 무덤에서 영원한 대학생이 되어 손을 잡고 있고, 준비 없이 맞은 세상과의 이별은 이 넉넉한 묘지에서 세상 사람들과의 재회로 되먹임 하는 중이다.
잠시 가라앉았던 공기는 다시 사뿐하게 떠오른다. 페를라허라서 안심이 된다. 여기서라면 안식을 얻을 수 있겠다, 당신들이여.
영원하라 백장미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