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 Sep 30. 2020

먼저 간 사람의 시간이 멈춘 줄도 모르고

이별, 그중에 사별

 생사의 건널목


중환자실에서 마주한 할아버지는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셨다. 반백 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모습으로 언제나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정정한 어르신은 오고 간데없다. 마저 자라나지 못한 짧은 흰머리가 마치 이제 막 자라는 아이의 배냇머리처럼 보였다. 우뚝 솟은 광대에 솜털마저 보이지 않는 마른 노인네가 우리 할아버지다. 분명히 한 달 전까지 호통을 치며 아빠를 불렀던 어른이 살을 애일듯한 칼바람을 맞자 일어서지 못했다.      



푸른 가운을 대충 껴입은 채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심박수가 40 언저리에 머무는 화면을 보며 아빠가 할아버지를 살짝 흔들어 깨우셨다. 할아버지는 눈을 뜨시는 듯하다가 이내 눈을 감으셨다. 낮은 심박수에 불안함을 느낀 아빠는 한 번 더 할아버지의 어깨를 쓸어내린다. 할아버지가 눈을 뜨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슬기요-”라는 아빠의 말이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할아버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곤 입가에 미소를 지으셨다. 입 근육은 올라가지만, 눈꺼풀은 감긴다. 생사의 건널목 사이에서 첫 손녀의 눈을 본 할아버지는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에 웃었다. 본능, 그것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틀 뒤, 엄마에게 “목이 마르다. 물을 좀 다오.”라고 말씀하시곤 식사 없이 주무셨다. 본인 생에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물이었고, 본인 생에 마지막으로 웃은 일은 손녀의 얼굴이다.     

 


헤어진 지 5년 만에, 할아버지의 서랍에서 시계를 본다. 햇빛에 그을려 새카맣게 탄 할아버지의 팔목에 늘 껴있던 시계이다. 일하며 굵어진 팔과 마저 씻어내지 못한 손톱의 그을음이 이 은장 시계와 썩 어울렸다. 시계 유리 한쪽에 스크래치가 나있다. 시계의 스크래치는 명절에 놀러 온 손녀에게 줄 용돈만큼일 것이다. 그 흔한 시계가 먼저 간 사람의 시간이 멈춘 줄도 모르고 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부재가 가끔 실감 나지 않을 때처럼, 시계는 먼저 간 사람의 멈춰진 시간을 모르고 있다. 약발이 떨어지고 나면 시계도 진정한 이별을 받아들일 것이다.





 # 묻는 말

독자님께 최초의 이별은 무엇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잘 웃는 사람의 눈물은 밤에만 보이는 별과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