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열 손가락이 내 머리통을 꾹 누를 때
언니 : 얼마 전에 뿌리염색 하시고 이렇게 바로 오셨네요?
나 : 미용실 오는 게.. 그냥 좋아서요..
_ 헤어디자이너 언니와 나
3개월을 미루던 헤어펌 예약을 지난 주에 해냈고 오늘은 기어이 펌을 하러 미용실을 갔다. 펌 시기를 놓쳐 머리꼴이 말이 아닌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단골 헤어 디자이너, 그 언니가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이 무척 그리워서. 그래서 지난 주 어느 날 자정 무렵, 잠이 쏟아져 한껏 무거워진 눈꺼풀을 힘겹게 치켜 올리고 카카오헤어샵에서 그 언니 스케줄에 맞춰 예약, 카카오페이 결제를 한 것.
지난 주 고작 3박 4일 여행을 다녀왔을 뿐인데, 단지 조금 놀다 온 것뿐인데, 그 탓에 이번 주 드라마틱한 일정들을 소화하는 중이다. 언감생심, 미용실 다녀오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상황. 하지만 코로나 때부터 2개월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만나온 그 헤어 디자이너 언니의 손맛이 너무나 느끼고 싶어 오후의 분주함을 이겨내고 미용실로 달려갔다.
손힘을 잃어 버리다
출산 후 한지 종잇장만큼 연약한 손목이 되어버린 탓에 손힘 좋은 사람들만 보면 부럽고 멋있어 뵌다. 잼 뚜껑 한 번 시원하게 여는 사람, 무거운 스텐 프라이팬 들고 요리하는 사람, 손으로 철봉을 감싸고 굳게 매달려 있는 아이, 현란하게 손목 돌리며 스트레칭 하는 사람, 오래도록 키보드를 치는 사람, 유리컵을 힘있게 받쳐들 수 있는 사람..
요가 매트 위에 손으로 몸을 지탱하는 동작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8년 하던 요가를 그만 뒀다. (단지 몇 가지 동작을 못하게 되었을 뿐이지만) 부엌에 있는 도구들이 마치 내 손목을 공격하는 흉기처럼 느껴져 부엌과 멀어진지 꽤 오래 되었다. (요리를 못해서가 아니다!!) 새벽에 더욱 아려오는 손목 통증에 잠시 눈을 떴다가 편한 위치에 손목을 두고 다시 잠드는 수면 패턴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머리 감을 때 이전처럼 두피를 시원하게 마사지하지 못하고 흐느적 거리는 손으로 겨우 샴푸와 린스를 끝낸다. 누가 시원하게 두피 한 번 꾹꾹 눌러주며 머리 좀 감겨줬으면.
생각해 보니 손목 통증 초기, 머리를 시원하게 못 감게 되면서 경미한 수준의 우울증이 찾아왔던 것 같다. 내 손이 아주 쉬운 일조차 처리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 무렵부터 괜히 미용실 갈 거리를 만들었다. 헤어컷이나 뿌리염색도 부지런히 하러 다니고 펌도 계절마다 바꿔 가며. 방문 때마다 날 눕혀 두고 머리통을 지그시 누르고 어루만져주는 디자이너의 손길이 좋아서. 내게 없는 그 손힘이 느껴져서.
언니의 열 손가락, 그 힘
오늘도 펌을 하러 갔지만 사실 어떤 스타일의 펌을 할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고 샴푸실의 의자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언니가 샴푸실로 부를 때마다 신이 났다. (오늘 펌은 총 세 번의 샴푸를 포함했다)
언니의 열 손가락 끝부분이 내 머리통을 꾹 누르자 온몸이 은혜 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경직된 어깨가 먼저 축 쳐졌고 눈은 편안하게 감겼다. 미용 직후 있을 일을 생각하느라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던 뇌가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깜빡 깜빡. 아이디어와 인사이트를 위해 활발하게 흐르던 생각들이 느릿 느릿하다 정지. 허리가 타이트한 옷을 입느라 잔뜩 긴장되어 있던 복부와 하반신이 풀어지면서 몸은 '이완' 국면에 진입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손힘으로 언니는, 머리통 누르기, 비비기, 튀기기, 치기 등의 헤어 마사지로 내 머리통을 아주 적극적이고 다채롭게 자극해 주었다. 샴푸를 마치고 머리의 물기를 짜는 데도 언니의 놀라운 손힘이 느껴졌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시크한 언니의 표정이 더 좋다. (아, 너무나 멋진 언니)
펌은 만족스럽고 훌륭했다.
이 여름 시원하고 매력적인 컬을 자랑하며 다닐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 몸이 샴푸실에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내 피로가 샴푸실에서 한결 가벼워졌다는 말이다.
언니의 손힘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