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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이 싫어서

시작은 잘자흐 강의 북쪽

by Total Eclipse






추모의 공간은 빛으로 충만했기에 생명력 넘치는 여행으로의 복귀엔 어떤 매듭도 없고 마디도 없다. 죽음과 삶이 꿈인 듯 현실인 듯 뒤섞여 나아가는 대륙의 여정에선 덜컥거릴 대립이란 존재할 수 없는 정서가 아닐까. 뮌헨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합류하기 전, 농촌 들녘 한복판의 편도 1차선 도로를 달린다. 더없이 은은한 하늘색의 하늘에는 흰 물감이 쏟아져 퍼진 듯하다. 색조의 대비를 강요하지 않는 깃털 같은 맑은 날은 바이에른 외곽의 전원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현실감을 앗아가 버린다. 써놓고 보니 또 대들고 싶어진다. 내가 쓰고 나에게 항의하는 꼴이다. 나는 왜 연한 푸른색을 말하고자 하늘색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하늘의 색은 다채롭다. 다채로운 걸 넘어 천변만화의 주인공이다. 은회색이었다가 연청색이 되고 짙푸른 남색으로 변신하는 한편, 노랑과 주황이 섞인 칵테일의 빛으로 화하다가도 숨이 막힐 듯한 검정의 화신으로 거듭난다. 심지어 마법 같은 수십 가지 색의 조합도 하늘의 빛임이 분명하다.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꿔 불러야 했던 이유가 다양한 인종의 피부색을 고려했던 거라면, 하늘의 빛깔도 마냥 맑은 대낮의 기운으로 부를 수만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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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_123609.jpg 뮌헨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는 지방도로에서


초록의 협박에 감당할 자신이 없어 차에서 내렸다. 농기계 통행용으로 보이는 협소한 포장도로가 별도로 깔려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소박한 옥수수밭은 널따란 초원을 더 드넓게 보이게 하기 위한 무대 장치와도 같다. 낙농업이 주를 이루는 바이에른의 시골이다. 건강한 풀을 마음껏 뜯어야 할 젖소를 위해서라도 광대한 초지를 품을 수밖에 없겠지. 눈이 시원해지는 걸 보니 시력이 좋아졌음이 틀림없다. 이민한 쉼터가 없다. 지붕 없는 독일의 전원 휴게소는 여행자의 믿음직한 중간 기착지다.

A8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국경이 머지않았을 때쯤 지붕 있는 휴게소에 들어가 '비넷(Vignette)'을 구매한 뒤 차량 앞유리 상단에 부착한다. 유럽에서 운전을 해 본 사람들은 익숙하겠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받는 통행료 영수증을 휴게소에서 미리 사는 셈이다. 비넷이 필요한 나라들도 있고, 우리나라처럼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치르는 국가도 있다. 오스트리아 진입에는 비넷이 필요하다. 국경을 넘자마자 바로 잘츠부르크 진입이다. 이 정도면 뮌헨과 잘츠부르크는 두 시간 생활권, 옆집 사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와 잘자흐 강을 향해 걷는다. 호화롭지 않은 대부분의 숙소들은 강의 북쪽인 잘츠부르크 중앙역 부근에 몰려 있어, 숙박 여행자들은 버스나 도보로 미라벨 궁전을 지나 잘츠부르크의 심장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역 앞은 많은 노선버스의 기점이자 종점이다. 잘츠부르크에서 버스는 시내와 근교의 명소를 갈 때 더없이 수월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교통비와 주요 관광지 입장료까지 포함된 가성비 만점의 잘츠부르크 카드 구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20240823_104726.jpg 잘츠부르크 중앙역 앞 버스 탑승장


당일치기 관광객이 아니라면 강북에서 강남은 걷기에 큰 무리가 없다. 아니 걸어야 한다. 예술의 도시 잘츠부르크는 알프스 자락에 둥지를 틀어 속세와 절연한 듯한 고고함이 있다. 인구 15만의 도시 안에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여행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도 해발 400미터의 예술의 본산은 들뜨지 않는다. '소금성' 혹은 '염성(鹽城)'이라고 해야 할까. 소금을 뜻하는 잘츠(Salz)에 성의 의미인 부르크(Burg)가 합쳐진 이름의 유래는 이제 지식을 넘어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잘츠부르크는 소금 생산이 아닌 유통지로서 성장한 도시다. 지구상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잘츠부르크 동쪽의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 일대에서 생산된 소금이 잘자흐 강을 따라 잘츠부르크로 집결하면서 도시는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먼 옛날 바닷속이었던 잘츠캄머구트에는 품질 좋은 암염(巖鹽)이 매장되어 있었고, 다량의 암염은 강을 따라 유통되었다. 지금도 소금을 캐던 당시를 확인할 수 있는 광산 체험지가 잘츠캄머구트에 산재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러니까 잘츠부르크는 한강을 따라 들어온 서해 고깃배들과의 거래로 흥했던 예전 마포나루와 같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지리와 지질의 덕으로 꿀 빨았던, 아니 소금 빨았던 과거의 영화다.

잘츠부르크지도.jpeg 중앙역에서 시작되는 잘츠부르크 여행 동선의 예


잘자흐 강의 북쪽은 현지인과 이방인의 비율이 썩 조화롭다. 강을 건너며 부딪히게 될 단체 여행객들의 물결을 생각한다면 한결 여유롭게 걸어도 되는 구역이다. 물론 현지인 모드의 산책은 얼마 안 가 일시정지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정원의 옆으로 난 입구로 들어가 여행객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히 임한다.

20240822_170532.jpg 미라벨 정원으로 가는 길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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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_171342.jpg 미라벨 궁전과 정원


정갈한 양식의 건물은 인상 깊지만 아무리 봐도 궁전이라 하기엔 덩치가 소박해 보인다. 화재로 인한 소실과 재건으로 건축양식은 변화했어도, 궁전이 처음 지어진 건 1606년 볼프 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 대주교 시절이다. 동로마 제국 본진에서 지정한 대주교가 도시의 모든 것을 장악하던 잘츠부르크는 대주교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도시의 정체성이 결정되었는데, 역대 대주교 중 지금 잘츠부르크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일등 공신은 바로 라이테나우 대주교(1587~1612)였다. 궁과 집무실이 위치한 강남에서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지, 그는 강북에 번듯한 별궁이 있었으면 싶었나 보다. 유난히 건축에 탐닉한 라이테나우 대주교는 쾌적한 신축 궁전에서의 은거로 워라밸을 만끽했을 것이다.

미라벨 정원은 궁전보다 84 년 뒤인 1690년에 조성되었다. 조경을 지시한 대주교는 요한 에른스트 폰 툰 호헨슈타인. 인지도 최상인 이 정원은 프랑스 바로크식 모델을 바탕으로 세심하게 구획되었다.

20240822_171909.jpg 미라벨 정원의 대칭
베르사이유.jpeg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대칭


솔직한 취향 고백을 해야겠다. 안목 없는 사람이라 비난받을 각오도 되어 있다. 오랜 전부터 난 좌우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매력을 못 느끼는 걸 떠나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싫다. 반으로 접어도 하나처럼 보이는 공간을 뭐 하러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공간의 낭비가 아닌가. 오른편과 왼편의 구성이 달라야 재미있을 것이다. 꽃과 나무들의 트리밍조차 엄정하다. 가지런한 잔디의 높이에 꽃 한 송이라도 좌우가 달리 배치되서는 안 된다. 본디 스스로의 의지로 뻗어나가는 것이 자연(自然)이지만, 좌우 대칭 정원 속 식물은 스스로의 의사를 관철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의 결핍을 넘어 부재다. 정원을 거닐며 받을 위안은 인공의 흔적이 효과적으로 배제된 그 어디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가지가 사방에 드리워진 나무는 자격 미달이어서 그늘을 찾을 수 없고, 변화무쌍한 빛의 각도를 누릴 수도 없다. 숨이 막힌다. 비우려 걷는 걸음에 두통만 심해질 듯하다. 미라벨 정원이 수입한 것이 프랑스의 양식이라면 베르사유 정원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베르사유 정원 조성이 1661년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라벨은 직계 후손인 셈이다.

대칭은 우주와 인체의 신비를 설명해 줄 최적의 원리라고 한다. 양자의 대칭이 물질을 만들어 내고, 염색체의 대칭은 생명체를 창조해 낸다. 화려한 나비 날개의 대칭에선 감탄의 연발이다. 좌우 일치의 무늬를 소유할수록 아름다운 생명체란 걸 누구나 바라보면 알 일인데, 왜 유독 정원에서만큼은 대칭이 싫다고 나는 떼를 쓰고 있는 것일까. 수준 낮은 감각을 갖고 있다고 하면 할 말이 없고, 그게 가장 적절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저급의 미학이 바뀔 것 같진 않다. 프로필을 찍을 때 나는 왼쪽 얼굴을 내밀고, 남의 얼굴에서도 심하지 않은 좌우 비대칭은 매력으로 느껴지는 걸 어떡하나. 이런 각도에선 날카로움이 번득이고, 저런 각도에선 인간미가 넘친다. 고칠 방법은 없다. 그저 잘츠부르크에 미안할 뿐이다. 도심의 초입부터 정원계의 셀럽인 미라벨 정원을 두고 시비를 걸었으니. 내 우둔하고 특이한 고집 탓이다. 여기까지다. 이제부턴 도시의 환희와 감동만 가득할 것이다.

20240822_180323.jpg 마카르트 광장에 면한 모차르트의 집


미라벨 정원을 나와 오던 방향대로 나아가면 골목에서 나온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단체 여행팀처럼 뭉쳐진다. 강 너머의 정경이 확실하게 조망되는 마카르트 광장에 이르자, 오스트리아 국기가 걸린 밝은 핑크색 건물이 보인다. 모차르트 가족이 살던 집이다. 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모차르트 재단이 사들인 뒤 고증을 거쳐 당시의 형태로 복구했다고 한다. 강 건너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Mozarts Geburtshaus)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생가라는 수식에 걸맞게 입장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지만, 형편이 나아진 모차르트 가족이 이사를 와 살았던 '모차르트의 집(Mozart Wohnhaus)' 앞은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다. 어차피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도시라면 허투루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정작 이 아름다운 도시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은 볼프강 아마데우스가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다음은 천재를 발굴해 세상에 알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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