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묀히스베르크 vs 카푸치너베르크

호엔잘츠부르크 성에 올라

by Total Eclipse






시내를 굽어보는 유적이 있는 도시는 유리하다. 전망대만 따로 있는 곳과는 다르다. 최고의 뷰 포인트이자 랜드마크 그 자체가 고지에 떡하니 솟아있다면 관광객 유치 보험을 든 거나 매한가지다. 프라하 성이나 뉘른베르크 성 또한 유적지와 전망대 역할에 충실하다. 선대들이 순찰과 방어의 목적으로 언덕 위 험지에 지을 수밖에 없었던 요새는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보물이 되었고, 긴장과 경계로 성을 지키던 병사가 서 있던 자리는 감탄과 흥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관광객들의 차지가 되었다. 유적과 전망대로서의 호엔잘츠부르크 성(Festung Hohensalzburg)은 그 점에서 프라하 성이나 뉘른베르크 성보다 한 수 위다. 해발 500미터를 훌쩍 넘는 묀히스베르크산의 정점에 버티고 있어 높이로도 다른 랜드마크를 압살한다. 'Hohen'이 높다는 뜻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완만한 경사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푸니쿨라를 타고 급경사면을 거스른 끝에 마주해야 하는 유적이므로 도심이 바로 발아래 직각으로 놓인다. 그래서 풍경은 잔잔하지 않고 극적으로 시야를 도발하는 것이다. 높이는 권력에 비례한다고 하지 않던가. 잘츠부르크 전경을 감상한다는 핑계로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봐야 하겠다. 산길을 따라 걸어갈 수도 있지만 오늘은 중력을 급격히 역행하러 푸니쿨라 탑승장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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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지나치기 쉬운 탑승장(Festungbahn)에서 푸니쿨라에 탑승한다


푸니쿨라의 운동에너지는 위치에너지로 바뀌어 탑승객의 신분을 급상승시킨다. 고성(高城)의 앞마당에 착륙한 사람들은 최고의 조망을 발치에 두려 최적의 위치를 탐색한다. 걸음은 빨라지고 호흡도 가빠진다. 느닷없이 열리는 잘츠부르크의 평면도를 마주하기 위해 신체부터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국민 맥주 슈티글(Stiegl) 상호가 그려진 천막 뒤로 아이보리색의 높다란 성벽과 이어진 원통형 망루가 굳건하다. 오른편의 장엄한 성채에 감탄하면서도 심장은 이미 왼편의 전경을 그리고 있다. 이 지점에서 참을성을 유지하는 자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바쁜 걸음으로 수 십 미터를 더 나아가 마침내 잘츠부르크를 한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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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_184923.jpg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의 전망


반대편 현대미술관에서의 조망이 호엔잘츠부르크 성을 주연으로 삼고 있다면 성 위 전망의 주인공은 잘츠부르크 시가지 전역이다. 파리의 에펠탑에서는 정작 탑의 풍경을 볼 수 없지만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는 성의 구조물이 각도에 따라 피사체로 참여하면서 그 자체로 잘츠부르크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조망하는 자의 망막에 기록된다. 1077년 대주교 게브하르트의 명령에 따라 지어진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순수한 방어용 성이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증축만 거쳤을 뿐, 유럽의 곡절을 거듭한 역사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잘츠부르크를 든든하게 방비해 온 성은 이제 각종 축제와 행사의 무대로도 활용되고 있어 잘츠부르크 시민이나 방문객들에겐 축복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성에 오른 사람들은 탐방객이라기보다는 미술관의 관람객에 가깝다. 위치를 바꿔가며 도시의 동서남북을 각자의 프레임 안에 넣고 원경에서 근경의 이미지를 나누어 감상한다. 잘자흐 강과 강으로 나뉜 도시의 남북을 비교해 가며 내가 걷고 건너고 들어갔던 구역들을 세밀하게 잘라내 이미지 파일 속에 저장한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는 도시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길이를 늘이고 또 줄이면서 도시의 파노라마는 변화무쌍한 실체로 거듭난다. 알프스와 잘자흐의 은혜로 소금과 음악의 도시가 된 잘츠부르크는 침략된 적 없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의 방어력으로 인해 그 번성과 영광을 생채기 없이 이어나갔던 것이다.

노케를.jpeg 잘츠부르크 노케를


잘츠부르크 디저트계의 대마왕 노케를(Nockerl)이다. 한 입 베어물 때의 식감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머랭을 쳐서 채워놓은 속에 슈가파우더가 뿌려진 겉면. 구강과 닿는 순간의 포로롱한 감촉은 이내 몽실몽실한 부드러움이 입 안에 침투하면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선사한다. 일반화하자면 수플레의 맛이고, 커피에 곁들인다면 천상의 궁합이다.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딱인 까닭에 최근에야 나온 디저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무려 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잘츠부르크 전통의 빵이다. 칼로리 걱정일랑 저 멀리 던져버리고 이런 건 먹어주는 게 여행자로서의 도리다. 재미있는 것은 노케를의 모양인데, 세 개의 뿔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가이스베르크(Gaisberg), 묀히스베르크(Mönchsberg), 카푸치너베르크(Kapuzinerberg) 산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봉우리에 뿌려진 슈가파우더는 그러니 정상에 쌓인 눈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실제로 잘츠부르크를 감싸는 삼 형제의 산 중에 가이스베르크 산은 상대적으로 잘츠부르크 동쪽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편이어서,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명확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성채가 서 있는 묀히스베르크의 산자락과 잘자흐 강 건너에서 성을 마주 보고 있는 카푸치너베르크 산이다.

카푸치너베르크.jpg 호엔잘츠부르크 성에서 바라보는 카푸치너베르크 산


카푸치너베르크의 산허리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의 명칭은 당연히 카푸치너 수도원이다. 카푸치너 수도원이니만큼 카푸치노 빛깔의 수도복을 입은 카푸치너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조성한 성스러운 공간일 것이다. 노케를의 한 봉우리인 카푸치너베르크 산에는 또한 잊힐 수 없는 한 작가의 피정(避靜)의 안식처가 숨어있다. 빈에서 태어나 세계적 전기 작가로 명성을 떨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도서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거나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매대를 둘러보면 지금도 그의 저작들은 거듭되는 개정판으로 꾸준히 팔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역주행으로 수차례 진입을 반복하며 많은 무명작가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바로 그. 잘츠부르크는 츠바이크를 유혹했고, 츠바이크는 잘츠부르크에서 위안을 찾았다. 평화주의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도시에 얼마나 기댔던 것일까.

츠바이크.jpeg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


「광기와 우연의 역사」「감정의 혼란」「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비롯해 소설「체스 이야기」, 주특기인「발자크 평전」「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니체를 쓰다」(이상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제목)를 위시한 전기류 등 모든 저작들은, 다작을 오롯이 수작(秀作)으로 잇는 그의 엄청난 필력과 지식을 증명한다. 타인의 삶을 지면으로 옮기는 것에 익숙했던 그는 나치의 폭압과 2차 대전의 조짐에 괴로워하며 고국을 떠나 본인의 전기 「Die Welt von Gestern (어제의 세계)」를 집필하게 되는데, 벽돌처럼 두꺼운 이 책에는 그의 전 생애가 고스란히 스며들어있다. 불세출의 작가들께선 가능하면 츠바이크가 그랬듯 자서전을 써주시는 게 좋겠다. 후대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데 그것만큼 확실한 자료가 있을 턱이 없으니 말이다. 두껍지만 무기로 쓰기엔 가벼운「어제의 세계」는 무섭도록 빨리 읽힌다. 진도가 KTX급이다. 그 말은 쉽고 흥미롭게 쓰였다는 뜻이다. 또한 저자의 깊은 의도를 독자에게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배려가 그의 지적 능력과 조화를 이루었다는 증거다. 훌륭한 외국의 작가를 판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 번역자가 누군가에 상관없이 술술 읽힌다면 그 책의 저자는 능력자다. 시대의 지성인 그의 생애는 물론이고, 평화의 세기말과 혼돈의 세기초 국제 정세까지 읽어낼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츠바이크의 잘츠부르크를 묘사해 본다.

어제의세계.jpeg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지식공작소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서전을 쓰게 된 동력은 회한이라고 생각한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며 장서가로도 이름을 날렸던 그는 20세기 초의 격동으로 인한 좌절이 아니었다면 평생 타인의 인생과 시대의 정신을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지적인 성장과 문화적 고양의 시대가 빗나간 민족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산산이 무너져 내린데 대한 열패감은 츠바이크로 하여금 한탄의 문장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뷰유한 직물업자인 아버지와 유대계 은행가 가문의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난 슈테판 츠바이크는 예술과 문화의 수도인 빈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가지만, 1900년대 유럽 내 갈등의 징조를 포착하고 불안한 정세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에 휘말린 고국을 떠난 그는, 전후 오스트리아로 복귀하며 이미 구입해 놓은 집이 있었던 잘츠부르크에 머물게 된다. 중앙 무대에서 주목받던 스타 작가가 아는 이 없고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 거처를 만들어 집필에 몰두하려는 상황과 흡사하다고 해야 할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집은 카푸치너베르크의 가파른 언덕에 자리해 수많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만큼은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었던 츠바이크에게는, 열악한 접근성이야말로 보금자리를 고르는 최우선의 기준이었다. 고독과 집필에 몰두했던 그의 안식처 잘츠부르크는 그러나 1920년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과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삼인방이 주도해 창설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계기로 문화의 핵이 되어버렸다. 도시가 뜨자 사람이 몰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부동산 매입에 재능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계단 좀 오르면 어떠랴. 내로라하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츠바이크의 거처로 들이닥쳤고, 그의 산중 보금자리는 세기의 인물들의 회합의 공간으로 기능이 바뀌고 말았다.

빌라 츠바이크.jpg 빌라 츠바이크(Villa Zweig)라 불리는 지금의 모습
슈테판츠바이크 인 빌라츠바이크.jpg 빌라 츠바이크에 머물던 시절의 슈테판 츠바이크


유명세를 치르게 된 소금 광산의 도시 잘츠부르크로 츠바이크를 만나러 온 인물들의 면면을 보자. 로맹 롤랑, 토마스 만, 후고 폰 호프만슈탈, 제임스 조이스, 폴 발레리, 아르투르 슈니츨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반 베르크, 브루노 발터... 그 외 어마어마한 다수.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문화의 산실이 되어버린 '빌라 츠바이크'가 아닌가. 그의 방문객 중 극소수는 머지 많은 미래에 나치의 문화선전에 순순히 협조를 하기도 해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지인들은 히틀러의 집권 이후 나치의 폭압에 맞서며 강고한 정신으로 연대했다는 점에서 카푸치너베르크는 문화사적으로도 빼놓을 수 없는 성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 후에 바라본 츠바이크의 예술에 대한 시각엔 한계가 분명하다는 시각도 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상상을 넘어선 인플레이션으로 혼란에 빠진 독일에서 반공 메시지와 반유대주의로 득세한 나치즘과, 자본가와 손잡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며 저항할 수 없는 전체주의를 빚어낸 이탈리아의 파시즘의 발흥을 생생하게 체득한 츠바이크에게 급격히 변해버린 문화예술의 경향은 비판해 마땅한 것이었다. 세기말 화려하게 꽃 피운 유럽의 문화는 성실함의 결과물이었다. 선대에 쌓아온 고전의 형식에 지혜를 더해 오직 진화만 거듭할 뿐인 상승하는 나선의 궤도가 당대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당혹스럽게도 전후의 어수선함 속에서 새로운 세대의 삶은 이탈 그 자체였다. 선대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도발로 세상을 표현했다. 큐비즘과 초현실주의는 미술의 확고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고, 과격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만이 문학으로 취급되었다. 모든 음악은 박자를 쪼개거나 새로운 음조에 열광했으며 심지어는 조성을 죄악시하는 '무조'음악까지 탄생해, 전통을 존중하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러한 경향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는 결론에서 "이 새로운 젊은이들은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참을성이 없기는 했지만 우리 세대가 신중함과 방관적 태도 때문에 게을리했던 것을 개선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라며 시대의 전환에 대해 인정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빌라 츠바이크는 츠바이크에게 세기말부터 번영해 온 고급문화예술의 향수를 마지막으로 음미할 수 있었던 이상향이자 삽시간에 침투하는 낯선 정신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설 수 있었던 피난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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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치너베르크산의 언덕배기에서 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빌라 츠바이크가 2024년 봄,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연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명차의 대명사 포르셰의 회장 볼프강 포르셰. 그는 몇 년 전 구입한 빌라 츠바이크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면서 별장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잘츠부르크 시내가 내다보이는 100여 년 전 명사의 집에서 머물고 싶다는 의도에는 문제가 없으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좁고 굽은 길을 운전해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못한 포르셰 회장은 산 아래 주차장에서 산속 빌라를 잇는 개인 터널을 뚫겠다고 시 당국에 건축 신고를 낸 것이었다. 이 황당한 건축 계획을 승인한 보수 정당 소속 잘츠부르크 시장이 2024년 3월 선거에서 사민당 소속 후보에 패함으로써 '포르셰 터널계획'의 전모가 시민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적인 용도로 깎일 위기에 놓였던 카푸치너베르크는 터널 건설 철회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애초 사람들과의 접점을 차단하기 위해 가파른 집을 고집한 츠바이크가 이 해프닝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여간 요즘 친구들은..." 대략 이 정도?


시야를 내부로 돌려 호엔잘츠부르크 성 안을 둘러본다. 방어용 성채라고 하지만 작은 마을과도 같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공간들이지만 광장을 품고 있는 성채의 각 건물에선 중세의 병사들이 당장이라도 뛰어나올 것만 같다. 천공의 동화 속 공간으로 느슨하게만 그려졌던 성에는 외부를 겨냥하는 대포가 놓여있어 본디 요새의 기능을 각인시킨다. 성채의 허리를 따라 남향으로 둘러가면 지붕이 덮인 회랑이 성의 각 부분을 잇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어 입체적인 내부 구조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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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_190139.jpg 호엔 잘츠부르크 성의 내부와 동남쪽 외벽의 회랑


잘츠부르크 시내와 정 반대 방향에 테라스가 있다. 사진으로는 절대 담지 못할 파노라마를 목도하는 자리다. 산악이 압도하는 경치도 아니고 들판의 평화로움만 가득한 장관도 아니다. 이걸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걸맞은 형용사를 고민해 보지만 그냥 입 벌리고 바라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도시의 외곽엔 이렇듯 말로 다 할 수 없는 세상이 놓여 있었구나.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시야에 들어온 이 프레임을 소화가 될 때까지 씹으며 음미하겠다는 다짐이다. 구름 한 점, 봉우리 하나 풍경화로 복제하듯 다시 그려 넣을 수 있도록 외우겠다는 각오. 20분도 넘게 그 자리에 박혀있었던 까닭이다. 츠바이크에겐 미안하지만 정상에서의 감회는 묀히스베르크 산이 한 수 위가 아닌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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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_191203.jpg 호엔잘츠부르크 성의 남쪽에서 바라보는 경치


호엔잘츠부르크에서 벼락같이 마주친 풍경의 방향으로 약 20여 킬로미터를 가면 베르히테스가덴(Berchtesgaden)이라는 휴양도시가 있다. 바이에른 알프스의 낭만이 환상적인 이 독일의 도시는 히틀러의 거점이었다. 휴양지의 매력에 흠뻑 빠진 히틀러는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았고, 히틀러의 사랑을 받은 도시는 수탈을 당해 역사의 아픔이 되었다. 강제 징발한 토지에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등 나치의 주동자들도 거처를 짓고 히틀러를 보좌했으며, 지금도 독수리 둥지로 불리는 히틀러의 여름 별장이 남아 있어 아름다운 도시의 씻을 수 없는 흉터가 되고 있다.「어제의 세계」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잘츠부르크의 남쪽 하늘을 보며 수차례 회한에 젖는다. 단순하게 말하자. 모든 것을 빼앗기고 고국에서 도피한 이유는 아돌프 히틀러 때문이었으니까. 유대인의 신분에서 민족주의를 멀리했던 츠바이크의 책은 나치에 의해 불태워졌고, 츠바이크는 런던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에서 여생을 보내며 1942년, 유서를 남기고 그의 부인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이 정도면 최선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침략과 2차 대전의 조짐을 봐서 나에게 미래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남은 벗들은 밝은 앞날을 목격할 수 있기를.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 아닌 나에게 나치스와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특별히 괴로운 입장으로 몰아넣는 역할이 주어졌다. 나의 문학적 모습이 바로 모든 추방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베르히테스가덴 산장의 최고 서클에서 되풀이하여 강렬한 자극과 무한한 논쟁이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현대에 가장 권력이 강한 인물인 아돌프 히틀러로 하여금 한동안이나마 성을 내게 만들었다는 소소한 만족감을 내 생애 즐거웠던 일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의 세계 」 p471~472


소소한 복수가 매캐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공이다. 츠바이크 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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