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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중요한 건 간판이니까

게트라이데 가세

by Total Eclipse






걷고 싶은 길이 있다. 누구에게나. 감성에 예민한 사람들에게 걷고 싶은 길이란 하위분류를 해야 할 정도로 다양한 범주를 거느린다. 주말에 찾은 한적한 시골길의 고즈넉함도 좋지만 도심이라고 해서 위안을 주는 길이 없는 건 아니다. 시골길에는 논두렁을 따라 걷는 농심의 길이 있겠고, 나만의 뷰포인트가 연속되는 해안 올레길도 있을 것이다. 옛 철길을 따라 늘어선 힙한 가게들이 행인을 미소 짓게 하는 도심 속 숲길도 반갑기 그지없고, 사대문을 에워싸고 대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도성길도 일품이다. 차라리 첨단과 유행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강남의 찬란한 밤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시대를 감상할 수 있는 훌륭한 도보 코스가 아니던가.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싶게 만드는 요소 역시 단순하지 않다. 멋진 배경은 아름다운 길의 제1조건이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맥이라는 자연의 배경이 있다면 마천루의 숲이 늘어선 인공의 배경도 있다. 자연과 인공의 혼합으로 만들어지는 걷기의 명소도 만만치 않다. 우리로 하여금 유럽의 거리를 선호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는 노천카페의 여유로움이다. 까짓 거 우리 동네 사거리에도 야외 테이블과 의자를 길가에 내놓으면 될 법한 일인데, 도로법에 저촉되거나 거리의 분위기와 도통 어울리지 않는 등 여의치가 않다. 한국의 거리문화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미슐랭 맛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한 유럽 노천카페는 대개 있을 법한 포인트에 있게 마련이다. 수 백 년을 버티며 방부 처리된 듯한 중세의 건물군 사이에 작정하고 들어선 카페거리는 자연화된 인공의 마력으로 여행객들을 걸어 들어오게 만든다.

20240819_205035.jpg 뉘른베르크 노천카페 거리


농촌의 주택에 살며 한갓진 풍경을 주로 바라보고 사는 나는 어쩌다 걷게 되는 도시의 길거리가 활력소다. 스마트폰에 피로해진 두 눈은 도심의 불빛에 더욱 지치곤 하지만 매연과 향수의 범벅인 인공의 공기가 가끔은 폐 속으로 들어와야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는 거리의 공해가 있으니 그건 바로 온갖 간판으로 뒤범벅된 상가 건물의 압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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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으로 환해진 밤은 문제가 아니다. 음식점과 노래방, 술집의 광고판으로 얼기설기 도배된 건물들의 집합은 질식을 유발한다. 가독성(可讀性)보다는 무조건 가시성(可示性)이 우선인 듯하다. 어서 들어오라는 간절함이야 업주의 입장에서는 백분 이해가 되는 바. 다만 돋보임의 경쟁이 건물 한 동의 표피에서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어, 그 앞을 지나다간 자칫 영혼마저 뺏기는 건 아닐지 심장박동은 요동치며 경고음을 보낸다. 육면체의 콘크리트 건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질서 없는 글자체를 품고 있는 간판들의 구도는 내가 걸어가는 길에 불길함의 카펫을 깔아버리는 것이다. 숨통이 트이기 위해선 빠른 걸음으로 휘적휘적 이 구역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20240823_164626.jpg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가세


이튿날에도 잘자흐 강을 건넌다. 잘츠부르크 구시가지를 동서로 가르는 게트라이데가세에 접어든다. 자연풍경을 제외한 도시의 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변신을 하기 일쑤인데 32년 만에 찾은 이 거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인상이다. 빈약한 기억력 탓일 수도 있지만 그때 그 느낌과 정확히 겹치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그러나 당연하다. 우아한 전통이 드러나는 상가들의 행렬이 오랜 시간 이방인을 유혹해 왔는데 굳이 겉모습을 바꿀 필요가 없다. 아니 화려한 리모델링은 오히려 금물이다.

게트라이데(Getreide)는 곡물, 곡식을 뜻한다. 게트라이데가세는 그러니까 '곡물 창고 거리'쯤 되겠다. 300여 미터에 이르는 옛 길섶에 농산물 창고가 밀집해 있었다면, 소금과 곡물이 모여드는 이 도시는 정말 살 만한 곳이었을 것이다. 부자 도시의 영화는 소금과 곡물에서 문화예술과 관광으로 분야를 넘나들며 오늘날에도 꺾이지 않는다. 느려지는 걸음은 게트라이데가세의 파스텔톤을 흡수하고, 순수해진 시선은 경쾌한 간판에 가닿는다.

현대의 도회지에서 받는 간판의 압박은 왜 공해로 느껴지는 걸까. 수평으로의 연장은 물론이고 수직으로 포개진 광고판에서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간판들과 그림들, 글자들은 서로를 옥죄고 엉켜 붙어 사람들을 거미줄의 희생양으로 만들 것만 같은 기세다. 다른 이유는 형식의 잡탕이 아닐까. 형태에 따른 간판의 종류는 너무나도 많다. 도심에 사는 여러분,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라. 건물의 옥상 위로 솟아오른 대형마트의 간판이 있고 매장의 정면에 박아 넣은 프런트 사인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낮게 설치되면 보행자를 위협할 수 있는 돌출 간판과 의류 매장의 어닝 간판도 보인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유리면을 뒤덮은 윈도 시트의 어지러움에 더해 인도를 점령하고 있는 스탠드 간판과 통신회사의 풍선 인형은 걷는 이의 동선을 차단해 버리기까지 한다. 비싼 제작비를 들여 세련된 간판을 만들어도 별 소용이 없다. 주변의 카오스에 묻혀 무질서의 원흉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게트라이데 거리를 장식하는 간판의 가장 큰 미덕은 절제다. 어쩌다 과한 양식의 간판이 보이기도 하지만 얇은 철판으로 통일된 양식에 가려 단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간판 장식의 뚫린 틈은 무게감을 덜어주고 일렬로 연속된 간판은 절대 수직 방향으로 번지는 법이 없다.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개성이다. 무한정 허용된 자유가 주는 중구난방이 아니라 제한된 조건에서 꽃 피운 참신함이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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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트라이데가세 간판은 직관적이다. 중세 이후 수공업자들의 조합인 각각의 길드에선 가게 홍보를 위해 간판을 내걸기로 했는데 - 곡식 창고들은 이렇게 용도가 바뀌었을 것이다 - 문맹률이 높았던 지역사회에서 아무리 달콤한 문구와 상호를 새겨 넣어도 효과가 없을 것임을 알았던 그들은 그림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열쇠가게는 열쇠 그림으로, 빵 가게는 빵 그림으로! 때문에 경쟁업체보다 더 눈에 띄는 간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멋들어진 그림을 디자인해야 했을 테고, 모객 수단으로써의 간판의 기능은 이곳 게트라이데가세에서 절정에 달했다.

수 십 년 만이어도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판정단의 매의 눈으로 살펴보니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가 셀 수도 없이 이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는 걸 실감했다. 실망스러운 것은, 새로 입점한 가게들의 간판일수록 장식보다는 업체 명을 돋우는데 치중했다는 점이다. 이러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간판이 닮아버린 거리 풍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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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게트라이데가세의 간판


물론 단순하되 장식미 넘치는 전통의 간판도 있고, 프랜차이즈 업체지만 마치 잘츠부르크에 본점이 있는 듯 의뭉스럽게 신경을 쓴 곳도 있다. 음식은 '패스트' 푸드라 할지라도 간판만큼은 심사숙고해 '슬로' 사인으로 제작한 티를 숨길 수가 없다. 어차피 힘센 곳들이 앞으로도 들어서야 할 운명이라면 간판만이라도 독창적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반전이 있다. 구시가의 핵심인 게트라이데 가세에 있던 맥도날드는 비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눈물을 머금고 철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월계관 장식의 안에선 더 이상 로고 'M'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물가가 아무리 비싸도 햄버거를 팔아서 이 자리를 사수하기는 벅찼던 것인가. 그렇다 해도 초거대 기업 맥도날드인데, 손해를 보는 지점에는 가차 없는 비즈니스의 냉정함을 일깨워준다.

우산가게2.jpeg 게트라이데가세의 우산가게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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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이전과 이후의 맥도날드 간판


이 거리를 걸어본 관광객이라면 안 들어갈 수가 없는 모차르트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웃한 건물군보다 채도가 높은 노란색의 파사드는 이곳의 정체성이다.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덕분에 생가임을 모르고 지나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1747년 결혼해 전세로 들어간 집은 이 건물의 4층이었다. 볼프강은 1756년 일곱째 아이로 태어났고, 모차르트 가족은 여기서 1773년까지 살다가 앞서 본 강북의 '모차르트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도시 전체를 250년간 먹여 살리고 있는 모차르트 가문의 위상을 인정한다면 그가 태어난 이 성소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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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3_161945.jpg 모차르트 가족의 초상화와 클라비코드가 있는 모차르트 생가
모차르트 생가.jpg 모차르트 생가의 파사드


12세기에 지어진 모차르트 생가는 이제 박물관이 되었다. 4층으로 먼저 올라가 한 층씩 내려오면서 전시물을 관람하는 동선이다. 박물관의 정면에는 'Mozart geburthaus(모차르트 생가)'라는 건물명이 금빛으로 박혀 있는데 노란 바탕이 배경이어서 멀리 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색 대비를 노렸으면 얼마든지 주목할 만한 색을 사용했을 테지만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것 역시 간판의 일종이라 생각한다면 색채보다는 글자체의 잔향이 인상적이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발명과 동시에 시작된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는 용도에 맞춰 광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라틴어 활자에서 장식이 가미된 로마자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수출되며 지역색을 띤 스타일로 변모하게 된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각각의 타이포그래피가 가진 생물성이다. 날씨와 지형, 역사에 따라 외모와 옷차림, 음식이 달라지듯이 글자 또한 맞춤한 형태를 스스로 구성하며 개성을 갖는다. 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 님의 「글자 풍경 (을유문화사)」를 보면서 타이포그래피의 매력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는데, 글자체가 내포한 유전자가 얼마나 심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책에서 다룬 유럽의 두 글자체를 비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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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레터(좌)와 화이트레터(우)


유럽 대륙을 지리적으로, 심정적으로 양분해 온 것은 알프스 산맥이라고 했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은

"알프스 북쪽에선 내가 최고야." 혹은 "알프스 이남에선 그를 따라갈 자가 없다니까."

일상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 가공할 장애물을 넘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대단한 인물인 것이다. 지리학적으로도 산맥을 경계로 한 위아래의 기상과 기후는 대비를 이룬다. 기온이 낮고 해가 덜 비추는 알프스의 북쪽은 글자마저 움츠러든다. 산맥의 남쪽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의 글자체는 반면 투명한 날씨와 온화하게 내리쬐는 태양의 에너지를 담뿍 받아 둥그스름하고 품이 넓은 모양새다. 독일을 위시한 알프스 이북의 글씨는 블랙레터라 불렸는데, 글자의 폭이 좁고 수직성이 강하다. 그로테스크한 고딕 성당을 연상케 하는 긴장감 가득한 글자체다. 사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블랙레터는 텍스투라체(Textura), 로툰다체(Rotunda), 프락투어체(Fraktur), 슈바바허체(Schwabacher) 등으로 가지를 쳤다. 오른쪽의 화이트레터는 로만체(Roman Style)로 통칭된다. 블랙레터 두세 글자가 들어갈 공간에 통통한 글자 하나만 넣을 뿐이다. 수직과 수평이 다투지 않으며 고딕 성당이 아닌 피렌체의 두오모가 연상되는 스타일이다. 뭘 그리 빡빡하게 구느냐고 하는 것처럼 여유만만인 것이다. 침엽수 잎과 활엽수 이파리의 대면이고, 구름과 태양의 대립이다. 알프스의 위력은 대단하다.

모차르트 생가를 알리는 글씨를 보면 전통적인 블랙레터에서 꽤나 벗어나 유려한 곡선이 드러난 모양새지만 그 틀은 여전히 블랙레터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알프스의 자락에 매달려 있는 도시, 잘츠부르크에서는 타이포그래피조차 산맥 이북과 이남의 특징을 이렇듯 공유하고 있다. 간판의 거리 게트라이데가세에 서 있는 모차르트 생가는 파사드 사인의 글자체 만으로도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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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트라이데가세의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가 뚜렷해진다.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도시의 상징, 호엔잘츠부르크성이다. 단독자의 풍모는 감출 수가 없다. 게트라이데가세의 철제 간판을 감상하느라 쳐들었던 고개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서는 저곳으로 올라야 한다. 이젠 내려다봐야 할 순서다. 담백하고 귀여운 한글 간판이 멋들어지게 늘어선 대한민국의 거리를 상상하며 성 아래 절벽으로 접근한다. 이제는 최대치의 각도로 경추를 늘려야 목도할 수 있다. 직각에 가까운 저 위, 천공의 성이 둥실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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