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 아래 놓인 망자들의 정원, 성 페터 묘지 ①
'생전(生前)'이란 단어가 어색하다. 보통 일상에서 자주 쓰거나 들었던 말들에서 난데없이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무'는 왜 '나무'라 불러야만 했던 걸까. 상반신과 하반신을 이어주는 그 부위에 왜 '허리'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우리는 그 결정에 왜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누구 마음대로. 나는 나무를 '두렁'으로 부를 것이고, 허리가 아플 때 '랑랑'이 쑤신다고 할 것이다. 천부(天賦)가 아닌 모든 것은 언젠가 뿌리에 대한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나무나 허리처럼 특정한 발음의 원천이 궁금한 것은 차라리 순수한 본성이다. 생전이 어색한 건 다른 면에서다. 뜻이 문제다. 生의 前으로 뜻을 풀면 '살기 전'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실체로 존재하지 않았을 때를 뜻하는 게 아닌가. 나의 경우는 1971년 어느 초가을날 이전의 모든 날들. 뒤 음절이 앞을 수식한다고 쳐도 前의 生은 '이전의 삶'이라 그야말로 무속인에게 답을 구할 수 있는 '전생'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생전이라 하면 '살아있는 동안', 단순하게는 '생애(生涯)'로 이해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생전에 너 같은 놈은 처음 봤어."
모르겠다. 멍청히 하늘을 바라보며 이유를 생각해 봐도. 한자어 능력자를 숨고에서 찾고 싶을 정도다. 시원한 해답을 찾을 때까지 개운치 않을 나만의 억지 해석 기준은 이 단어를 말하는 시점의 특정이다. '지금'을 살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그가 과거에 태어나 바로 지금 직전까지 살아온 삶을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는 현재를 '生'이라는 기준점으로 두고, 그 전의 삶은 '생전', 미래에 올 삶은 '생후'가 아닌가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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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현재) (생후)
만약 시점을 더 뒤로 미룬다면 죽음의 순간까지도 이동할 수 있다. 생과 사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면 On에서 Off로 삶의 전원이 차단되는 시점이 측정의 기준이 되어 그 찰나의 앞을 '생전'이라 하고, 뒤를 '사후(死後)'라고 명명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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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죽음) (사후)
티끌에 연연하지 않는 품 넓은 인성을 보일 때도 됐건만, 여전히 단어 하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해체 쇼를 해대는 것이 속 좁은 티를 내고 있다. 지식이 모자란 탓이기도 하려니와, 이 업계에서는 드물지 않게 도지는 직업병의 일종이라고 위안을 삼아 본다. 그렇다면 좀스러워진 나도 산업재해의 피해자인 것인가.
생전에 보는 사후의 공간은 천차만별이다. 모든 망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마음의 합만큼 천국의 상층에 자리 잡게 될까. 자신의 흔적이 묻힌 공간의 아름다움을 그들의 영혼도 감상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성 페터 묘지(St.Petersfriedhof)에 모셔진 망자들은 대단한 축복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묘지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을 오가는 푸니쿨라 탑승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으나 철문 안쪽을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시가지 안에 자리한 묘지는 도시 풍경의 악센트가 되어 기품을 유지하기만 해도 더할 나위 없는데, 잘츠부르크의 성 페터 묘지는 구시가의 어떤 명소와도 일 대 일 경쟁이 가능한 주연급 환경을 자랑한다. 그리 넓다고 할 수 없는 부지의 조경은 그 자체로도 완벽하고, 묀히스베르크 산의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경계로 두고 있는 구도는 사후세계만큼이나 신비롭다. 관광객들의 걸음걸이가 가득한 바깥과 전혀 다른 별천지다. 묘지 탐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도시에 온 이방인이라면 잡아끌어 데리고 오고 싶은 곳. 망막에 맺힌 묘지의 스틸컷은 최고의 해상도를 간직한 예술작품이 된다.
묘지를 내려다보는 석회암 절벽은 예배당과 연갈색의 DNA를 공유하는 듯 추모시설의 일부가 되어 망자들의 수호성인 역할을 자처한다. 공동묘지의 한쪽 면이 막혀있는 것이 폐소공포를 유발하지 않고 아늑함만 선사할 뿐이다. 붉은 계통의 꽃 모둠은 빠져서는 안 될 조경의 요소가 되고 있고, 뜻 자체에 돌의 의미가 포함된 묘비는 여기서만큼은 철제로 대체된다. 간판도 묘비도 철이다. 여기는 잘츠부르크가 아닌가.
성 페터 묘지는 성 페터 수도원의 부속이다. 페터, 즉 베드로를 모시는 이 수도원의 역사는 절대적이다. 잘츠부르크의 첫 번째 주교인 성 루페르트가 선교 목적으로 696년 설립했으니 무려 1,3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수도원계의 시조새다. 이 도시에서 성 페터 수도원의 역할은 종교적 기능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중세에 조성한 수도원 내 작문 학교는 1623년 베네딕토회 대학교로 확대되어 현재 잘츠부르크 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수도원의 중심 건물인 성 페터 수도원 교회는 1783년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가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음악 도시 잘츠부르크의 위상을 높이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묘지와 접한 수도원의 가장 후면 건물은 도서는 물론이고 유명 작곡가들의 필사본이나 판화 등 가치 있는 예술작품을 소장한 도서관으로, 박물관과 교육기관의 기능까지 충실하게 수행해 온 수도원의 광휘를 오늘날에도 체감할 수 있다. 예술과 교육에 가치를 둔 도시의 역사는 잘츠부르크의 저력을 쌓아온 유일한 비결이다.
먼 동쪽에서 발해가 건국했을 때 지어진 성 페터 수도원의 연륜도 놀랍지만 발을 딛고 있는 묘지의 기원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도원 부속시설로 구획이 깔끔하게 지어진 건 696년 일지 모르나, 이 자리가 묘지로 이용된 것은 고대 후기에서 중세 초기라고 하니까. 미적 감각이 탁월한 근대의 건축가와 예술가가 콜라보로 조성한 듯 보이는 성 페터 묘지의 정체는 까마득한 고대의 유적이었다.
암벽의 밑단에 조성된 무덤의 회랑을 지나 묘지의 구석구석을 걷는다. 수도원 반대편으로 보이는 급사면에 관광객을 태운 푸니쿨라가 상하운동을 반복하고 있고, 산의 정상에는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묵직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약간의 높낮이 변화로 묘지의 탐방은 경쾌함을 더하는데, 망자들의 사이에서 경쾌함을 말하기가 송구스럽다가도 그들이 누운 자리에 찬사를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자 경쾌함은 한 큰 술 더해진다. 회갈색의 비석과 묘비의 검은 철제 장식에 희고 붉은 꽃들이 툭툭 시야에 담겨, 묘지는 잘츠부르크의 축소판이 되어버린다. 매력이 넘치는 공간의 중심엔 중심을 잡아주는 건물이 있다. 당장이라도 발사돼 하늘로 날아갈 듯한 날렵함과 긴장감이 흐른다. 장례 예배가 이루어지는 마가렛 예배당(Margarethenkapelle)이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파사드의 폭이 좁은데 그게 참 적당하다. 이보다 어깨가 넓은 예배당이었다면 넓지 않은 묘지의 기운을 눌러 답답했을 것이다. 성 페터 묘원의 동선은 마가렛 예배당의 둘레를 따라 형성된다. 멀리에는 묀히스베르크의 암벽이, 가까이는 마가렛 예배당의 벽면이 묘지의 풍경에 맥락을 부여한다.
소박한 예배당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묘지는 성직자, 예술가 등 일부에 한해 매장을 허락한 뒤 1878년 시립 묘지가 개장하면서 장례식을 마감했으나 1938년부터는 다시 매장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신입 망자를 위한 공간이 별로 남아있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천오백 년 이상의 내공을 자랑하는 묘지라면 어떻게든 자리 하나 솜씨 좋게 내줄 것 같기도 하다.
잘츠부르크의 하늘 아래 안락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안식처. 더할 나위 없는 성 페터 묘지의 인상이다. 산 자들을 환영하는 묘지의 분위기는 증명이 된 셈이다. 이젠 이곳에 누워있는 망자를 만나봐야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토리를 공유하고 있는 일단의 망자들이다. 이번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들. 도대체 어떤 사연이 그들 사이에 얽히고설켜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