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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Oct 03. 2019

찰나의 짝사랑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공허하면서도 순수한 유치하면서도 진지한

긴 휴가를 받았다. 긴 비행시간을 끝으로 도착한 곳은 유럽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아주 오랜만의 긴 여정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부서지는 파도를 안은 한적한 바닷가. 도망치듯 일상을 떠날 수 있는 적격의 장소였다. 긴 이동시간을 끝으로 숙소로 들어선 거실엔 모두 유럽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일한 검은 눈동자인 내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익숙한 시선이었지만 그렇기에 곧장 더 피곤해졌다. 바로 씻고 짐을 제대로 풀지도 않은 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같은 방에 묵는 여자애가 들어와서 "Are you okay?", 걱정이 되었나 보다 착하게도.


난생처음 도미토리에 묵었다. 서른 언저리의 내겐 큰 도전이었다, 4인 혼성 도미토리라니. 숙소를 선택할 때 많은 고민 했다. 이제 이 나이엔 하룻밤이라도 엉성한 침대에서 잤다가는 다음날 아픈 목과 허리에 손을 올리고 여행을 망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커먼 남자들이 옆 침대에서 코라도 골면 밤새 잠을 못 이룰 것 같았고, 공용 욕실은 상상만 해도 너무나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말이다 이상하게 왠지 이번엔 도전해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뭔가 더 늦기 전에 라는 심정으로. 짐도 최소화하고 비싼 물건은 가져가지도 않고, 트렁크를 묶어 둘 단단한 자전거 자물쇠도 사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숙소 예약 버튼을 클릭하던 사람은 마치 내가 아닌 것 같다. 내가..?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부엌으로 가 숙소에서 제공되는 우유와 시리얼을 먹었다. 잠을 좀 자고 뭐를 좀 먹었더니 이제야 사회생활(?) 할 힘이 생겼다. 하나둘 모여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부모님께 받은 여러 타고난 능력 중에 다행히 내겐 두루두루 관계라는 라는 재능이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과의 거리감을 접어두고 다 같이 바닷가로 향했다. 


바다로 가 무한한 여유로운 하루를 반복한다. 외부 자극이라곤 하나도 없는 낯선 곳에서의 반복진 그 하루하루들이 내게 스며든다. 열심히라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내게 잔잔히 위로가 되어. 그저 그뿐이었다. 만족스러운 이 나날들을 그리워할 되돌아갈 미래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이 잔잔함에 마치 지렁이 모양 젤리에 붙어있는 하얗고 새콤달콤한 설탕 가루를 끼얹는 아이가 나타났다.  



바닷가에서 하루를 보낸 뒤 친구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외출했다. 그때 막 숙소에 도착한 처음 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함께 있었어도 말 한번 섞어 보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다. 열명 남짓한 무리에 갈색 곱슬머리에 장난스러운 입가를 가진 그 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그날 그와 나눈 대화들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다. 나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억하는 건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새카만 그 길 위에, 나를 좇아 속도 맞춰 걷던 그 아이의 걸음걸이, 연신 나를 향한 두 어깨 그리고 장난스러운 미소와 어울리던 그 푸른 두 눈.


호기심 어린 그 눈은 내게 특별하지도 않다. 아시아인이 별로 없는 유학지에서도 여행에서도 자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돌이켜보니 그 노무 그 눈 때문인 것 같다, 내가 그 아이를 신경 쓰게 된 건. 아오. 나는 대게의 친구들과 달리 두 눈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대부분 상대는 내 눈을 직시하지 않은 채 대화를 한다. 한 번은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너무 빤히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무섭다(?)고 해 충격을 준 적도 있다. 그런데 그 익숙함과 달리 이 아이는 내 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내가 말할 때도 내가 들을 때도 혹은 아무 말하지 않을 때도. 마치 처음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눈동자를 그리 깊게 들여다본 것이.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 진득이 보고 있노라면 그 속이 점점 더 보일 것 같아 더 깊게 쳐다보게 되는 두 눈.


그 아이에게 관심을 깊게 가지기 시작한 건 그다음 날 점심이었다. 내가 숙소로 들어간 첫날부터 같은 방에 묵던 여자아이는 손톱을 너무도 정리하고 싶어 했지만 도구가 없었다. 마침내 손톱깎기를 얻게 된 그녀는 손톱을 정리했고,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재잘거렸다. 나는 늘 그랬듯 그녀의 손톱을 보며 얼마나 단정하게 되었는지 이쁜 손톱을 칭찬해 주었다. 그때 그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I am happy that you are happy. 네가 행복하다니 나도 행복해.


후에 하필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에게 던진 말 때문이라니 짝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속상해했다. 여하튼 나는 이 말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가령 새로운 매니큐어를 바르고 친구들을 만나면 이쁜 색이나 그 취미생활에 대한 기쁨을 동조받곤 했다. 그런데 그 행동 결과에 대한 판단 없이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동조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 말은 마치 미래의 내가 아이를 키울 때 해주고 싶은 말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 말은 살짝 cheesy 했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날 저녁 그 아이와 나를 비롯해 몇 명이서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꽤 친해진 우리들은 끊임없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스무세 살 유학하던 나로 꼭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파스타 재료가 들은 비닐봉지를 팔뚝에 걸고선 숙소로 돌아가는 밤길을 재촉했다. 마트에서 산 어린 시절 추억의 우산 모양 초콜릿을 그 아이와 나눠먹었다. 나 한입 그리고 그 아이 한입씩, 그렇게 반복해서. 추운 바람 탓이었을 까 쌩쌩 다니는 차 탓이었을까, 자연스럽게 그 아이는 내게 팔짱을 끼더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아직도 나는 그 남자아이가 한 말들이 완전한 농담만인지 진심이 섞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How about living here with me FOR the rest of your life? 남은 일생을 여기서 나와 살아보지 않을래?


시작부터 감히 이 늙은 누나를 설레게 하는 판타지(기분 좋은 상상 혹은 공상) 그 자체였다.


네가 하고 있는 일은 유럽에도 있으니까 또 구할 수 있을 거야. 휴가가 1년에 십 며칠밖에 안 되는 곳(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국내 회사에서 연간 주고 있는 휴가 일수를 유럽인들은 말도 안 돼 했다.)보다 여기선 한 달 넘게 받을 수 있어. 그리고 결혼을 하고 여행을 다니자. 아이는 몇 명 낳고 싶어? 3명은 어때? Girl, boy, girl? or boy, girl, boy? 남은 인생 동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파스타를 매일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숙소에 도착했고 허겁지겁 파스타를 해 먹고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헛소리가 난무하던 긴 밤의 끝에 웬일인지 나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내가 감히 그 유치한 판타지에 설레고 있는 것이다! 가볍고 끈적한 연애를 겪은 서른 언저리의 다 큰 내가 주책도 대박 주책이다. 유치 짬뽕한 공상에 밤잠을 설치는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일 년을 넘게 사귀고 결혼을 이야기하던 지난 남자 친구가 쌍둥이를 낳고 2층 전체가 큰 욕조 하나뿐인 작은 주택을 노래할 땐 아무 생각이 안 들더니 말이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한 나는 짜증이 나 있었다. 본인에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여느 때와 같이 서핑을 하고 해변가 카페에서 샌드위치 점심을 먹었다. 그 아이와 좀 더 있고 싶어, 나는 맥주를 한잔 더 시켰다. 모두들 다시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 스멀스멀 자리를 떴다. 마침내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는 테이블에 올려진 그 아이의 지갑을 구경했다. 그 아이는 지갑 깊은 곳에서 자신의 사진 하나를 꺼내더니 보여주었다. 정장을 입고 지금보다 앳된 얼굴이지만 곱슬머리와 장난스러운 입가는 그대로였다. 둘 다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그는 자신의 의자를 내 쪽으로 돌리고선 장난스러운 입가는 그대로지만 검은 선글라스를 벗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M: 이렇게 하자. 돌아가고 나서 다시 여행을 와. 그리고 나와 만나자. 일주일 동안 내가 제일 맛있는 식당에 데려가고 유명한 관광지에 데려갈게. 그런데 그 일주일 동안은 나와 데이트를 하는 거야. When it goes well, let's figure out how it works. 그러다 서로 잘 맞으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나: 결혼식은 어디서 해?
M: 음.. 한국에서 하자! 그리고 뒤풀이는 우리나라에서 하는 거야.
나: 매일 쌀밥 먹을 수 있어?
M: 너는 밥 먹고 나는 파스타 먹고.
나: 내가 같이 밥 먹자고 고집 피우면 어떻게 할 거야?
M: 음.. 밥 먹고, 밤에 몰래 파스타 끓여 먹을게. 그런데 너네 부모님이 나 외국인이라고 싫어하면 어떻게?
나: 예전에 여쭤본 적 있는데, 한국말만 할 수 있으면 문제없데.
M: 그럼 우리가 잘 된다면,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해야겠네. 아이는 눈색만 날 닮고, 나머지는 다 널 닮았으면 좋겠다.
나: 아이 셋 낳으려면 나는 좀 늦은 거 같은데..
M: 나는 전혀 상관없어! 우리 빨리 서둘러야겠다.
나: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M: 어디든 좋은데.. 아, 하와이는 어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살기 싫으면 다른 유럽에서 살아도 되고, 아니면 매일 서핑할 수 있는 필리핀도 좋아!


그 찰나에 주책바가지인 나는 하와이 마우이 섬의 진한 녹색 숲과 와이키키 해변 앞에 밀키스색 파도를 보는 한 서퍼부부의 자유분방함을 그렸다. 그리고 진한 갈색 곱슬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담고선 내 오동통한 볼을 머금고 깨발랄함을 쏙 빼닮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상상했다.


웃음이 났다. 순하고 유치한 얘기를 다시 꺼내는 그 아이를 보니 웃음이 났다. 혹은 그 속내가 순수하고 유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과는 달리 마음은 두근거리는 나 자신에게 웃음이 났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이 대화에 설레고 있는 나의 마음이 들킬까 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정적을 끝으로 손 한번 잡지 않은 우린 아주 Casual 하게 헤어졌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설레게 했을까. 고즈넉하고도 낯선 여행지에서 주는 그리고 휴가기간의 한정된 시간? 짜디짠 바다와 같은 현실로의 도피되는 달콤한 제안? 처음으로 들여다 본 깊고 깨끗해보이는 그 회색빛의 푸른 눈동자? 모든게 완벽했던 것 같다, 찰나의 짝사랑으로 남기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고, 출근하여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엑셀을 정리하고 피피티 자료를 만들었다. 여행 마지막 날 핸드폰이 고장 났고, 그 여행지에서 찍었던 모든 사진들과 기록들은 날아갔다. 마치 내게 무슨 사인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아이도 잘 지내는 것 같다. 아마도 우린 그 장난 어린 재회의 약속에 응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게 그 아이와 내가 떨어진 거리적 현실적 괴리감을 모두 알고 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공상에 잠길 때면 여름 낯선 곳에서 만곱슬머리 아이를 떠올리며 웃음을 짓는다. 그 만남의 진짜 본질에는 관심이 없다. 그 찰나의 짝사랑이 내게 남아있는 느낌이 중요하다. 공허하면서도 순수한, 유치하면서도 진지한, 낯선가 준 그 설렘이 때때로 아직도 그날과 오늘의 나를 헷갈리게 한다. 나의 이 주책맞은 짝사랑은 현실로 빨리 돌아오라고 채찍질을 받고 있지만, 사실 그 아이의 지갑에 들었던 그의 사진은 이제 내 여권 사이에 꽂혀있다. 언저리의 짝사랑으로 그렇게 남겨두고 싶다. 오늘도 나는 그날이 떠오르다 'Girl, boy, girl'이 나을지' Boy, girl, boy'가 나을지 철없는 망상에 진지한 실소를 내벧았다. 


깊고 알 수 없는 회색빛의 푸른 눈동자, 곱슬거리면서도 부드러운 진갈색 머리칼, 바닷물에 거칠어진 둔탁한 그의 손가락. 너울거리던 것은 그 바닷가의 파도였을까 찰나를 함께한 우리들의 마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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