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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Nov 08. 2019

다섯 번째 오감, 촉각의 결핍

촉감 그리고 스킨십에 대한 갈증과 사색


촉각 [tactile sense, 觸覺]
촉각은 피부에 닿아서 느껴지는 감각을 말해요. 촉각에는 눌리는 감각인 압각, 아픈 감각인 통각, 차가운 감각인 냉각, 따뜻함을 느끼는 감각인 온각 등이 있어요.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천재 학습백과 초등 과학 용어사전)
스킨십 [skinship]
피부의 상호 접촉에의 애정의 교류. ‘살갗 닿기’, ‘피부 접촉’으로 순화.

-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의 어린 시절에 나는 희한한 버릇이 있었다. 옷 안에 달려 있는 상표를 매만지는 버릇이다. 웃옷 옆구리 쪽에 달려있는, 옷 소재와 세탁방법을 표기해 놓은 그 작은 천 말이다. 그 상표를 반으로 접어 엄지와 검지로 비비듯이 매만지는 게 나의 버릇이었다. 기억나는 순간도 있다. 아빠와 둘이서 계단을 오르는데 아빠의 바지가 그렇게 부드럽고 얇은 소재라 아빠의 바지를 두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올라가던.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내가 베개만큼 작은 아기 때 네모진 배게를 침대 삼아 엎드려 곧장 잠들곤 했는데, 한쪽 손가락은 입에 물고 다른 한쪽 손가락으론 베개에 달린 그 상표를 만지작거리면 잠들었다는 것이다. 그 부드럽고 미끌거리는 촉감이 주는 심리적 안정과 만족이 여느 한 아이에게 귀여운 버릇을 들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키가 훌쩍 커버리는 속도로 그 귀여운 버릇은 사라졌다. 그 대신에 나는 품이 그리운 순간이 문득문득 찾아옴을 느낀다. 퇴근하고 지친 몸을 TV 꺼진 집에 홀로 들어 세울 때라던가, 운동을 하고 젖은 머리 채로 밖에 나왔을 때 내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라던가. 그 순간순간에서 가끔 품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딱히 무슨 일이 생겼거나 이별 후 슬프고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의 갈증으로부터 오는 부드러운 촉감을 향한 갈증이랄까 그리움이랄까. 몸이 자그마할 때는 그 손가락만 한 크기의 천으로도 만족스러웠는데 어느새 커진 덩치만큼 탓일까 커다랗고 포근한 품을 바라고 있다.



그런 순간을 모아둔다, 기원 모를 촉감이랄까 스킨십에 대한 갈증을. 그리고 해소한다.


본가에 가면 엄마를 크게 한 번 안는다. 그것도 아주 세게. 엄마의 목과 어깨 사이로 눈을 꼭 감고 파묻고선 요가할 때 배운 온몸으로 통하는 깊은숨을 들이마신다, 내가 엄마 냄새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나보다 왜소해진 엄마의 겨드랑이 밑에 두 팔을 집어넣고선 조그마한 그 몸을 꽉 끌어안는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꽉 조일만큼 세게 안고나면 저릿한 그 느낌에 이어 어딘가 꽉 차는 기분이다. 마무리는 엄마를 번쩍 한번 들어 올리고 내려서 기침 나는 엄마가 날리는 등짝 스매싱 한 대. 그제야 만족한다. 이 강한 포옹으로 부터오는 눌리는 압감은 심장이 갑자기 눌렸다가 풀어져 순간 가득 차오르는 벅찬 행복감을 선사한다.


고양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이 결혼이 더 늦어지겠다고 한 말은 이제 좀 이해가 갈 것 같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면 당연한 순서로 복실복실 우리 집 털 복숭이를 찾으러 두리번두리번 돌아다닌다. 소파에서 열심히 그루밍을 하던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면 자동적으로 한 껏 올라간 광대뼈를 억지로 누르며 고양이를 번쩍 들어 침실로 데려간다. 넓디넓은 침대에 고양이를 눕히고 얼굴을 파묻는다. 우리 집 냥이의 냄새가 그득한 그 배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킁 냄새를 맡는다. 눈과 코와 볼을 한껏 부빈다. 고양이가 안기기 싫어하면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 엉덩이에 얼굴을 파묻고 두 눈을 감는다. 고양이 특유의 고소한 발 냄새를 맡으면 황홀하달까 녹아내린달까. 이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는 아이와의 부드러운 촉감의 스킨십은 심장이 서서히 가득 차 오르는 녹녹한 행복감을 선사한다.


남자 친구와의 함께 보내는 밤에서도 갈증은 해소된다. 엄마와 세게 안은 포옹이나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박는 느낌과는 다른 안정감으로. 서로 같은 벽을 바라보고 눕는다. 그의 오른팔 위에 목을 누이고 그의 왼팔은 내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와 나의 몸을 따라 감싼 뒤 내 가슴 앞에 놓아둔다. 그의 왼팔 위에 나의 왼팔을 얹어 그의 손등을 매만진다. 내 발가락은 그의 무릎을 간지럽히다 종아리 위에 얹힌다. 그를 마주하거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아도, 나의 등을 폭 감싼 그의 몸이 어두운 방 안에서 오는 불안감을 잠재운다. 덧붙여 그의 숨결이 내 정수리를 스치는 순간 나는 한층 더 안정된다. 그의 냄새가 나의 냄새가 되고 내 품에 스며든다. 편안하고 포근한 그 순간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천장이 높은 방은 적막했지만 그 순간엔 가습기를 튼 것처럼 촉촉하고 무른 공기로 점점 채워져 간다. 이 따뜻한 온감의 스킨십은 토요일 오후 2시에 거실로 내리쬐는 햇볕 같은 안정적이고도 포근 온도로 흐드러지게 한다.



딱히 위로가 필요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품이 그리운 날이 있다. 직접적인 표현이 오고 가지 않아도 살과 살이 닿는 느낌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차오르고 피어오르는 기분이 든다. 무언가가 차오른다는 표현은 아마 무언가가 회복된다는 느낌 일터이다. 이쯤 되니 누군가에게나 고유의 개인 장독대가 몇 개 있는 게 아닐까 상상이 되었다. 대화의 장독대, 혼자만의 시간 장독대, 스킨십의 장독대, 술의 장독대 등등. 개개인마다 그 크기도 다르고 종류도 다르겠지만 내 앞마당에는 그렇게 적절하게 채워줘야 하는 장독대들이 있고, 그것은 날 든든하고 외롭지 않게 한다. 그렇다고 넘치면 또 다른 스트레스겠지만.


촉각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풍요로 가장 대표되는 것이 스킨십이겠다. 영어로도 Skinship, 피부가 닿음으로써 전달되는 관계 모양의 어느 것이란 느낌이 든다. 강한 포옹이든 부드러운 촉감이든 함께 그저 맞대고 있든 그 모든 모양의 그것. 생각해보면 스킨십의 파워는 대단하다. 어두운 길을 지날 때 꼭 잡아주는 아빠의 손은 혼자가 아니라는 공포심을 극복하게 도와준다. 수능시험 치는 날 아침 갓 지은 햅쌀밥의 냄새를 머금은 엄마의 포옹은 긴장감을 해소시켜 준다. 의기소침할 때 내 등 위로 토닥이는 친구의 손은 내 등 뒤에 누군가가 있음이란 용기를 복 돋아 준다. 길었던 하루를 뒤로하고 침대에 누워 침체하는 내 옆으로 다가와 살짝 기대는 반려동물의 묵직함이 하루의 마무리를 의미 있게 녹여준다. 실로 대단하다, 말이 필요 없는 고작 터치 그 하나가.



예전에 친구가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밀쳐짐으로써 어쩔 수 없는 본연의 결핍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될 때 엄마의 자궁 내벽에 붙어서 존재를 시작하게 된다. 처음부터 나는 엄마와 한 몸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나는 밀쳐진다. 아이의 탄생은 엄마가 자기 몸으로부터 밖으로 아이를 밀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이 사람의 인생에 있어 최초로 내쳐지는(abandoned) 경험이고, 피부와 피부가 닿는 촉각 즉 스킨십의 갈증의 근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영화 '헤드윅(Hedwig)'에서 태초 인간의 형상은 두 사람의 등이 맞붙어있는 네 발, 네 팔, 두 머리로 존재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방을 볼 수 있고 자유로운 네 팔 다리로 만능이었다. 하지만 신의 노여움을 산 인간은 신이 던진 번에 의해 그 등이 떨어지고 결국 지금의 인간 모습으로 둘로 나뉘어 살게 된다. 신은 인간의 몸 한가운데에 배꼽이라는 상처를 주어 그 사실을 기억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내 반쪽이었던 사람을 아니 사랑을 찾아 평생을 헤맨다. 하필 서로 등이 붙었어서 얼굴을 모르기에, 그 반을 찾아 반푼이처럼 하염없이 헤매는 인생을 살아간다. 떨어져 나간 반쪽을 향한 만질 수 없는 리움이 이 갈증의 또 다른 기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Hedwig에서


가만히 내 배꼽 가운데에 검지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나와 한 몸이었던 존재로부터 밀쳐진 최초의 기억이자 나의 반이 떨어져나간 것을 증명하는 상처. 피부가 하나로 맞닿아있던 존재와 더 이상 닿지 못하는 촉각의 결핍에서 밀려오는 스킨십의 갈증.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형용할 특정 사건 없이도 그 무식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느 한 때 들이닥치는 살결의 그리움에 그토록 사무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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