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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May 16. 2020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엄마의 양손가락들은 울퉁불퉁하다. 골다공증을 앓으며 손가락 마디마디 관절은 부풀어 오르고 딱딱하게 굳고 휘어졌다. 엄마도 열 손가락 곧게 뻗은 적도 있었을 텐데 내 기억 속에는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시골에서 시집살이에 딸을 업고 양 손에 장본 짐을 들고 다니느라 그런 건지, 내 태어나고 나서 한겨울에도 찬 물에 국수와 채소를 씻으며 장사하시느라 그런 건지. 내 기억 저편부터 엄마의 손은 아팠고 약을 병째로 달고 사셨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으셨고 반지도 끼지 않으셨다. 하물며 남자들도 그리 손이 망가지면 속상할 텐데, 꾸미고 싶은 게 많을 이 여자는 아픈 데다 못났기까지 한 그 손이 얼마나 속상하고 보기 싫었을까. 열 손가락 중에 병을 피해가 멀쩡한 손가락 한 두 개. 우습게도 그마저도 내가 아프게 했다.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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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자마자 폐렴을 앓았다. 엄마의 나이 서른. 서른을 넘겨본 오늘의 나는 알 수 있다, 그 얼마나 어리고 무섭고 불안정했을지. 젖도 못 뗀 나는 팔에 주사를 놓을 수 없어 정수리에 링거 바늘을 꽂고 있었다고 한다. 태어날때부터 나는 그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이 갓난쟁이는 엄마 품에 꽉 안겨보지 못하고, 네모지고 투명한 인큐베이터에 주렁주렁 주사링거를 메달고 홀로 누워있어야 했던 내새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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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언니가 쓰던 영어교재로 공부를 했다. 나도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과 학원을 다니고 싶었고, 고등학교 때 성적이 뒤처지기 싫어서 과외를 받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상 택도 없었다. 아빠 몰래 유학을 보내주려고 엄마가 조금씩 돈을 모으던 통장을 언니가 고자질해서 엄마는 뺏겼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나는 대학도 가고 장학금을 받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유학도 다녀왔다. 상상컨데 엄마는 대견스러우면서도 미안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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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야상을 입고 커다란 선물받은 곰인형을 끌어안은 20살의 나는 엄마와 함께 기차역에 갔다. 서울로 홀로 상경하는 길이다. 엄마는 내 표를 손에 쥐어주고선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했다, 역 안 매표소 앞에서. 나는 나름 씩씩하게 성큼성큼 기차 플랫폼까지 혼자 가서 기다리다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엄마는 아직도 두고두고 그날을 이야기한다. 표가 없어도 플랫폼까지는 배웅하러 같이 가 줄 수 있는데 그때는 그게 되는지도 몰라서 아주 멀찌기 나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는 걸 보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고. 혹여나 안되어도 딸내미 혼자 보내는데 플랫폼까지 가면 안 되겠냐고 직원한테 사정했어야 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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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하숙집에 살았데 그 세탁기는 열몇 명이 쓰는 데다가 성치 못해서 제대로 빨래가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게으른 하숙생에게 이불빨래는 연례행사였다. 교환학생으로 해외를 가게 되면서 모든 짐을 집으로 택배 보낸 뒤, 해외로 떠났다. 직장인이 되고 한참 뒤 나는 엄마에게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서울에서 보낸 딸의 짐을 풀어 옷가지와 이불을 빨았다. 배게를 꺼냈는데 동글동글 포도알과 같은 자국들이 네모 베게에 가득. 이게 무엇이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물에 적시다 엄마는 이내 눈물이 터졌다. 이 모든게 내 딸의 눈물자국인 것이다. 매번 씩씩하게 잘 지낸다고 통화도 했고, 어느 날부터는 서울말을 쓰면서 도시 아가씨가 다 된 척하더니만.. 우리 딸은 객지에서 혼자 어두워지는 밤이 찾아오면 매일 배갯입을 적신 것이었다. 엄마는 베개의 포도알을 지우기 위해 손빨래하셨다고 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미어지는 가슴을 내려 흐르는 눈물에 한스러운 한숨을 보태며 딸의 아픔을 자책하듯 손수 빠셨다. 그렇게 나는 더 견고히 그렇게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어갔다.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객지 생활을 하며 눈물을 많이 훔쳤다. 가족이 보고 싶기도 하고, 세상이 무섭기도 하고, 무언가 서럽기도 하고. 물론 연애사 때문도 있었겠고. 나는 그런 시련의 시간이 나를 더 강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겪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밤마다 눈물을 떨어뜨려 남긴 자국은 배게에만 아니란 사실이, 엄마 가슴 한편에도 아주 단단히 자국을 냈다는 사실꽤나 격을 받고 가슴이 시렸다. 나의 슬픔은 곧 엄마의 슬픔. 내가 남에게 받는 대우는 엄마가 받는 대우이며, 내가 받는 사랑은 엄마가 받는 사랑이다. , 누군가 내게 함부로 행하는 것을 거부하, 나는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그리 저려왔던 엄마의 손가락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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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내게 상처를 주고 헤어진 전남친에 펑펑 운 적이 있는데, 다시 재회에 흔들리기도 했다. 그 때 나 자신이라기 보단 우리 엄마의 딸에게 그런 놈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훨씬 극복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감히 엄마 생에 최고의 업적과 자랑에 그런 상처주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이처럼 자존감을 천천히 그리고 단단이 채워갔다.

어느 날은 남자친구가 내가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부분을 주는 부분에 대해 고마워하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처음 알았다. 어릴 적 엄마가 고등어 뱃살은 발라 꼭 언니나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고, 본인은 뼈에 붙은 살을 발라드셨다. 그때는 그런 엄마의 희생이 짜증 나고 싫었다. 엄마도 본인 몫을 챙기며 사시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런데 보고 배운 데로 나도 행하고 있었다. 내가 해보니 그건 내 몫을 안 챙기는 희생이기 전에 행복한 사랑표현이었다. 엄마의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이 오늘날 내 자존감의 근간이었고, 또 내가 자존감에만 빠지지 않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한  다름 거름이었다.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그래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사랑을 받으며 살가 아팠던 손가락을 낫게 해드릴 것이다. 그것들은 나를 사랑으로 일군 엄마에게 회기 하는 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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