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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 Aug 29. 2022

두부같은 두 사람을 주선했다

두부튀김과 두부조림의 청첩장

청첩장 봉투를 열었을 때 짙은 나무색의 초대장이 불쑥였다. 그곳에는 익숙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했다. 하지만 나란한 두 이름이 낯설었다.


3월, 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꽃이 피는 근거림이 조급 해지는, 봄이라 일컫는 계절이었다. 30여 년 간 내 친구로 또 내 친구의 친구로 다른 인생을 살 던 두 사람이 누군가의 소개로 서로 만났다. 둘은 처음 만난 날 여느 소개팅과 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이끌린 건지 헤어진 지 두어 시간 만에 다시 만났다고 한다. 아직 못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지만, 다음에 만나서 하면 되지 굳이..? 역시 변명이었다, 어서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만난 날의 자정이 훌쩍 넘어가도록 그들은 손 한번 잡지 않은 채 밤새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갔다. 둘이 살다가 싸우는 날이 오면, 그날 내가 미쳤지를 내저를 사건 정도 랄까.


소개해준 감사의 인사 및 결혼 초대의 자리에 날 불러놓고 두 사람은 내내 서로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꺼낼 때 쳐다보고 말을 끝날 때도 쳐다본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나를 한 번 쳐다봐준다. 나를 왜 불렀지라는 찰나가 지나 멋지고 생각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결혼을 말하는 세상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눈을 마주치는 이 만남 아주 멋지다 여겼다. 홀로 이 몸뚱이를 이끌어 가는 이 삶에서 나를 봐주는 사람이 있고 내가 바라볼 곳이 있다.


더욱이 두 사람 모두 성인 때부터 객지 생활을 했다. 한 번은 엄마에게 물은 적 있다. 막내딸인 내가 결혼하면 슬플 것 같냐고. 엄마는 그것보다 든든한 이랑 살면 불안하지도 않고 의지하고 살 테니 안심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과 아들인데 하염없이 조건 없이 바라봐주는 이가 있음에 그리고 더욱이 혼자 씩씩히 살아가던 아이 옆에 이런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음에 부모들은 서로 감사해야 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 커플은 손 잡고 나란히 걷는 것보다 손 잡고 부둥켜안고 의지하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 풍족한 감정의 물결이 이들을 감싸는 삶이 그려지자 얼마나 행복할지 미래의 아이들은 어떨지 그려진다.


두 사람의 만남은 0 아니면 100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비슷한 두 사람이었기에, 반향 된 본인의 모습에 지겨울지 마음이 동할지 흥미진진했다. 청첩장을 받던 날, 두 사람이 마음이 동하다 못해 일심동체가 돼 버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친구가 가슴 아픈 어린 시절 얘기를 하자 다른 친구가 눈물을 그렁거렸다. 나는 정작 '누구나 그 정도 아픔은 있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쎄 눈물을 짓다니.. 팔불출들이다. 그리고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왜 결혼하냐는 질문에 대부분은 머쓱해하거나 혹은 '그냥 어쩌다' 라던지 '정신 차려보니'라고 대답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사랑해서'라며 저녁 먹는 내내 두 사람만 서로 쳐다보고 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만 집에 가고 싶은 피곤함이 그 둘 사이에 앉은 불청객으로서 밀려들어왔다..


 친구를 튀긴 두부 같다고 생각한 적 있다. 각진 턱에서부터 시작되는 든든한 풍채에, 한 성깔 해 보이지만 자기 사람 일에는 한 없이 흔들리는 사람. 포실포실한 두부인데 어찌 튀겨진 단단한 갑옷을 두른 사람. 절때 놀리거나 공격해선 갑옷을 부술 수 없지만, 자기 사람 이야기를 물어볼 때 물렁해지는 사람. 튀긴 두부에는 짭조름한 묽은 간장이 어울릴까 구워진 말랑한 당근이 어울릴까 했더니 웬걸 같은 두부랑 짝이 되었다. 물론 이 친구는 튀긴 두부보단 두부조림이랄까.. 화려하고 밝고 맛깔스럽지만 조려져서 조금 끄트머리가 으깨졌다. 그런데 튀겨진 두부는 밝은 웃음 뒤에 숨은 아픔을 안다. 으깨지기 전에 튀겨져서 그 진가를 안다. 그래 둘은 아주 환상의 짝꿍이다. 물러 터진 둘이 하나는 요새 쌓는 법을 다른 하나는 내려놓는 법을 주장하는 사이 서로는 어느 경계도 필요 없이 벌거벗은 채 내놓을 수 있는 천상의 짝꿍이니 말이다.


이 두부들이 집 현관에 들어설 때 신발을 벗는 동시에 튀김과 양념에 숨겨졌던 본래의 뽀얀 모습으로 들어설 것이다. 그 순수한 모습을 서로 보듬고 안아주고 밤새 재잘거릴 것이다. 왜 청첩장 속지가 단단한 나무색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서로를 알아보았고 지켜보고 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단단했다. 운치 있는 느낌마저 닮았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벗어놓은 채 열렬히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음에 얼마나 행복할까. 사랑받는 것보다도 나는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 표현이 가능함을 더 높이 산다. 내가 당신을 사랑함을 무한히 표현한다는 것은 나도 당신도 어떤 조건적 계산도 없으며 이미 무한히 받고 있음이 전제돼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질투의 마음으로 10년 넘어 살면 변할 거야라고 말하겠지만 지금 그들에겐 과거도 미래도 중요치 않다. 오늘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럴 수 있음에 이미 가치 있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살아가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만큼 가치 있는 순간은 없다. 느 소설가들이라면 꿈꾸는 일생이 아닐까.


사실 이 글은 몇년 전에 쓴 글인데 서랍에서 다시 발견하였다. 얼마전 다시 만난 이 커플은 여전히 서로를 마주하고 부둥켜 안고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자리가 자리여서 그런가 전보다는 조금 점잖아져서 다행이고 여전히라 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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