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의 잘츠부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이야기를 하겠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거한, 그러나 연중 달뜬 채인 잘츠부르크란 도시의 내면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앞서 말한 대로 모차르트 일가와 잘츠부르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꿀벌과 벌집의 관계. 잘자흐 강의 표표한 물결과도 같이 그들의 삶과 도시를 허밍으로 이어주면 될 뿐이다.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는 제본공인 아버지의 아들로 독일 바이에른주의 중량급 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건물은 1937년 모차르트 하우스 박물관으로 단장돼 모차르트 가문의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레오폴트의 아버지가 제본공이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지식 추구에 몰두하고 진정한 예술 향유에 눈을 뜬 당대의 분위기에 인쇄술과 제본술의 급격한 발전이 편승하며 제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아졌을 것이다. 일로 활자를 접하는 일상에서 글자는 단어가 되고, 문장은 책이 되어 제본공과 그의 가족들은 지식과 문학, 음악의 습득에 유리했을 것이다. 범상치 않은 인물의 요람이 제본공의 가문이었다는 건 그래서 놀랍지 않다. 관객의 박수가 음악의 일부가 되는 <라데츠키 행진곡>의 창작자,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는 제본공 견습과정을 거쳤고, 백 년 뒤 아르메니아 태생 러시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 역시 제본공의 아들이었다. 전자기 유도법칙으로 물리학의 수준을 단숨에 끌어올린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는 제본공 견습생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제본 작업과 독서를 일치시키며 광범위한 소양을 쌓았고, 지금 환한 노트북의 화면을 보며 원고를 쓸 수 있게 해 준 특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니 역시, 환경은 인물은 만든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이듬해, 레오폴트는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나 잘츠부르크의 수도원 대학에 진학한다. 패러데이를 실망시킬 만큼 자연과학 과목에 출석하지 않았던 그는 퇴학을 당한 후 직업 음악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실력과 성가대 경험으로, 한 백작의 연주자로 경력을 시작한 레오폴트는 결국 잘츠부르크 궁정 부악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1756년 그가 출간한 <바이올린 연주법>은 사실상 세계 최초의 체계화된 바이올린 교습서였다. 지금까지도 이 교습서를 바탕으로 바이올린 수업을 한다고 하니, 음악 교육자로서의 레오폴트의 능력은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하긴 그 정도 능력은 돼야 단시간에 천재를 길러낼 수 있었겠지. 그렇다고 작곡가로서의 레오폴트도 무시할 순 없다. 기억하는가.
"도 미레도 솔파미 라솔솔파미 레파레도시도"
고사리손의 경쾌한 터치가 환청이 되어 끊임없이 귓전을 맴돈다. 우리나라 피아노 학원의 국민 교습곡이 된 지 오래인 <장난감 행진곡(Kindersymphonie)>이 그의 작품이다.
잘츠부르크에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서는 대주교에 눈에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교의 지도자가 행정의 지휘자를 겸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끝까지 승부를 걸었고,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는 넓은 세상으로 박차고 나가고만 싶었다. 볼프강이 전 유럽에 걸쳐 인정을 받고 싶어 하게 된 것도 아버지 레오폴트가 야심 차게 기획한 연주 여행 때문이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이런 성향은 자연스럽게 획득된 것이겠다.
잘자흐강을 건너면 곧게 뻗어 있는 첨탑과 풍만한 돔의 중첩이 묀히스베르크(Mönchsberg) 산에 의해 막힌 좁은 평지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다. 지나온 날들을 품은 성당과 궁전은, 나에게로 다가오면 잘츠부르크의 숨은 이야기들을 다 풀어놓겠다는 듯 위풍당당한 자세로 영광의 중심지에 서 있다. 잘츠부르크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조망하려면 현대미술관(Museum der Moderne Salzburg) 앞마당이 제격이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을 바라보면 산 중턱에 하얗고 길쭉한 건물이 보인다. 온통 과거의 유산이 가득한 터전에서 단순한 직육면체의 콘크리트 미술관은 되레 튄다고 해야 할까. 돌산을 뚫어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미술관의 로비에 내리면 도심 방향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입장료는 내부의 미술관 관람을 원치 않으면 낼 필요가 없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자 두 눈에 잘츠부르크의 전경이 탁하고 터진다. 탄산수를 들이켜자마자의 충격이다. 예각과 둔각의 연속으로 급변을 거듭하는 스카이라인 뒤로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수호신 역할을 하듯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그 시절에도 고결했음이 분명한 이 예술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는 생존이 달린 정글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음악가로서 교육자로서 그는 이곳에서 고민하고 도전하고 좌절하고 감탄하며 분투했을 것이다.
현대미술관에서 내려와 절벽을 오른편에 끼고 걸어가면 수직의 리듬을 잠재우는 거대한 수평의 기세가 들어앉은 것을 볼 수 있다. 명성이 자자한 축제극장(Festspielhaus)의 건물군이다. 어찌나 길쭉한지 2번지가 부재한 '호프슈탈가세(Hofstallgasse) 1번지'라는 도로명 주소 전체를 쓰고 있다. 이 거대한 항공모함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의 심장부로, 대축제극장(Großes Festspielhaus)과 하우스 퓌르 모차르트(Haus für Mozart), 펠젠라이트슐레(Felsenreitschule)가 내부에서 구분되며 공연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고귀한 무대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한여름 잘츠부르크를 세상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도시로 만드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클래식 연주는 물론이고, 각종 오페라와 연극, 심지어 미술전까지 열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복합예술축제다. 보통 7월 하순에서 8월 말까지 이어지는 축제기간에만 30만 명에 육박하는 덕후들이 전 대륙에서 몰려든다. 먼저 잘츠부르크 태생의 걸출한 지휘자, 카라얀의 호소로 조성된 대축제극장은 1960년부터 페스티벌의 무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무대 폭이 100미터에 이른다고 하니, 당시 세계 최대 규모라는 수식은 의심할 필요 없다. 하우스 퓌르 모차르크의 태생은 별스럽다. 대주교가 소유했던 승마학교 산하 마구간이었던 건물은 1925년, 축제를 위한 공간인 페스티벌 홀로 변신을 했다가,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새롭게 단장했다. 아마도 가장 신비스러운 공연장은 펠젠라이트슐레일 것이다. 묀히스베르크의 바위를 뚫고 들어가 움푹 파인 채석장은 대주교의 승마장 관객을 위한 관람석으로 변모했다. 1926년부터 공연장으로 사용된 펠젠라이트슐레는 주로 오페라의 무대가 된다. 그럴만하다. 암벽을 깎아 만든 아치형 아케이드가 조명을 받아 그림자를 떨구는 장면은 극적인 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전설 속 비경을 연상하게 하니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대체 불가능한 큰 별의 탄생지인 것이 출범에 큰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절대 모차르트의 유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1877년부터 불규칙하게 마련되었던 축제는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뒤 삶과 예술, 문화의 부흥을 꿈꾸었던 오스트리아의 대가들에 의해 192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란 튼실한 명찰을 달고 세상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백 년을 훌쩍 넘긴 이 가공할 축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인류의 문화자산이 되었다.
페스티벌의 감독이 된 레오폴트를 상상해 본다. 이 시대에 그가 이 도시에 있었다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축제의 책임자가 됐을 것 같지 않은가. 올해도 아들의 오페라 <마술피리> 공연이 열리는 곳은 펠젠라이트슐레다. 무대장치와 조명엔 이상이 없는지 매의 눈으로 살피고, 악단의 리허설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탐지하느라 미간을 찌푸리며 객석 구석구석을 누빈다. 아들 볼프강은 지휘의 손짓마저 거침없다. 이것이 리허설인가 실연인가는 그에게 중요치 않다. 만면에 웃음이 과하게 드러난 채 무아지경이다. 아버지의 눈에 천재로 여겨지는 아들이란 없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무대 위로 올라가 어긋난 대목을 지적하리라. 예의 그 쾌활함으로 아들은 되받아칠 것이다. "본 게임 잘하면 되죠, 뭐. 하하하하하."
레오폴트와 그의 가족은 볼프강이 채 여섯 살도 되지 않은 1762년 첫 연주 여행을 떠난다. 뮌헨과 빈에서의 성공적인 예행연습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신동을 전 유럽에 소개할 자신감을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심어주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넘어 바다 건너 영국을 순회하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무려 3년 반에 이르는 여정에서 모차르트 가족은 가족 기업 급의 유랑 극단으로 유명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볼프강의 음악적 도약이라는 열매도 가져올 수 있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가 볼프강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가르침을 전수해, 이후 모차르트의 관현악 작곡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볼프강의 스승은 잘츠부르크에도 있었다. 바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의 동생인 요한 미하엘 하이든(Johann Michael Haydn).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것 참 재미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고전파의 리더 하이든의 아들과 형제라니. 더구나 둘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요한이고, 평생의 스승 아버지 레오폴트의 이름에도 요한이 들어간다. 온통 요한으로 둘러싸였던 볼프강. 잘츠부르크 궁정 악장이었던 요한 마하일 하이든은 볼프강의 첫 오페라 작곡에 큰 도움을 주며, 탐탁지 않았던 고향을 그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었던 은인이다. 난감했던 것은 1762년부터 무려 43년 동안 궁정 악장으로 붙박였던 하이든이, 아버지 레오폴트의 최고 지위를 평생 부악장에 머물게 했다는 사실이다. 아들에겐 앞날을, 아버지에겐 좌절을 안겨준 요한 미하엘 하이든은 모차르트 부자에게 결코 잊히지 않을 존재였던 것이다.
천재를 담기에 역부족이었던 잘츠부르크라는 그릇을 떠나 볼프강은 빈에 정착해 좌충우돌하면서도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레오폴트는 고향에서의 인정을 포기하고 떠나간 아들이 못내 미덥지 않았으나 지금 우리의 입장에선 볼프강의 선택에 힘을 실어줄 도리밖에 없다. 고향 잘츠부르크에는 당시 대규모 연주를 위한 번듯한 극장 하나가 없었다. 오페라와 관현악 작곡에 야심을 갖고 있던 볼프강의 눈에 이런 무대의 부재는 잘츠부르크의 일인자인 대주교가 음악을 대하는 자세를 짐작하게 했으며, 그는 세상에 울려 퍼져야 할 자신의 음악을 위해 큰 무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차르트 없는 음악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세상은 그의 이주에 지극히 감사해야 하는 것이겠지.
저녁 식사로 염두에 두었던 잘츠부르크 슈니첼 맛집은 강북에 있었다. 마카르트 다리(Makartsteg)를 건너 다시 신시가지로 이동해야 한다. 마카르트 다리는 이젠 흔해 빠진 사랑의 자물쇠 명소 중 하나지만 멀리서도 스타카토처럼 튀는 발랄한 난간의 색감을 확인할 수 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빨간색이 지배종이다. 유독 빨간 자물쇠가 많은 이유는 모르겠다. 오스트리아 국기의 색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을 보면 카라얀의 생가가 있다. 모차르트 가족의 활동 무대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카라얀의 흔적. 분명 이 도시는 선율로 시작해 합주로 끝맺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월등한 감식안으로 천재를 낳고 길러낸 레오폴트 모차르트. 최고의 작곡가로 성장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누렸을지 모르나, 벗어날 수 없었던 정착지 잘츠부르크에서 그는 오욕과 질시를 받아가며 궁정 부악장 자리를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과 그의 아들이 잘츠부르크의 대 음악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으니 둥지를 떠난 아들 볼프강이 야속하게 느껴졌다가도, 유럽의 자산이 된 볼프강을 지켜보며 결국엔 아들을 응원하지 않았을까. 전설을 키워내고 묵묵히 응원한 레오폴트가 고맙다. 그건 잘츠부르크라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살아서 기능하는 모든 유적과 안단테로 흐르는 잘자흐 강의 존재는 전설을 탄생케 한 또 하나의 축복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