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숲, 페를라허 포르스트 공동묘지 ③
페를라허 포르스트에는 슈퍼스타가 있다. 서독 축구의 전성시대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이 허허로운 공동묘지는 성전(聖殿)과도 다름없다. 국보급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잠들어 있는 근엄함과는 또 다른 종류의 엄숙함이다. 생전 원초적 희열을 세상에 선사했던 그는, 사후에도 든든한 신임 리더가 되어 페를라허의 망자들을 이끌고 있다. '카이저(Kaiser)'. 역사상 황제가 아닌 인물에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한 사례가 얼마나 있었을까. 축구선수로서 얻어갈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다 챙기고 떠난 독일 축구의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Franz Beckenbauer, 1945~2024)다.
가장 최근에 숨을 거둬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는 그의 묘소는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았다. 더구나 페를라허의 알렉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잡풀을 고르고 있는 한 어르신을 마주쳤다. 능숙한 손놀림은 페를라허 포르스트의 고인 물임을 중명해 주었고, 눈처럼 내려앉은 흰머리는 베켄바워의 시대를 함께 지나온 추억의 소유자임을 말해주었다.
"Entschuldigung, Wo ist das Grab von Beckenbauer?" 황제의 묘가 어디 있느냐는, 독일어 기초회화 8강 정도에 나올 법한 질문에 어르신은 곧바로 팔을 길게 뻗어 방향을 가리켰다. 그럼 그렇지.
베켄바워 급이라면 추모객들의 접근성을 고려했을 텐데... 어르신이 알려준 위치를 어림해 주위를 맴돌아보아도 그의 무덤은 사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다. 이미 조성된 가족묘에 베켄바워가 들어가는 것이라 황제라 할지라도 명당을 독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의 축구팬들이 단체로 참배라도 왔더라면 쓱 묻어갈 일이었겠지만 새들의 지저귐 외에는 어떤 부산스러움도 들리지 않았다. 답답함에 길섶의 자리한 묘를 가로질러 배후를 탐사했다. 두어 줄 뒤의 묘지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의 묘지를 포착했다. 유족으로는 보이지 않는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 소박한 베고니아 옷을 입고 있는 베켄바워의 자리였다. 그러니 나는 맴돌았다고 했지만 나 있는 오솔길의 친절한 안내만 받으려 했던 것이다. 습관이 되어버린 겉핥기! 무엇이든 애타게 얻고자 할 때는 과감하게 관통을 해야 하는 법이다.
잔디조차 채 활착하지 못한 황제의 터는 독일 국민의 국보 상실이 머지않은 과거의 일이었음을 드러냈다. 베켄바워의 화려한 경력과 성적을 나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그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핵심정리는 해야 한다. 1959년 FC바이에른 뮌헨 유소년 팀에 입단한 베켄바워는 큰 어려움 없이 성인 팀의 핵심선수가 되어 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주장으로서 유러피안컵을 3년 연속으로 제패했다. 동서독이 분리된 시절, 그는 서독 축구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핵심선수로 1966년과 1970년 연속 4강에 진출했고, 1974년엔 주장을 맡아 네덜란드를 꺾으며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은퇴 후엔 대표팀 감독으로 역량을 발휘해 1986년 월드컵 준우승, 독일 통일의 해였던 1990년에는 조국에 우승을 건네며,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에서 우승한 희귀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 선수 개인으로는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에 1972년과 1976년 두 차례 선정되었고, 2020년 역대 발롱도르 드림팀의 일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은 물론이고,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여유 있게 이름을 올린 그는, 독일 축구 역사의 황제라는 묘사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전설이다.
부지에 따른 이용요금의 눈금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고 했지만, 터의 넓이와 상관없이 화려함을 자랑하는 무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독일 국민들의 무덤덤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숲과 흙을 거스르지 않고 서 있는 비석들은 든든할 뿐 우열을 가르지 않는다. 독일의 장례는 전적으로 주 정부의 소관이다.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바이에른 주의 장례절차도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고 한다. 작성하고 준비해야 할 서류가 상당하고, 규정도 까다롭다. 엄정하고 정형화된 죽음의 과정이 개별 망자의 화려한 윤색을 제어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 본다.
셸리 케이건 교수의 말은 엉거주춤하던 유족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죽고 나면 그만인 것을. 사라져 버릴 뿐인 고인을 위한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남은 자들의 몫을 가로채는 꼴이다. 떡하니 넓은 땅을 차지하지 말고 그저 한 뼘의 흔적만 남기는 게 이치에 맞지 않는가. 어차피 세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공간.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선 한 줌의 재가 되어 유족들의 두 손안에 사뿐히 담기면 되는 것이다. 영혼이 존재한다 해도 망자는 그렇게 산 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산 자들은 더 이상 음습한 흙속에 망자를 묻어 벌레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하며, 연기에 실어 보내 가뿐한 승천을 돕는다. 완벽한 윈-윈이 아니던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건 이럴 때 들어맞는다. 실천을 한 건 나의 편의 때문이었지 인류애의 발동에 따른 게 아니었다. 후회까진 하지 않아도 자꾸 고개가 떨구어진다. 감탄할 만한 경치를 자랑하는 제주도의 자연장지인데도 말이다.
경기도에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를 수습해 제주도의 자연장지로 이장했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묘지의 상단. 몇 년 후 돌아가신 아버지는 초록색 잔디가 넓은 하단으로 모셨다. 공원묘지로 들어오는 순서가 어디에 묻힐지를 결정하니 위치 선정은 순전히 돌아가신 분들의 책임이다. 물론 잔디형이나 수목형, 정원형의 굵은 선택지는 있다. 풍광은 일품이고 묘지의 터도 부드러운데 이놈의 마음이 마냥 흡족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한 뼘의 명판이 전부인 조상의 터는 갑갑하다. 거기서 한 뼘을 더하면 다른 고인의 이름이 시작된다. 이웃 망자와 소통이 수월할지는 모르나 저승행 만원 버스에 어르신을 밀어 넣은 기분이다. 가볍게 보내드리려 했던 의도는 검은 바탕의 흰 이름 앞에서 궁색해진다. 넉넉한 풀밭 위 둥그렇게 풍성한 다른 이들의 묘소라도 가게 될 때면 이내 가슴속은 복잡해진다. 왜 난 그분들을 고작 한 뼘 안에 넣었던 거지? 셸리 케이건이 누군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찌푸린 미간을 다림질한다. 공동체가 그게 맞다고 한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죽음 후 무덤의 면적이 망자의 삶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니까. 호화 저택보다 국민 주택에 입주한 망자들은 죽어서도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는 거니까. 난 잘 모신 거야. 나도 그렇게 들어가면 되니까. 가장 중요한 것, 죽음은 그냥 끝일뿐이니까.
다시 케이건의 옹호자가 되기로 한다.
뮌헨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토록 꾸밈없는 묘지에서 닥친 혼란스러움은 다음 도시의 매력에 묻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치장을 하지 않아 오히려 증명이 되는 문화도시의 저력. 그걸 실감한 건 묘지에서였다. 바이에른의 뿌리 끝까지 들어가지 못한 허허로움은 황제, 베켄바워에게 해결을 부탁해야 할 듯하다.
왼쪽 구석에서 수비수 제치고 베켄바워 강 슛!
골~인!
황제는 오늘도 황제임을 증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