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 아래 놓인 망자들의 정원, 성 페터 묘지 ③
도시는 쾌적해야 한다는 현대의 당위는 추모 시설을 외곽으로 몰아냈다. 삶의 공간 주위에 산재해 있던 무덤들은 그래서 사람이 살지 않는 산기슭으로 집단 이사해 거대한 추모 공원 속 부품들이 되어갔다. 망자의 흔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자 죽음을 대하는 우리 인식의 차원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죽음이 아닌 치료를 위한 장소인 병원에서 숨을 거둔 인간은 어서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부속 장례식장에서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곧장 외곽의 공동묘지로 이동한다. 죽음이란 것은 그렇게 생활공간 주변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말아야 할 금기가 되었으며, 망자의 흔적은 격절된 곳에 떼어놓아야 할 기피의 증거가 되었다. 먼저 간 고인이 그리워 죽겠어서 슬피 울다가도, 사후의 주검은 염이라는 과정으로 단단히 결박해 놓아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단속하는 것이 오늘날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일고 여덟 살 때의 나이는 공간 감각의 민감도가 솟구칠 때다. 5층 짜리 아파트에 살던 나 역시 동네 꼬마들과 떼로 몰려다니며 당시의 우주였던 아파트 단지 안을 매일같이 탐색하고 다녔다. 옛날 치고는 제법 넓은 단지였기 때문에, 오르고 내리며 들어갔다 나왔다 할 공간은 차고도 넘쳤다. 모든 동의 옥상이 개방되어 있어 오늘 타깃이 된 건물의 5층 계단을 지나 철문을 열면, 그 동에서 바라본 동네의 풍경은 어제의 구도와 또 달랐다.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옥상이 명당이었고, 분명 저 돔 안에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숨겨져 있을 거라고 꼬마들은 의견일치를 보았다. 옥상 난간을 넘어 남의 집 베란다의 위쪽 좁은 공간에 올라가 시시덕거리던 순간만 생각하면 정말 미칠 노릇이다. 살짝만 삐끗했어도 15미터 아래로 추락해 부모님을 오열하게 만들 뻔했으니까. 아직도 나의 어머니는 이 위험천만했던 아들의 만행을 모르고 계신다.
극과 극이 자극적인 것. 옥상의 개방감에 이은 반 지하의 폐소감은 쌍을 이루며 꼬마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1층집 베란다 아래로 허리를 숙여 기어가면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창호가 있었고, 녀석들은 작고도 유연한 몸으로 유리가 없는 틈을 골라 하나씩 안으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콘크리트 부스러기와 가루로 덮여있는 바닥에, 공사 자재들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나아가면 희미하게 보였던 작은 철문 뒤엔 분명히 간첩이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투철한 신고 정신을 발휘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어쩌다 앞을 가로질러가는 생쥐는 우리를 놀라게는 했으되 위협적인 존재는 되지 못했다. 인디아나 존스가 되어 나라를 구할 꼬마들에게 두려운 공간이란 있을 리가 없었다.
여럿이 있어서 더 겁이 없는 것처럼 들쑤시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고 난 뒤 고소(高所)와 지하(地下)는 공포의 공간이 되었다. 고소공포증이란 없다며 내뱉고 다녔던 자신감은 스카이워크의 유리바닥 위 현기증으로 자취를 감췄고, 일상의 뉴스가 되어버린 싱크홀의 발생은 언제든 지하세계의 하데스에게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전달했다.
카타콤이란 단어는 그래서 오싹함과 동일했다. 지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길한데 시신을 한데 모았던 공동묘지였다니, 이건 소름이 전신을 덮칠 노릇이다. '무덤들 사이' 혹은 '아래의 무덤'이라고 해석되는 라틴어 'Catacumba'에서 유래한 카타콤은 이탈리아 로마의 지하 무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2세기에서 3세기 초 로마법은 도시 경계 안쪽에서 매장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 외곽에 인공 지하통로를 만들어 쏟아지는 시신을 안치했고, 땅굴은 확장을 거듭해 지금까지 발굴된 카타콤의 거리만 900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시민들의 주거 지역에서 벗어나 외곽에 건설된 지하 묘지. 삶과 유리된 망자의 공간을 돌아보면 현대의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비슷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로마 만의 카타콤은 이탈리아를 벗어나 전 유럽에 걸쳐 존재하는 지하 무덤이나 지하 공간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대표적인 또 하나의 카타콤은 프랑스 파리에 있다. 파리의 카타콤은 태생부터 로마의 그것과 다르다. 18세기 루이 16세는 도시 내 매장을 금지함과 동시에 기원전 로마가 조성한 채석장이었던 폐 갱도를 유골의 매장지로 용도 변경했다. 이곳에 묻힌 유골은 무려 600만 구로 추정된다고 한다. 관광지가 되어 개방된 파리 카타콤의 면적은 전체 카타콤의 0.6퍼센트에 불과하므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자(死者)들의 왕국이 파리의 지하에 깔려있는 것이다.
지각을 파고들어 간 음습한 터널. 유골이 제 형체를 스스로 조립해 벌떡 일어나 뛰어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하데스의 신전, 카타콤은 바로 여기 잘츠부르크에서 그 전형을 탈피했다. 카타콤은 더 이상 발아래 놓여있어야 하는 암흑이 될 필요가 없었다. 성 페터 묘지의 카타콤은 계단으로 '올라야'했다.
독일어 '카타콤벤(Katakomben - Katakombe의 복수)'을 가리키는 화살표 쪽으로 돌아서면 묀히스베르크 절벽 안을 향하게 된다. '지하 무덤'이란 본 뜻이 '절벽 무덤' 또는 '동굴 무덤'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땅 속의 유골 보관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두운 바위 속 공간을 타고 올라가는 느낌이 신비롭고 조심스러운 것은 매한가지다. 지상의 공간을 굳이 카타콤이라 칭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땅을 파고 들어가거나, 바위를 파고 들어가거나, 망자를 위한 비밀스러운 장소라 마련됐다면 우리는 그곳을 카타콤이라 부르면 될 일이다.
카타콤을 오르기 전, 예를 갖추어야 할 일이 있다. 계단의 우측으로 성 페터 묘지의 대스타 둘을 한꺼번에 영접해야 해서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는 벽과도 같은 존재였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는 스승과도 같았던 대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요한 미하엘 하이든이 카타콤의 전실쯤 되는 공간에 모셔져 있다. 잘츠부르크 궁정악장으로 뿌리내렸던 그를 레오폴트는 철밥통으로 여겼을지 모르나, 아들의 음악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테니 저승에서는 학부형과 선생님의 관계로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스타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바로 모차르트의 누나, 애칭 난네를로 더 잘 알려진 마리아 안나(Maria Anna). 동생 볼프강 못지않은 잠재력을 지니고도 꽃을 피우지 못한 인물이다. 첫 번째 연주 여행에서 동생과 팀을 이뤄 전 유럽의 궁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동이었으나, 두 번째 여행부터 배척받으며 아버지 레오폴트의 의지에 따라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삶을 따르게 된다. 난네를은 결혼 후 장크트 길겐에서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아까운 여생을 마친다. 못 다 이룬 음악가로서의 한을 사후에라도 한껏 풀어보겠다는 의지일까. 그녀는 궁정 악장 요한 미하엘 하이든의 단짝이 되어, 이곳 성 페터 묘지에 나란히 누워 있다.
수도원보다도 오래된 암벽 묘지에 지금은 유골이 보이지 않는다. 낙석 등으로 파괴되었던 내부를 재단장하면서 유해들을 옮겨놓았을 것이다. 덕분에 둘러보는 두 눈에서 공포의 기운은 가신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동굴 내에 조성된 기도처를 볼 수 있는데, 1178년 콘라드 3세 대주교에 만들어진 게르트라우덴 예배당(Gertraudenkapelle)이다. 제단에는 성 토마스 베케트의 순교를 묘사한 아담한 크기의 프레스코화가 있고, 정성 들여 장식된 왼쪽의 아치형 창을 통해서는 빛이 들어와 기도자의 자리를 비춘다. 지하의 무덤에서는 절대 누리지 못할 스포트라이트의 축복이다.
게르트라우덴 예배당을 둘러보고 고도를 높인다. 계단참에는 성 페터 묘지를 다정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소박하게 마련되어 있다. 오래전 소중한 이의 영면을 기도하러 이곳을 찾았던 유족들은 슬프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암벽의 내부를 뚫어 창조된 공간을 오르는 상승감과 조망의 혜택은 하늘의 천사를 부여잡고 도약하는 망자의 운명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속세의 구차함일랑 벗어던지고 천국의 달관으로 직행하려는 기도자의 소망 또한 여기 바위의 내부에서 실재가 되어 현현했을 것이다.
전망대를 지나 카타콤의 가장 높은 곳엔 또 하나의 예배당이 있다. 1172년 봉헌돼 수 차례 개조된 막스무스 예배당(Maximuskapelle)이다. 동굴의 파인 부분을 제단으로 만든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잘츠부르크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가 산재해 있는데, 막시무스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카타콤은 영화 속 폰 트라프 가족이 숨어있던 곳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다시 영화를 보며 확인을 해 봐야겠다.
지상을 넘어 천상계를 탐하고 있는 카타콤 계의 이단아, 성 페터 묘지의 암벽 무덤을 둘러보았다. 다시 지상에 발을 붙이고 바깥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니 길게 도열한 무덤의 아케이드가 카타콤에서 뻗어 나온 꼬리인 듯하다. 수직의 암벽은 묘지의 수호자 역할을 넘어 잘츠부르크 성인들의 영혼을 담고 있는 또 다른 묘지 그 자체였다. 모차르트와 음악으로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보석 같은 도시는, 전역을 휘감고 있는 금빛 선율의 이면에 두꺼운 문화와 종교의 내피를 채우고 있었다. 소금 상선으로 빼곡했을 잘자흐강을 다시 건너며 도시와 작별을 고하기로 한다. 이젠 대놓고 눈이 호강할 차례다. 지금까지도 훌륭했지만 한 컷조차 놓치면 안 되는 절정의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 눈에 벌써부터 힘이 들어가지만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 또렷하고 깐깐하게 시야에 담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